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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나는 조교다]논문 뺏기고 성추행 참고 “우린 을(乙)보다 못한 병(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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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심부름부터 논문 상납까지 교수 ‘갑질 횡포’에 고통

갑을 관계 이용 제자 성추행 교수도..“피해 더 많을 것”

문제 일으킨 교수 복직···“학계 좁아 참는 조교 많다”

[이데일리 신하영 기자] 서울에 있는 B대학에서 연구조교로 일하는 김영환(가명·30)씨는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말에도 쉬지 못했다. 지도교수가 학교 근처로 이사를 하는데 이를 못 본 척 할 수 없어서다. 하루 종일 교수의 짐 정리를 돕고 집에 돌아오자 서글픈 생각이 든다. 지난 주말에도 김씨는 지도교수의 자녀를 과외 지도하고 돌아와 밀린 집안일을 하느라 책 한 줄 읽지 못했다.

학문의 전당인 대학 안에서도 ‘갑-을’ 관계가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교수와 조교 관계다. 조교는 대학에서 ‘교육·연구 및 학사에 관한 사무를 보조’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실제로 조교가 하는 일은 연구 기자재 관리, 교육업무 보조, 탕비실 설거지, 교수 휴게실 청소, 학생 답안지 채점까지 안 하는 일이 없을 정도로 많다.

◇ “교수는 스승이기 이전에 인사권자”

대학원생 중 조교를 선발하는 권한은 대부분 교수가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상당수 조교들이 교수의 개인 비서 역할을 감내한다. 김씨는 “지도교수란 스승이기 이전에 내 목줄을 쥔 인사권자”이라고 말했다.

서울 사립대의 연구조교인 황모(여·25)씨는 “연구조교는 교수의 연구를 지원하는 게 주 업무지만 교수를 대신해 심부름을 다녀오거나 교수 개인 약속 때문에 식당을 알아보는 일도 허다하다”고 말했다.

비서 역할을 하더라도 무사히 학업만 마치면 다행이다. 지도교수를 수행하면서 틈틈이 논문을 완성했는데 이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일도 드물지 않다. 수도권 C대학원생 최정한(가명·28)씨는 “없는 시간을 쪼개 쓴 논문을 지도교수가 가져가 졸업에 필요한 논문 실적을 쌓지 못했다”며 “지금까지 들인 학비를 생각하면 졸업을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이 처량하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부당한 처우를 받아도 어디에 하소연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조교로 채용되면 일정 정도의 학비 감면이나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어 인사권을 거머쥔 교수의 말을 거스르기 어렵다. 교수가 외부에서 수주한 연구과제에 참여하면 장학금 혜택은 더 커진다. 대학 조교들을 대상으로 한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 설문조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경험이 있는 응답자 10명 중 7명이 ‘그냥 참았다’고 답한 이유다.

◇ 대학원생 졸업·취업도 교수 손에 달려

조교들이 교수의 부당한 요구나 지시에 항명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거의 대부분 조교가 대학원에서 학업을 병행하는 학생이어서다. 청년위 설문조사 결과 대학원생 중 65%는 조교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원생들은 자신의 생사여탈권이 교수에게 있다고 입을 모은다. 논문 통과 권한이 교수에게 있고, 외부에서 요청이 들어오는 ‘취업 추천’도 교수의 손에 좌우된다.

경기지역 D대학에서 조교생활을 하며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이건호(가명·32)씨는 “학위 논문 심사비 명목으로 심사위원을 맡은 교수들에게 1인당 50만~100만원을 드리는 게 관례”라며 “논문 심사 중에는 고급 일식당 급의 식사를 여러 차례 제공하도록 강요받는데 이를 거부하면 논문심사에서 탈락하는 등 불이익이 크다”고 귀띔했다.

심지어는 지도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해도 이를 문제 삼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지난해 11월 고려대에서 발생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고려대 공대 대학원생 A씨는 지도교수인 B씨의 성추행을 참다못해 경찰에 고소했다. A씨는 무려 3개월간 B씨에게 성추행을 당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수도권 E대학원에서 박사과정에 있는 강모(30) 조교는 “지도교수가 논문을 통과시켜주지 않으면 졸업을 못하기 때문에 부당한 처우도 참는 것”이라며 “워낙 이 바닥(학계)이 좁기 때문에 지도교수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몇 년 유학을 다녀와도 사회생활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반면 교수들의 경우 성추문을 일으켜도 다시 대학 강단에 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강씨는 “교수들의 경우 성추행 문제가 불거져도 다시 학계로 쉽게 복직하기 때문에 조교들 사이에서는 괜히 문제를 제기했다가 나만 손해 본다는 인식이 팽배하다”고 말했다.

◇ “교수-조교 관계 재정립… 대학 문화 바꿔야”

물론 참 스승으로서 학생들의 존경을 받는 교수가 더 많다. 많은 교수들이 제자의 학업과 취업을 돕기 때문이다.

서울 사립대 공대 대학원 석사과정에 있는 윤모(25)조교는 “제 지도교수는 제자가 논문 쓸 시간을 뺏길까봐 실험 데이터를 수작업으로 입력하는 단순 노동의 경우 꼭 아르바이트를 쓴다”며 “제자의 연구·취업에도 도움 주기 위해 전문가와 만날 수 있는 시간도 마련해 주는 등 배려를 아끼지 않아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일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교수가 대학에 임용되기 전부터 제자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과정을 거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교수는 ‘학자’이기 이전에 ‘스승’이기 때문이다. 양정호 성균관대 교수는 “대학원생이나 신임 교수부터 변화를 유도해 대학의 문화를 밑에서부터 바꿔갈 필요가 있다”며 “석·박사 과정에서부터 제자를 배려하는 방법을 ‘교수법’ 등을 통해 배우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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