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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월드리포트] 21세기에 고대 치료법 매달리는 아빠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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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국의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사진입니다. 나무로 만든 재단처럼 보입니다. 야생화가 피어있는 풀을 잔뜩 올려놨습니다. 그 위에 한 여자 아이가 누워 있습니다. 언뜻 봐서는 고대의 인신 공양 제사 같습니다. 풀에 불을 놨는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릅니다. 매운 연기에 여자 아이는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코를 막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장면일까요?

사진 속 남성은 웨이수푸 씨이고 여자 아이는 그의 딸 웨이진츄 양입니다. 웨이 씨는 딸을 치료하고 있는 중입니다. 중국 언론에는 훈연법을 실시하고 있다고 소개됐습니다. 연기를 쏘여서 피부에 스며들게 하는 것입니다.

훈연법은 식품의 가공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소시지나 햄 등을 만들 때 쓰입니다. 음식에 특유의 풍미를 더해주고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사람을 치료하는 방법으로도 쓰이나요? 웨이 씨는 유명한 중국의 의학서 '본초강목'을 독학한 끝에 해당 치료법을 시도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아는 중의학자에게 물어봤습니다. 중의학에서 화훈 요법으로 부르는 치료법이라고 합니다. 다만 실제 쓰이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본초강목에도 화훈 요법을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습니다. 전설적인 고대 의학서인 '황제내경'에 '아마 나올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지금은 민간요법으로만 존재한답니다. 웨이 씨는 고대에나 쓰이던 요법으로 딸을 치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사연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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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당시 5살이었던 웨이 양이 다니던 유치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피 검사에서 이상 현상이 발견됐습니다. 심한 빈혈 증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역 보건소에서 좀 더 정밀한 검사를 받았습니다. '지중해 빈혈'로 확인됐습니다.

'지중해 빈혈'은 혈액에 이상이 생기는 유전병입니다. 혈액 속에 베타헤모글로빈쇄가 적거나 이상해서 산소를 운반하는 헤모글로빈이 부족해지는 질환입니다. 따라서 빈혈과 동일한 증세를 유발합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식욕 부진을 겪으며 성장이 지체됩니다.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하면 숨질 수도 있습니다. 수혈이나 약물 치료를 받아 증세를 완화시켜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치유하려면 골수 이식을 받아야 합니다. 난치병입니다.

웨이 양은 광저우난팡 병원에서 골수 검사를 받았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이식을 받을 만한 기증자가 있었습니다. 골수이식 수술을 받기 위해 광시의대부속병원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웨이 양은 바로 퇴원해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치료비 30만 위안, 우리 돈 5천 4백만 원을 감당할 방법이 없어서였습니다. 정부가 일부 지원해주지만 나머지 돈은 언감생심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뒤 웨이 씨는 딸을 데리고 지역 보건소에 다녔습니다. 15차례 찾아가자 어렵게 모았던 돈이 모두 떨어졌습니다. 차도도 없었습니다. 더 이상 딸을 치료할 방법이 없자 웨이 씨가 앞서 본 대로 민간 치료법까지 동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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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 사연이 알려지면서 동정론이 비등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역 정부는 물론 사회 각계에서 지원에 나섰습니다.

우선 웨이 씨가 사는 현 정부에서 치료비 상당 부분을 부담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현이 추진하고 있는 신농촌 정책을 검토해 '지중해 빈혈'을 농촌 지역 중대 질병에 포함시킴으로써 치료비 지원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30만 위안의 치료비 가운데 20만 위안을 대주기로 했습니다.

또 상업 의료보험을 통해 7만 위안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습니다. 웨이 씨 가족들은 3만 위안만 부담하면 됐습니다.

이마저도 도와주겠다는 기관과 단체가 속속 나타났습니다. 지역 적십자사가 2만4천 위안을 모금해 전달했습니다. 지역 간부 직공 조합에서 4천 3백 위안을 기부했습니다. 민정 구조금 2천 위안도 전달됐습니다. 웨이 양의 수술비가 너끈히 마련됐습니다.

웨이 양은 다음달 수술을 받게 됐습니다. 아빠의 뜨거운 부성애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수술 후 치료와 약 값이 만만치 않은 점이 남은 문제입니다. 하지만 웨이 씨는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사회가 얼마나 따뜻한지 알았어요. 지금도 치료비를 보태겠다는 연락이 옵니다. 아마 수술 후 치료비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해피엔딩입니다.

그런데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합니다. 웨이 씨는 극히 운이 좋았습니다. 인터넷에 화제가 되면서 관할 당국이 발 벗고 나섰습니다.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주고 어려운 문제를 앞장 서 해결해줬습니다. 곳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가족의 치료비 때문에 곤란을 겪는 사람이 웨이 씨 한 사람 뿐일까요?

아마도 중국 곳곳에 숱한 서민들이 가슴을 앓고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입니다. 웨이 씨가 처음에 당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관할 당국은 있는 제도도 제대로 안내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설사 어떻게 알고 신청해도 각종 조건을 내세우며 속절없이 시간을 보내게 했겠죠. 어렵게 조건을 갖춰도 이런저런 트집을 잡으며 지쳐서 포기하게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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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어 치료 받지 못해 아프고 죽어가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국가의 기본적인 책무입니다.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뤄온 중국은 하지만 그런 부분에 있어 계속 후퇴하고 있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호텔 급 병실에서 각종 첨단 의료 혜택을 누립니다. 반면 가난한 서민들은 웨이 씨처럼 여전히 고대 치료법에 기대야 합니다. 일부라도 선진 의료를 향유하니 발전한 것일까요?

"예전에도 병이 나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죠. 병원이 부족하고 의료 기술이 발전하지 못해서요. 그래도 그 때는 다 같이 평등하게 치료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치료 받을 방법이 있는데도 돈이 없어 못합니다. 더 속이 상하고 원망스럽습니다." 한 중국 노인의 한탄입니다.

그럼 한국은 어떤가요? 의료 보장 체계가 강화되면서 이제는 병이 나도 큰 걱정이 없나요? 우리도 질병의 질고를 개인에게 돌리고 국가나 사회는 자꾸 뒷짐을 지려 하는 듯해 걱정이 많습니다. 앞으로 중병을 얻으면 병원에 가는 대신 산으로, 들로 약초를 찾아 헤매야 하지 않을까 근심하게 됩니다.

[우상욱 기자 woosu@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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