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9 (금)

[이준석의 사우스포] 씨름의 '격투기 외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댓글 2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더팩트

최홍만은 씨름 선수 가운데 종합격투기 무대에서 유일하게 절반의 성공을 이룬 주인공이다. /더팩트 DB


"씨름 선수가 격투기로 전향하다니요.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출발점부터 달라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클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격투기 전향에 대한 제안을 받았지만 단숨에 거절했습니다. 씨름과 격투기는 길 자체가 다릅니다."

전직 씨름 선수의 푸념이다. 씨름은 한때 한국 최고의 스포츠였지만, 위상이 곤두박질쳤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이만기(51), 박광덕(42), 이기수(47) 등은 그저 잊혀진 인물이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1990년 중반에 태어난 이들에게 미르코 크로캅(40·크로아티아)이나 에밀리아넨코 효도르(38·러시아)가 더욱 익숙하다. 생활 스포츠로 격투기를 배우는 사람은 늘어나고 있지만, 씨름을 익히겠다는 사례는 거의 없다.

씨름의 입지가 좁아졌다는 의미다. 민족의 명절 설날이 다가오고 있지만, 설날의 대표적 스포츠 씨름을 기다리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고유의 스포츠 씨름의 위상이 뚝 떨어졌다. 내리막길을 걷던 씨름은 IMF 시절 '스포츠 정리해고'의 대상으로 추락했고, '재미없는 스포츠'라는 낙인이 찍히며 한없이 작아졌다. 화끈하고 열정적인 스포츠로 평가되는 격투기에 완전히 밀렸다.

결국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생계유지를 위해선 제 갈 길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러브콜을 보낸 곳은 일본 격투기 단체 K-1이었다. 선수들에겐 솔깃한 제안이었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세계 격투기 팬들의 가장 뜨거운 사랑을 받은 단체였기 때문이다.

K-1으로선 한국은 놓칠 수 없는 시장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도 미르코 크로캅(40·크로아티아)이나 앤디 훅 등 K-1 스타들을 향한 관심이 뜨거웠다. 일본은 거액의 몸값으로 한국의 씨름 스타들을 유혹했다. 실제로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34)을 비롯해 김영현(38), 이태현(38), 김경석(32), 김동욱(37), 신현표(36) 등 많은 이들이 샅바 대신 격투기 글러브를 꼈다.

결과적으로 절반의 성공을 거둔 주인공은 최홍만이 유일하다. 최홍만은 밥 샙(40·미국)과 지난 2005년 9월 23일 K-1 월드그랑프리 16강전에서 강력한 니킥을 주무기로 우세한 경기를 펼친 끝에 승리를 거뒀고, 바다 하리(30·모로코)와 세미 슐트(41·네덜란드), 레미 본야스키(38·수리남) 등 당대 최고의 타격가들과 당당히 맞섰다. 특유의 쇼맨십과 주눅 들지 않는 자세로 한국 격투기의 위상을 드높였다. 하지만 전성기가 길지 못했다. 지난 2008년 뇌종양 수술을 받은 뒤 눈에 띄는 하락세를 보였고, 현재 은퇴 순서를 밟고 있다.

부산에서 MMA 체육관 조슈아짐을 운영하고 있는 이동기 MBC스포츠 플러스 해설위원은 26일 <더팩트>와 전화 통화에서 "최홍만은 하드웨어 자체가 압도적이다. 단순히 몸집이 큰 것이 아니라 근육량도 굉장히 많았다. 씨름뿐 아니라 격투기에서도 위력을 발휘한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

더팩트

김영현과 이태현, 김경석(왼쪽부터)은 큰 기대치를 안은 채 격투기 무대에 올랐지만, 쓸쓸히 짐을 싸야 했다. / 더팩트 DB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씨름판을 누볐던 여러 선수들이 종합격투가로 변신했지만 최홍만 외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이들은 사실상 없다. 김영현과 이태현, 김경석, 김동욱, 신현표 등은 격투기의 높은 벽을 실감한 채 쓸쓸하게 짐을 쌌다. 강력한 힘과 클린치(상대를 끌어안는 기술) 능력을 갖췄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실패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타격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부터 상대를 가격하는 것보다 끌어안고 무너뜨리는 것에 익숙했다. 맞는 것 역시 생소하다. 특히 얼굴을 가격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씨름계를 휘어잡은 김영현이 자신보다 훨씬 작은 루슬란 카라에프(31·러시아)와 니콜라스 페타스(41·그리스) 등에게 연달아 TKO 패한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실패 요인은 바로 로킥에 대한 방어가 약했기 때문이다. 격투기의 기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로킥이다. 어떻게 차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맞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로킥은 대미지가 쌓일수록 위험하기 때문이다. 씨름 선수들은 대부분 지방이 많고 상대적으로 근육량이 떨어진다. 몸은 크지만 하체가 부실한 경우가 많아 내구력이 약하다. 로킥 방어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천하장사 출신 이태현은 지난 2007년 10월 29일 K-1 히어로즈 슈퍼파이트에서 야마모토 요시히사(45·일본)에게 1라운드 1분 3초 만에 TKO로 이겼다. 하지만 금세 밑천이 드러났다. 지난 2008년 6월 15일 종합격투기 단체 '드림4가'가 개최한 대회에서 알리스타 오브레임(34·네덜란드)의 벽을 넘지 못했다. 오브레임의 타격에 속수무책이었으며 킥의 위력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오브레임전을 앞두고 많이 연습했다고 했지만, 기본적인 기량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김경석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이티 모(44·미국)와 호리 히라쿠(32), 타카하기 츠토무(33·이상 일본) 등에게 연달아 무릎을 꿇었다. 호리와 타카하기전에선 선전했지만, 마이티 모에겐 왼손 훅 한 방을 맞고 쓰러졌다. 맞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고 로킥 방어에 취약했다. 상대의 속임 동작엔 쉽게 넘어갔다. 씨름계에선 이름을 날렸지만, 격투기에선 한없이 작아졌다.

이동기 위원은 "그들을 향한 기대치가 너무 컸다. 이른 시간에 수준 높은 선수들과 대결을 붙였다"고 아쉬워했다. 일본의 DEEP이나 판크라스에서 경험을 쌓지 못했기 때문에 격투가로서 성공하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그는 "분명히 잠재력을 갖춘 이들이었지만, 너무 빨리 상품화됐다"고 설명했다.

백두장사 우승 세 번, 천하장사 준우승 다섯 번을 차지한 박광덕(42)은 "씨름 선수들이 격투기 무대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유는 맞을 때 눈을 감기 때문이다. 엄청난 차이"라며 "타격에 익숙한 이들은 절대 눈을 감지 못한다. 눈을 떠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씨름 선수들은 그런 면이 부족해 살아남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어쩌면 씨름선수들의 종합격투기 도전은 '예견된 실패'였는지 모른다. 비슷한 종목도 룰과 쓰는 근육이 다르기 마련인데, 그저 덩치만 믿고 너무 쉽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씨름 선수로 누리던 영광을 단숨에 재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씨름과 격투기가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인식했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종합격투기를 해온 이들과 단순히 겨루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씨름의 격투기 외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더팩트ㅣ이준석 기자

더팩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