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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기구한 '대역 인생'… 더미가 인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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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안전 위해 수백번 충돌과 재생

한국일보

26일 경기 화성시 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 인체모형 교정실에서 센서 정비를 받기 위해 흩어져 있던 더미 가족을 한 곳에 모았다. 고령자 임산부 신생아 어린이 성인 남성 여성 등 상처투성이 대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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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된 더미, Hybrid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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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된 더미가 편지글로 '인생' 풀어놓다.

20년 전 난생 처음 겪은 교통사고의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나를 태운 승용차가 엄청난 속도로 벽을 향해 돌진하더니 그대로 쾅! 정신을 차려보니 갈비뼈가 몇 개 구부러지고 양쪽 무릎이 망가졌지 뭐야.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은 날 돕기는커녕 내 몸에 연결된 모니터를 보며 중력 가속도가 몇이니 가슴 압축량이 얼마니 하며 수치를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더라고.

그래, 난 더미(Dummy)야. 모델명은 하이브리드(Hybrid)Ⅱ, 인간 대신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사는 시험용 마네킹이지. 자동차의 안전성을 측정하려면 충돌로 인한 탑승자의 상해 정도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데 인간을 차에 태울 수는 없잖아. 1930년대에는 시체를 쓴 적도 있고 1990년대까지 돼지를 쓰기도 했다지만, 결국 인간과 가장 흡사한 우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거야.

아무튼 그 날 이후 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꼬박꼬박 충돌 시험에 나섰어. 서러워할 사이도 없이 부서진 부품만 교체하고는 또 다시 반복되는 충돌과 재생의 나날들. 충돌시험 외에도 사전 테스트를 위해 이리 쿵 저리 쿵 두들겨 맞는 건 내 일상이 됐지.

원래 내 고향은 미국이야. 정확하게는 휴머네틱스(Humanetics)社. 국내에서 활동하는 더미들 대부분이 이 회사 출신이지. 키 178cm에 몸무게는 78kg. 미국 성인 남자 100명을 체격 순으로 나란히 세웠을 때 50번째에 해당하는 평균 체격이래. 이 곳 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에 처음 올 때만 해도 나 같은 더미는 다섯 명뿐이었는데 지금은 완전 대가족이 됐어. 나와 동기들이 독신인데 비해 나중에 들어온 하이브리드Ⅲ 부터는 아빠 엄마 아이까지 가족 단위로 움직여. 목이나 팔다리 관절도 내 것 보다 훨씬 정교하지. 대기 중일 땐 단란한 모습이 마냥 부러우면서도 충돌 시험을 마치고 돌아 온 어린아이를 보면 그렇게 안쓰러울 수 없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싶기도 하지만 어린아이라고 사고 당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요샌 임산부 더미도 있고 신생아 충돌 시험도 하더라고. 미국에선 123kg짜리 고도비만 더미도 개발 중이래. 인간에 점점 더 흡사해져 갈수록 기구하기 짝이 없는 게 바로 망가져야 사는 우리의 운명인가 봐.

더미 생활 20년을 돌아보면 한 때 잘 나갈 때도 있었어. 10년 전만 해도 정면 충돌시험이 가장 중요했는데 내가 바로 정면 충돌시험 전문이었거든. 요즘엔 정면 측면 후면 충돌에 전복사고까지, 시험 종류도 너무 많고 복잡해졌어. 신형 더미들은 이런 복잡한 시험에 맞게 제작되고 센서 역시 시험 종류에 따라 달라. 그래서 그런지 언제부턴가 중요한 충돌 시험에서 나를 빼 놓기 시작했어. 상대적으로 간단한 시험이나 대여, 홍보 영상 촬영, 견학 온 어린이들 맞이용으로 불려가는 횟수는 많아졌어. ‘벌써 구닥다리 취급 받나’ 싶어 속이 상하기도 하지만, 이제 슬슬 은퇴를 받아들여야 할 때인 것 같아. 떠나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다운 법이잖아. 인간 흉내 너무 낸다고 흉보지는 말아 줘. 어차피 인간을 닮기 위해 태어난 나야. 그리고 잊지 마. 내가 수도 없이 벽을 향해 내달렸던 20년 동안 국산 자동차도 꽤 좋아졌다는 사실.

2015년 1월 28일

은퇴를 앞둔 짝퉁이 인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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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실에서 센서 정비를 기다리는 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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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미 몸체 속의 데이터를 전송 받기 위한 플러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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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짜리 마네킹(?)

수천만 원부터 1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 더미의 평균 가격은 1억 원 정도. 그러나 몸체 내부에 장착되는 센서나 계측 장비의 구성에 따라 가격 또한 천차만별이다. 실제 인간의 사고와 거의 흡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몸체 내부에 센서와 계측장비까지 장착할 경우 가격은 10억 원까지 올라간다. 더미 수입업체 ㈜자트 관계자는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인간 대신 투입하는 첨단 시험장비가 바로 더미”라며 “단순히 ‘몇 억짜리 마네킹’하는 식으로 가격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러워 했다. 실제로 과거 더미의 가격에 관한 기사에 “10억 원을 주면 내가 대신 운전석에 앉겠다”는 식의 댓글이 달릴 만큼 더미 가격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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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서 정비를 받는 임산부 더미, 배 위에 양수가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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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아 부터 10세까지 어린이 더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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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미의 종류

남, 여 또는 성인, 아동, 유아로 구분하기도 하고 충돌 시험의 종류에 따라 구분하기도 한다. 정면 충돌과 측면 충돌, 후면 충돌 시 쓰이는 더미는 각각 다르다. 개발 시기에 따라 하이브리드Ⅰ, Ⅱ, Ⅲ 로도 나눌 수도 있다. 최근에는 뱃속에 양수까지 갖춘 임산부와 가슴골격을 약하게 만든 노인은 물론 12개월, 3세, 6세, 10세 등 아동 더미도 나왔다. 비만 체형이 많은 현실을 감안한 비만 더미는 개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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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의 무게중심을 표시한 타깃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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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미 머리에 왠 표적?

머리의 무게중심 양쪽에 부착된 노랑색과 검은색의 타깃마크는 충돌 순간 머리의 움직임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충돌 순간을 고속으로 촬영한 영상으로 타깃 마크의 동선을 분석하면 머리의 무게중심이 어떻게 움직여서 차량 어느 부분에 부딪히는 지를 파악할 수 있다. 더미의 복장도 정해져 있다. 자동차관리법 상의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의 성능과 기준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충돌시험에 사용할 더미는 면 소재의 꼭 맞는 속옷 상의와 반 바지를 입고 반드시 신발을 신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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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서 정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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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서 정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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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구조

피부는 기포 고무, 머리는 단단한 알루미늄 재질이다. 갈비뼈의 경우 정면충돌용 더미는 금속 갈비뼈를 장착해 충돌 시 변형 정도를 확인할 수 있고 측면충돌용은 갈비뼈에 가슴의 압축량과 가속도를 감지하는 센서를 장착한다. 목은 충돌 시 머리가 앞뒤로 움직이며 구부러지거나 긴장하는 정도를 측정하는데 내부에 예민한 센서가 장착되어 있어 부품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다. 다리는 무릎 위와 아래에 각각 다른 종류의 센서가 장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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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서 정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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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서 정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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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에 싸인 더미

자동차안전연구원보다 자주 차량 충돌시험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국내 완성차 제조사들은 시험 장면은 물론이고 더미를 몇 개나 보유하고 있는지조차 비밀에 부친다. 보유하고 있는 더미의 종류나 개수를 알면 해당 업체의 연구개발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신차 보험료 산출을 위해 충돌 시험을 진행하는 보험개발원 자동차기술개발연구소에서도 충돌시험 장면을 공개하지 않는데 이는 더미 때문이 아니라 출시 전 신차 노출을 막기 위해서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 류효진기자 jsknigh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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