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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Saturday] 박기봉, 이문열·황석영 양강구도 깨나 … 『삼국지』 삼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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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으로] 소설 삼국지 시장 지각변동

박 대표 “충실한 직역 시장서 호평”

두 달 만에 2만4000권 팔려 2위로

이씨, 원문과 다른 표현 용인 ‘평역’

논술에 효과 입소문 통산 1800만부

황씨는 개성 발휘한 ‘의역’ 많아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 매력적

‘국민문학’ 삼국지 소설 시장에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지난해 11월 ‘최초 완역’이라는 홍보 문구를 내세운 비봉출판사 판 『삼국연의』(전 12권)가 시중 서점에 깔리면서다.

그동안 국내 삼국지 시장은 황석영(71)과 이문열(67), 두 대형 작가의 번역본이 양분해 왔다.

1988년 첫 출간된 이문열 『삼국지』(전 10권·민음사)는 지금까지 1800만 부 넘게 팔린 것으로 집계된다. 90년대 중후반 대입 수능 고득점자들이 논술 대비에 효과가 있다고 잇따라 ‘증언’한 덕을 봤다. 2003년 출간된 후발 주자 황석영 『삼국지』(전 10권·창비)는 170만∼200만 부가량 팔렸다. 대하소설 『장길산』 등에서 익히 선보인 황씨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이 매력 포인트라는 평가다.

두 삼국지의 시장 점유율은 해마다 80%에 이를 만큼 막강하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 1월 중순부터 1년간 이문열 『삼국지』는 시장의 66.5%, 황석영 『삼국지』는 18.7%를 차지했다. <그래픽 참조> 하지만 이들의 견고한 양강 체제에 미세하나마 균열이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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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출판사 『삼국연의』는 한학(漢學)을 독학하다시피 한 박기봉(68) 대표가 2년 동안 직접 번역했다. 나온 지 채 두 달도 안 돼 황석영 『삼국지』를 3위로 밀어냈다. 이문열 『삼국지』의 점유율 역시 덩달아 떨어졌다. 4위인 일본의 대중작가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1892∼1962)의 『삼국지』(전 10권·문예춘추사)는 만화가 고우영(2005년 작고)의 만화 『삼국지』의 바탕이 된 작품이다. 황석영·이문열 본에는 없는, 효성 깊은 유비가 어머니를 위해 차를 사려다 황건적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를 제외하면 한국인 번역자 세 명이 ‘삼국지 삼파전’을 벌이는 모양새다.

박기봉 『삼국지』는 새 번역에 대한 독자들의 호기심, 언론의 조명 등이 작용해 일단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 서점 예스24의 김성광 MD는 “워낙 삼국지 시장의 경쟁이 치열한데다 좋은 평가든, 나쁜 평가든 아직 본격적인 입소문이 돌기 전이기 때문에 기존 삼국지 판도에 변화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반면 박 대표는 “이전 판본에서는 볼 수 없던 충실한 번역이어서 시장이 반응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온 그는 농협과 증권사 등에서 일하다 80년 출판사를 차렸다. 상위 1000명이 제정신을 차리면 한국이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어려서부터 익힌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의미 있는 책들을 직접 번역·출간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충무공 이순신 전서』(전 4권),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등을 번역했다.

중앙일보

그는 “새 번역본이 나올 때마다 챙겨 읽는 삼국지 매니어들 사이에 비봉출판사 판이 최고라는 여론이 이미 형성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사인을 요청하는 개인 주문자도 많다고 한다. “초판 2000질이 거의 소화돼 두 달 만에 2만4000권이 팔렸다”고 밝혔다.

박 대표가 내세우는 『삼국연의』 번역의 강점은 자구 하나하나 일대일 비교가 가능한 직역(直譯)이다. 소설 삼국지의 원저자인 명대(明代) 나관중의 『삼국지 통속연의』는 이야기 중복이 많고 문장이 느슨해 재미는 물론 문학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한다. 이를 대폭 줄이고 손질해 120회 장회소설(章回小說·‘회’로 이뤄진 소설)로 만든 사람이 청대(淸代)의 모종강이다. 이른바 모본(毛本)이다. 박 대표는 “300년 전부터 지금까지 통용되는 모든 삼국지 번역의 원전은 모본”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지금까지의 국내 번역이 대부분 모본을 충실하게 옮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박 대표는 “한문은 말의 압축이 심하고 말과 말을 연결하는 끄나풀이 많지 않아 고도의 논리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자칫 오역을 하기 쉽다”고 말했다. 또 “인물의 이름이나 관직명, 고을 이름 등의 오역은 작품 이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그나마 낫지만 소설 안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서신이나 표문(表文·황제에게 올리는 상소문) 등은 대부분 수준 높은 고문체로 돼 있어 올바른 번역이 어려운데 이를 잘못 옮기면 온전한 작품 감상이 어렵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황석영·이문열 『삼국지』 번역은 문제가 많다는 게 박 대표의 주장이다. 우선 나관중의 원문에 모종강이 붙인 일종의 작품 속 감상평인 서시 평(序始 評), 협평(夾評) 등이 두 번역본에는 모두 빠져 있다. 이문열 『삼국지』는 ‘평역(評繹)’이라고 이름 붙여 이야기의 변경, 원문과 다른 문장 표현 등이 용인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하지만 황석영씨는 정본 『삼국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번역했다고 하지만 오류가 많다는 게 박 대표의 지적이다.

박 대표는 황석영 『삼국지』 번역의 문제로 제시한 사례들 중 여포에 대해 묘사한 부분이 있다. 박 대표는 ‘人中呂布, 馬中赤兎’라는 원문을 ‘사람 중에는 여포요, 말 중에는 적토마’라고 또박또박 번역했다. 반면 황씨는 ‘과연 출중한 인물에 빼어난 적토마였다’고 옮겼다. 이런 대목은 번역 오류라기보다는 번역자의 개성이 발휘된 이른바 의역(意譯) 사례로 읽힌다. 그러나 박 대표는 “진수의 역사서 『삼국지』를 바탕으로 한 소설인 『삼국지 통속연의』는 이미 세계적인 고전인데 그런 작품의 번역이 번역자에 따라 들쭉날쭉한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또 “황씨 『삼국지』의 경우 뒷부분에 가면 원문을 정확하게 전하면 오히려 간결한 맛이 살 텐데 자기 문장을 많이 집어넣어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소설 삼국지는 한·중·일 삼국의 공동 문화자산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중국 바깥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인하대 기초학문연구단 조사에 따르면 20세기 초부터 2004년까지 소설·만화·드라마·실용서 등으로 번역·가공된 한국어 콘텐트는 자그마치 342종에 이른다. 요즘은 컴퓨터 게임으로도 만들어진다.

이런 인기의 비결은 무엇일까.

문학평론가 정홍수씨는 “삼국지가 처세에 도움이 된다는 식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그 안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 유형에 자기 자신이나 주변의 인물들을 대입해보는 것만큼 재미 있는 일은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 자신 소설 삼국지를 번역한 소설가 조성기씨는 한 글에서 “『삼국지』가 수많은 번역자들에 의해 계속해 재번역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원본의 이야기 구성이나 문장 표현 등이 그만큼 요즘 기준으로는 재미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박 대표의 『삼국연의』는 모종강의 감상평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 소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살펴보게 된다. 사건의 이해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강조하기도 한다.

박 대표는 “만사를 제쳐두고 삼국지를 읽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소설의 효용은 읽어서 재미있고 인간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할 계기를 만들어주는 정도 아니겠나. 다만 소설 삼국지를 읽으려고 마음먹었다면 『삼국연의』를 권한다”고 말했다.

『삼국연의』는 9권에서 12권까지 네 권이 한문 원본이다. 한글 번역본과 대조해보라는 취지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S BOX] “삼국지 전투장면은 대부분 허구” … 칠종칠금도 근거 희박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 1권 앞부분에는 유비가 다 죽어가는 노승(老僧)의 도움을 받아 고을 수령의 아리따운 딸 부용과 함께 황건적의 손아귀에서 탈출하는 장면이 나온다.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의 사건 전개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소설 삼국지의 정본인 모종강본 『삼국지 통속연의』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문열 『삼국지』도 모본(毛本)에 나오지 않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유비가 공손찬과 함께 스승 노식 밑에서 수학하는 대목은 모본에 없다.

소설 삼국지는 수많은 역자들에 의해 번역·평역되다 보니 다양한 문체, 판본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을 띠게 됐다. 그러다 보니 3세기 진수의 역사서 『삼국지』와 나관중의 소설을 대폭 손본 17세기 모종강본, 이 모본을 바탕으로 작성된 수많은 아류들의 내용 중 어떤 사건이 실제 역사에 부합하는 사실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비봉출판사 박기봉 대표는 “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적벽대전 전투 장면부터가 역사책에 없는 허구”라고 밝혔다. 전투 자체는 있었지만 소설의 상세한 전투묘사는 꾸며낸 것이라는 얘기다. 제갈량이 남만(南蠻)의 맹획(孟獲)을 일곱 번 붙잡았다 번번이 풀어줘 결국 감화시키는 칠종칠금(七縱七擒) 이야기도 역사책 본문에는 나오지 않는다. 5세기 배송지가 덧붙인 주(註)에서 짧게 언급했을 뿐이다.

이는 중국인 특유의 과장법, 문학적 상상력이 한껏 발휘된 결과다. 당연히 팔구 척 장신 등 영웅호걸들의 신체 특징을 묘사한 대목도 사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진수의 『삼국지』는 정사(正史) 서술 방식인 기전체(紀傳體)로 쓰였다. 제왕 등 인물의 행적을 차례로 묘사했다. 소설 삼국지와 같은 입체적인 이야기의 재미는 느낄 수 없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신준봉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com/jsh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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