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국가가 외면하는 참사 후유증…교회라도 치유 도와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한겨레] [짬] 천주교 수원교구 생명위원장 홍명호 신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8개월 남짓 지난 20일, 경기 안산시 단원구 와동로에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안산생명센터’가 문을 열었다. 최근 대형 사건들에 묻혀 세월호 유가족들의 고통은 점차 잊혀지고 진상 규명은 결국 해를 넘기게 됐지만 살아남은 이들을 위한 작은 연대의 촛불 하나가 세상을 밝히기 시작한 것이다.

안산생명센터의 설립을 이끈 천주교 수원교구 생명위원회 위원장 홍명호(52·사진) 신부는 “세월호 유가족과 주민들의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증후군)가 심하다. 이 분들이 심리치료와 정서적 안정, 연대를 통해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최근 단원구에 안산생명센터 개원
“세월호 가족과 작은 연대의 촛볼”
사고 직후부터 수도원 수녀들 봉사

단원고 희생학생들 가톨릭 많아
수원 205개 성당 80만 신도 성금
가톨릭상담소 등 트라우마 치료


센터의 건립은 세월호 참사 직후인 5월부터 꾸준히 추진되어 왔다. 천주교에서는 그동안 성가소비녀회 수도원 소속 수녀들이 안산 단원구에 상주하면서 꾸준한 가정 방문을 통해 고통받는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과 지역 주민들을 만나왔다.

홍 신부는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들의 상처가 아물고 나아져야 했는데 상황은 그 반대였다. 자살 충동에 휩싸이고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는 사례들이 많이 있을 정도로 상태가 아주 심각했다”고 전했다. 기막힌 참사를 당했는데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잊혀져가니 부모들의 죄책감과 소외감으로 인한 공황장애 증상도 적지 않았다. 센터의 개소를 서두른 까닭이다.

이번 세월호 참사 희생자 중에는 유독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다. 단원고 2학년생 사망자 250명(실종자 4명 포함) 가운데 10%가 넘는다. 안산 와동성당 16명, 선부동성당 4명, 원곡동성당 2명, 고잔동성당 7명 등 모두 29명이나 숨졌는데 그 중에는 사제를 꿈꾸던 박성호군도 있었다.

센터 건립에는 천주교 수원교구 산하 205개 성당 80여만명의 신자들이 힘을 보탰다. 4억5천만원의 성금이 모여 이 가운데 1억원은 피해자 가족을 위해 지원됐고 나머지는 안산생명센터 설립에 쓰였다.

지난 20일 열린 개소식에는 수원교구 교구장인 이용훈 주교와 교구 총대리 이성효 주교도 참석했다. 2명의 주교가 동시에 한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그만큼 센터에 대한 교구의 관심은 각별했다. “생명을 살리는 교회의 소명을 다해야 한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홍 신부는 전했다.

하지만 아쉬움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 할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지만 참사 이후에도 국가는 제 기능을 못했다”고 홍 신부는 말했다. 정부는 사고 직후 국립트라우마센터를 건립할 것처럼 말했지만 예산과 장소 문제로 지금껏 표류 중이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천안함 사건, 세월호 참사까지 90년대 중반 이후 국가적인 대형 참사가 잇따랐고 피해자 가족 등이 후유장애에 시달리고 있지만 국립트라우마센터 하나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국가의 배려 부족’ 때문이라는 게 홍 신부의 생각이다.

“얼마나 국가가 안 움직였으면 슬픔에 젖은 가족들이 자신들의 상처와 아픔은 뒤로한 채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이유를 밝혀달라’며 거리로 나섰겠어요. 일부 몰지각한 어른들의 무책임 때문에 숱한 아이들이 생명을 잃었다면 국가는 책임감을 갖고 마땅히 뒷바라지를 해야죠”

안산생명센터는 교구 산하 가톨릭상담소 등 3개 기관과 힘을 합쳐 트라우마 전문 치료에 나선다. 사회복지사 등 전문가 3명을 비롯 의사와 변호사 등 다양한 자원봉사자들과 연계해 매주 수요일부터 일요일, 오전 10시~오후 7시 치유와 일상회복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특히 지속가능한 치료에 최우선을 둘 예정이라고 한다.

홍 신부는 “유족들과 생존 학생, 지역 주민 등 누구나 찾아오시면 언제든지 뭐든지 함께 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치유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세월호 피해자들을 만나 함께 슬픔을 나눴던 신부들도 트라우마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후유증이 크기 때문이다. “길게는 1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해요. 하지만 피해자들에게 도움과 연대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한, 끝까지 잊지 않고 지속적으로 함께 할 겁니다.”

그는 우리 사회에 이런 사고가 다시 되풀이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게 더 걱정인 듯 했다. “세월호처럼 하나의 대형 참사가 나기 전에는 29건의 크고 작은 사건이 터지고 300건의 보이지 않는 징후가 있다는데, 국가 시스템의 부재와 이웃에 대한 무관심,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개인주의적이고 물질중심적 사고가 이런 징후를 못 보게 가로막죠.”

홍 신부는 “나만이 아니라 ‘우리 함께’라는 연대감과 공동선을 회복하는 일이 그래서 더 절실하다”고 말했다.

수원/글·사진 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공식 SNS [통하니] [트위터] [미투데이] | 구독신청 [한겨레신문] [한겨레21]

한겨레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