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토요판 커버스토리]20대 아들딸 불타는 클럽의 밤… 50대 아버지 나홀로 거룩한 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2014 성탄절 新풍속도-가족

[동아일보]
동아일보

본보 최혜령 기자(위쪽 사진)가 픽업 아티스트 ‘나비’의 메이크업 지도를 받고 있다. 한껏 꾸민 젊은 남녀들이 파티에서 즐기는 모습은 크리스마스 시즌의 일상적인 풍경이 된 지 오래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동아일보DB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원래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날이 아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의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제국에서 이날은 ‘무적 태양신(Sol Invictus)’ 축제날이었다. 해가 가장 짧은 동지를 지나 태양의 힘이 다시 왕성해지는 무렵이었다. 기독교가 로마 최고의 종교로 자리한 서기 350년. 로마 교황 율리오 1세는 이날을 예수 탄생일로 선포했다. 크리스마스의 탄생이다.

크리스마스는 한국에 건너와 새로이 거듭났다. 기독교만의 축제에서 종교와 세대를 초월한 잔칫날이 된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연인들이 특별한 추억을 만드는 날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갈수록 가족의 존재는 크리스마스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크리스마스에 애인 만들기

“최혜령, 크리스마스이브 당직 당첨! 안타깝기 그지없다.”

12월 초 사회부 당직표를 짜던 한 선배가 기자에게 ‘이브 당직’이라는 비보를 알려왔다. 일반 회사처럼 언론사에서도 설날 같은 명절에는 미혼, 크리스마스이브에는 그중에서도 ‘솔로’가 당직을 맡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결국 이브 당직을 피하려면 남친(남자친구)을 급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여 일 사이에 혼자 힘으로 남친을 만들 자신이 없었다. 결국 기자는 ‘픽업 아티스트(이성을 유혹하는 걸 직업으로 삼는 사람)’에게 전문적으로 연애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픽업 아티스트가 남자를 대상으로 활동한다는 것. 궁여지책으로 서점에서 연애 관련 서적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 여자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국내 최초의 여성 픽업 아티스트 ‘나비’(31). 당장 e메일부터 보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12월 8일. 나비는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너무 바쁘지만. 기자님이 조금 딱해서…”라는 답변과 함께 ‘연애 선생’을 수락했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내게 관심을 갖게 만들거나, 내게 접근하는 ‘나쁜 남자’를 걸러내는 게 연애의 기본이죠.” 나비는 이렇게 말하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곧바로 ‘실전 과정’ 도전을 제안했다. 30년 넘게 단 한 번도 남자를 ‘픽업’ 해본 적 없는 기자에게 ‘지인 모임’을 소개했다. 10명 이내의 소규모 남녀가 한 장소에서 만나 짝을 찾는 모임이다.

특별한 목적을 갖고 모임에 나가려면 화장법부터 달라야 했다. 인조 속눈썹을 붙여서라도 속눈썹을 최대한 풍성하게 만들고, 밋밋하고 동그란 얼굴에 포인트를 주기 위해 어두운 색의 파운데이션을 발라 턱을 뾰족하게 보이도록 했다. 밤낮 없는 취재활동으로 생긴 눈 밑 다크서클까지 나비의 손을 빌려 완벽하게 없앴다. 그러고 13일 오후 10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일본식 술집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했다. 혼기가 찬 30대 대기업 사원 3명이 나와 있었다.

나비가 알려준 연애기술의 핵심은 ‘마음에 드는 남성을 3초 이상 강하게 바라보며 미소 짓는’ 것. 여자가 이렇게 ‘신호’를 적극적으로 보내야 남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날 기자는 처음 만난 세 남자에게 열심히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가장 맘에 들었던 한 명은 기자의 전화번호조차 묻지 않고 가버렸다. 첫 실전은 참담한 실패였다.

나비는 실망한 기자의 손을 이끌고 다음 날 오전 2시 술집 옆의 한 클럽으로 향했다. 기자는 나비의 지시에 따라 필사적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 순간 한 남자가 어깨를 붙잡고 나직이 물어왔다. “입구에서부터 따라왔습니다. 전화번호 좀 주실 수 있나요?”

그리 맘에 들지 않는 남자의 외모에 번호 주기가 망설여졌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머지않았다’는 조바심이 망설임을 압도했다. 그날 밤 기자의 신호에 응답한 클럽남은 총 4명. ‘크리스마스 애인 만들기’라는 고지가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가족이 실종된 크리스마스

요즘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모임이나 연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단연 모텔이다. 모텔 예약업체 ‘야놀자’의 구본길 이사는 “1년 중 크리스마스가 명실공히 가장 큰 대목”이라고 말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크리스마스란 종교나 가족보다는 육체적인 사랑과 유흥의 의미가 더 강하다.

취재진이 서울에서 모텔이 가장 많이 있는 지역 중 하나인 서울 서초구 남부터미널 근처 모텔 10곳에 문의한 결과 5곳은 24, 25일 객실과 파티룸 예약이 이미 끝났다. 구 이사는 “단순히 숙박 말고도 큰 방을 빌려 친구들끼리 ‘하우스 파티’를 즐기는 젊은이가 많다”며 “젊은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가 여전히 즐거운 날인 이유는 술집 클럽 모텔처럼 이들 취향에 맞는 놀이공간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크리스마스 열기를 모두가 체감하는 건 아니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크리스마스를 향한 기대감은 크게 낮아지는 추세다. 본보와 시장조사 전문업체 ‘마크로밀엠브레인’이 12∼15일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50대 응답자의 32.9%만이 ‘여전히 크리스마스가 즐겁고 기대된다’고 답했다. 이는 20대(47.6%)에 비해 크게 낮은 수치이고 30대(46.0%), 40대(35.2%)와도 차이가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즐겁지 않은 이유는 다양했다. 갓 직장생활을 시작한 30대 직장 초년병들은 ‘쉴 틈 없는 근무조건’으로 인한 어려움을 호소했다. 회계사 신승우 씨(34)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크리스마스이브에 팀 전체가 새벽 야근을 해야 할 것 같다”며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즐기겠느냐”고 반문했다. 법조인 김모 씨(35) 역시 “솔직히 크리스마스이브에 회사일이 언제 끝날지 가늠이 안 돼 집에서 혼자 지내야 할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40대 이상 중년들은 공통적으로 “크리스마스가 예년보다 외롭다”고 털어놨다. 여기에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가속화되고 있는 ‘가정의 붕괴’가 큰 작용을 했다는 평가다. 손희송 신부(가톨릭 서울대교구 사목국장)는 “화목한 가정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크리스마스가 젊은 사람들이 집을 나가 먹고, 마시고, 유흥을 즐기는 날로 변질됐다”며 “주변 신자들 중에도 자식들에게 ‘이번 크리스마스는 제발 가족끼리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지만 거절당해 속상하다는 사람이 꽤 있다”고 전했다. 자동차용품 도매상 이모 씨(57)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과거 크리스마스는 아내나 아이들과 함께 선물과 카드를 주고받는 설렘이라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이들은 모두 밖으로 나가고 그저 ‘빨간 날’일 뿐”이라고 털어놨다.

노인들의 크리스마스는 더욱 외롭고 처량하다.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만난 백발노인들은 하나같이 올해 크리스마스에 “아무 계획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탑골공원에 매일 산책하러 나온다는 안계천 씨(72)는 “크리스마스나 연말이면 잘 찾아오던 자식들도 이젠 사는 게 더 힘든지 연락조차 잘 안 된다”며 “성스러운 날은커녕 평소보다도 못할 정도로 외로워지는 날이 크리스마스”라고 말했다.

과거 ‘가족’ 위주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향수를 호소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김원희 씨(79·여)는 “자식들이 함께 살 때는 크리스마스에는 무조건 함께 손을 잡고 극장 나들이를 했다”며 “그 생각만 하면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 이젠 크리스마스가 1년 365일 중에 가장 싫다”고 하소연했다.

노인들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기자는 가슴이 먹먹했다. 당직을 피하기 위해 애인 찾기에 나선 기자의 바람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한 어르신이 기자의 손을 잡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봐요 기자 양반. 사랑하는 사람이랑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도 좋지만 가족이랑 이웃이랑 함께 지내던 옛날 크리스마스도 젊은이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면 우리 사회가 조금 더 따뜻해지지 않겠소.”

이철호 irontiger@donga.com·최혜령 기자

[☞오늘의 동아일보][☞동아닷컴 Top기사][☞채널A 종합뉴스]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