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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탄금정 굽이 도는 남한강엔 님 찾는 물새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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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이 만난 中原, 충주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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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 앞 잔잔한 남한강에 비친 나무가지로 물새 한마리가 다가서고 있다. 우륵과 신립의 설움과 회한을 녹이고도 남을 만큼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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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탑으로는 유일한 7층 석탑,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용출온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미륵불, 우리 역사상 최초로 기록에 남은 길, 국내 최초의 충혼탑…. 굳이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게 소소한 ‘유일’과 ‘최초’가 많은 곳이 충주다. 중부내륙고속도로로 경상도 지역으로 내려가려면 꼭 거쳐야 하는 곳, 그러나 스쳐가기 때문에 눈여겨보지 않은 곳이 충주이기도 하다.

삼국시대에는 백제-고구려-신라 순으로 주인이 바뀌면서 말 그대로‘중원’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이 치열했던 곳이다. 중앙탑면 장천리 장미산성을 둘러보고 충남 학자들은 ‘백제성이구만’하고, 경상도 학자들은 ‘신라성이네’라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단다. 성의 아랫부분은 백제 형식이지만 전쟁과 보수를 거듭하며 고구려와 신라, 고려의 양식까지 골고루 섞여있기 때문이다. 파란만장한 역사만큼 충주에는 볼거리가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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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시 칠금동과 중앙탑면을 잇는 탄금대교 야경. 우륵의 가야금 선율을 형상화한 곡선 모양의 야간조명 장식이 아름답다./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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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 최초의 도로 계립령 하늘재와 미륵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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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보면 미륵리 석조여래입상과 5층 석탑이 일직선으로 서 있다. 월악산 자락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아늑하다. 미륵대원은 사찰과 관리들의 숙소인 원(院)을 겸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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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보면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은 경주 석굴암과 같이 석실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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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를 찾은 날은 겨울비가 흩뿌린 후였다. 문경으로 이어지는 3번 국도에서 수안보로 빠져 나와 제천 한수면으로 이어지는 579번 지방도를 따라 조금 올라가자 사정이 달라졌다. 지릅재 고갯길엔 얇게 눈이 쌓였다. 고개를 넘어 처음 만나는 마을이 미륵리다. 마을 입구의 넓은 주차장을 지나 조금 더 들어가면 미륵세계사라는 사찰이 나오고, 사찰 바로 옆에 미륵불이 자리잡고 있다.

작은 불상 하나 있겠거니 하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높이 10.6m의 거대한 불상이다. 5개의 화강암을 연결해 만든 불상의 몸체는 원통형으로 자연석에 가깝다. 석등을 사이에 두고 5층 석탑과 일직선으로 선 모습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뒷산 풍경과 어우러져 아늑하다. 미륵불을 3면으로 감싸고 있는 석축도 예사롭지 않다. 경주의 석굴암처럼 석실을 만들고, 나무로 지붕을 얹은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거대한 바윗돌을 자연석에 가깝게 쌓은 모습이 투박하면서도 섬세하다. 고려초기 양식으로 북측을 향하고 있는 미륵불로는 유일하다.

미륵불 바로 앞에 설치한 촛대 상자와 시주함은 보물 제96호라는 가치를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다. 바로 옆 가건물 형태의 사찰도 거슬린다. 사유지라 충주시에서도 어쩌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미륵불의 정식명칭은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인데, 지도에는 ‘미륵대원지’로 표기하고 있다. 불상 아래쪽 폐사지가 바로 경북 문경에서 충주로 넘어 온 관리와 말이 쉬어가던 원(院)터였기 때문이다. 발굴된 유물로 보건대 이곳은 사찰인 대원사와 관리들의 숙소인 미륵대원이 함께 있던 공간이었다.

그 관리들이 넘어온 길, 계립령(鷄立嶺)이 지금도 남아있다. 이곳에서 하늘재에 이르는 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가 기호지방에 진출하기 위해 아달라왕 3년(156년)에 개척한 길이다.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을 잇는 죽령보다 2년 빠르고, 문경에서 괴산을 연결하는 조령(문경새재)보다는 1300년이나 앞선다. 당시로서는 야심 차게 추진한 대로(大路)였지만 조령에 자리를 내준 이후 지금은 오붓한 산책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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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립령 하늘재 전망대에서 본 포암산 정상부근 설경이 한폭의 동양화다. 계립령은 신라가 중원 진출을 위해 경북 문경과 충북 충주를 연결한 길로 문헌상 가장 오래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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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립령 하늘재 전망대에서 본 포암산 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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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립령 하늘재로 오르는 길목의 김연아 닮은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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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미륵대원 왼편 포암산과 탄항산 사이 낮은 계곡을 거슬러 오른다. 경사가 완만해 무리가 없다. 여름이면 으름덩굴이 입구를 뒤덮는다는데 잎이 떨어진 지금은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하지만 소나무와 낮은 관목이 뒤덮인 숲은 시작부터 원시림이다. 간간이 낙엽송 인공조림까지 잘 어우러져 한 겨울에도 아늑하다. 정상을 코앞에 두고 한 굽이 돌아가는 지점에 ‘연아 닮은 소나무’가 미소를 짓게 한다. 휘어 갈라진 3개의 가지가 김연아가 한 쪽 스케이트를 머리위로 올리고 마지막 회전을 하는 모양이다.

하늘재(해발 530m) 정상에서 우측 전망대 계단에 오르자 기대하지 않았던 설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포암산(해발 963m)의 7부 능선부터 하얗게 눈이 덮였다. 거대한 바위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하얀 소나무가 한 폭의 동양화다. 정상의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늘재에서 문경으로 내려가는 길은 아스팔트 포장을 해버려 계립령은 반쪽만 남은 셈이다.

이 길의 매력은 힘들이지 않고도 깊은 산의 정취를 흠씬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2km 산책로는 1시간30분, 왕복 3시간으로 안내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덜 걸린다. 산행보다는 산책으로 부르는 게 어울릴 만큼 순탄하다. 아직 바닥은 눈길이다. 봄이 오기 전까지 아이젠 정도는 준비하는 게 좋겠다.

탄금대, 가야에서 근대까지 설움과 회환은 강물 되어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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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 사연 노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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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정 굽이 돌아 흘러가는 한강수야 신립장군 배수진이 여기인가요…가야금이 울었다고 탄금인가요, 우륵이 풍류 읊던 대문산 가는 허리…”가수 주현미가 부른 ‘탄금대 사연’의 일부다. 충주 출신 작사가 이병환의 노랫말에 탄금대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탄금대는 충주 공용버스터미널에서 약1.8km, 차로 5분 이내,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해발 108m 남짓한 야트막한 산언덕 앞으로는 남한강이, 왼편으로는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주차장에서부터 오붓한 산책로가 이어진다. 직선 길의 끝에서 엉뚱하게 ‘충혼탑’과 만난다. 유려한 필체아래 이승만 대통령의 이름이 작게 새겨져 있다. 광복 이후 전사한 충주지역 군경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55년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충혼탑이다. 충주와 청주, 충청도의 두 머리글자의 중심추가 이때만해도 충주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바로 옆에는 ‘팔천고혼위령탑’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북진을 막기 위해 신립 장군과 함께 배수진을 치고 저항하다 끝내 목숨을 읽은 8천 병사를 위로하는 탑이다. 위령탑 아래 미니어처처럼 작은 그의 동상이 패장의 쓸쓸함을 보는 듯하다. 부근에 또 시비 하나가 눈에 띈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마나 하얀 감자”충주 출신 권태응 시인의 향토색 짙은 동시이자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에 항의하는 작품이다.

길은 강에 좀 더 가까워진다. 언덕 꼭대기, 남한강이 수직으로 내려다보이는 깎아지른 절벽이 ‘열두대’다. 신립 장군이 활을 식히기 위해 열두번이나 오르내렸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탄금대의 주인공 우륵이 가야금을 탔다는 곳엔 작은 표지석만 남았다. 신라에 흡수된 가야의 귀족으로서 이주정책에 의해 충주에 자리잡은 그의 맘이 마냥 편하기만 했을까? 강물은 충주댐 보조댐에 갇혀 유난히 잔잔하다. 수면위로 비친 나뭇가지 사이로 겨울 철새가 유유히 헤엄친다. 우륵과 신립의 설움과 회환을 모두 녹이고도 남을 만큼 평화로운 풍경이다.

신라와 고구려 역사가 만나는 곳, 중앙탑과 고구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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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탑면의 탑평리 7층 석탑은 남아있는 신라 석탑 중 가장 높다. 신라 원성왕때 세운 탑으로 충주시는 국토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중앙탑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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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의 고구려비가 전신된 중앙탑면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광개토대왕비와 안악3호분 등 고구려 역사 자료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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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에서 약 6km 떨어진 남한강가에 충주 중앙탑이 자리잡고 있다. 정식 명칭은 ‘탑평리 7층 석탑’이다. 남아 있는 신라석탑으로는 가장 높은 탑으로 국보 제6호로 지정돼 있다. 충주시는 지난해 이곳 지명을 가금면에서 중앙탑면으로 변경하고, 국토의 중앙부에 위치한 중앙탑을 상징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주변을 국제조정경기장을 갖춘 수변공원으로 꾸며 가족끼리 연인끼리 한가롭게 강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3km 떨어진 중앙탑면 입석마을에는 국내 유일의 충주 고구려비가 있다. 마을이름이 선돌(立石)이지만 정작 돌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1979년이다. 숙종이 이 마을을 지나면서도 실체를 몰랐고, 마을주민들은 새마을운동 초기 고구려비 옆에 ‘칠전팔기의 마을’이라는 새마을 기념비를 세웠을 정도다. 해독할 수 있는 문자로 보건대 5세기 후반 고구려 장수왕 또는 문자명왕 때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의 영향력이 이곳까지 미쳤음을 증명하는 귀중한 사료다. 고구려비를 보관하고 있는 전시관에는 중국 지안(集安)의 광개토대왕비, 북한 황해남도의 안악3호분 등 고구려와 관련한 자료를 함께 전시하고 있어 흥미를 더한다.

충주 여행의 마무리는 3색 온천으로

겨울여행의 피로를 풀기에는 온천이 제격이다. 충주에는 각기 다른 3가지 온천이 있어 취향에 따라 고를 수 있다.

수안보는 우리나라 대표 온천 휴양지다. 조선왕조실록에 태조 이성계가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찾았다고 기록하고 있어 왕의 온천으로도 부른다. 온천의 법적 기준 온도는 25℃, 데워 쓰는 온천이 많다는 얘기다. 수안보 온천수는 53℃로 화상을 입을 정도이니 오히려 식혀서 사용한다. 약 알칼리성 무색무취 온천수는 피부질환에 특히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식점에서 ‘원조’를 내세우듯 온천도 ‘원탕’을 강조하는 곳이 많지만 수안보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모든 온천수는 충주시에서 관리하고 공급한다. 어느 업체나 똑같은 온천수를 사용하고 있다. 호텔과 콘도 모텔 등 다양한 숙박시설이 있어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도 수안보의 장점이다. 머리는 차게 몸은 따뜻하게, 겨울에 특히 인기 있는 노천온천탕은 수안보파크호텔과 한화리조트 2곳에서 운영하고 있다.

수안보에서 약 9km 떨어진 살미면 문강리에는 ‘썩은 달걀 냄새가 나는’(실제 온천에서 쓰는 표현이다)유황온천이 있다. 주 성분인 유황이 피부 각질을 부드럽게 하는 효과가 있다. 온천탕은 문강유황온천호텔과 문강원탕사우나 등 2곳이 운영 중이다. 수안보온천과 문강유황온천 모두 서울에서는 약 150km,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IC에서 10km 이내 거리여서 접근성이 뛰어나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 중부내륙고속도로 감곡IC에서 약 15km 떨어진 앙성면에는 우리나라에 흔하지 않은 탄산온천이 있다. 탄산온천은 공기와 접하면서 흙색으로 변한다. 부유물처럼 작은 기포가 모세혈관을 확장해 특히 혈압을 낮추는데 효과가 있다. 26~30℃로 다소 차가운 느낌이지만 2분 정도 후면 피부자극과 함께 몸이 따뜻해진다. 열탕과 번갈아 이용하면 효과가 더욱 좋다고 한다. 앙성면 능암리 능암온천랜드와 앙성탄산온천이 대표적인 온천탕이다.

충주=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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