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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전 안부쳐?" 엄마를 뒤로 하고 러시아행 배를 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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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女, 사표쓰고 세계일주] "대학가면 예뻐진다" 믿다가 세월간다 "지금 아니면 못가" ]

머니투데이

강원도 속초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나는 여객선 /사진=박보희


"엄마 나 회사 그만뒀어. 놀러가려고."

1시간 같은 1분의 침묵.

"응?" 주말드라마를 보던 중 날아온 날벼락 같은 통보에 엄마의 두 눈은 동그랗게, 입은 반쯤 벌어졌다. 그리고 1분이 더 흐른 뒤, 차라리 등짝이라도 한 대 맞는 것이 더 속 편하겠다는 불안함이 엄습해 올 때 쯤, 엄마가 말했다. "그럼 추석에 전은 못 부쳐?"

통보 비슷한 선언과 함께 내 첫 번째 유라시아 일주 계획이 세워졌다. 사실 이 모든 계획의 시작은 TV를 보다가 시작됐다.

6월의 어느 주말, 다시 시작될 한 주를 기다리며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다. TV에서는 연예인들이 오지를 찾아다니며 사서 고생을 하는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는데, 문득 "저걸 힘들어서 어떻게 하냐. 돈 벌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0대와 20대,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았던 와중에도 변하지 않았던 내 꿈은 '세계일주'였다. 그것도 비행기를 타고 획 날아가는 여행이 아니라 한발씩 걸어서 세계를 돌아보겠다는 것. 나름 야심찬 계획과 루트도 그려놨었다. 처음 가보는 나라의 땅을 밟고,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만든 음식을 먹고, 그들이 수백, 수천 년간 만들어 가고 있는 세계를 보는 것.

걸어서 지구를 세 바퀴 반이나 돌았다는 어느 언니의 이야기부터 무작정 떠났다는 수많은 인생 선배들의 여행기를 찾아 읽으며 서른쯤이면 나도 한 바퀴 정도는 지구를 돌아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꿈은 취직을 하고, 생활비를 벌고, 어제와 같은 하지만 아주 조금 더 익숙해 편해진 오늘을 살며 어느새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그 순간 알아버렸다. 예전 같으면 부러웠을 그들의 경험이 불필요한 고생으로 받아들여지고, 여름 휴가지를 고민하며 따뜻한 나라의 편안한 리조트를 찾아보고 있을 때, 나는 늙어가고 있었다.

현실에 적응해가는 값으로 나는 내 꿈을 지불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그 숫자에 따른 물리적 노화와 함께 정신적으로도 늙어가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어제와 같은 내일을 살기에는 내게 남은 시간이 너무 길다. 피부 노화와 함께 심지어 탈모 진행까지 시작된다는 여자나이 서른둘이라지만, 하지만 이제 고작 서른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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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행 여객선에 바라본 동해 일출 /사진=박보희


20대 때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느라 하지 못했다. 30대가 되자 이제는 돈을 벌어 결혼을 해서 애를 낳아 키워야 한단다. 첩첩산중이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나면 애는 누가 키우나. 누군가는 나중에 자식 다 키워놓고 은퇴하고 나서 가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때에는 갈수 있을까. 아마 그땐 또 다른 이유가 생기지 않을까. 이건 고3때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이 했던 ‘대학가서 남자친구 생기면 예뻐진다’는 거짓말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아니 그럼 나는 언제 떠날 수 있다는 것인가.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구나."

하던 일 다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중 99%가 한다는 이 말이 이런 뜻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순간. 내 남은 인생에서 가장 젊을 지금이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거창하게 말하고 있지만, 간단하게는 여행을 하기에 한 살이라도 젊어야 덜 힘들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생각났을 때 하자 뭐 이런 마음이랄까.

"다녀와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건데?"

여행을 가겠다며 사표를 내는 순간부터, 이 소식을 들은 지인들의 95%는 '여행 후'를 물었다. 정해진 것은 없다. 다녀와서 다시 밥벌이에 나설 수 있을지, 늙고 병들고 돈도 없고 시집도 못간 백수 노처녀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물론 불안하다. 그렇다고 그냥 이렇게 내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나는 얼마나 내일의 삶을 예측할 수 있는 현실을 살고 있을까. 이미 지난 몇 달간 너무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 죽음 때문에 달라져버린 삶을 목격하지 않았나. 내가 내린 결론은 '죽는 순간, 하지 않아서 후회할 일을 먼저 하자'는 것. 또 거창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냥 다녀와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어릴 적 세계 일주를 꿈꿨을 때부터, 그 시작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열차일 것이라 생각해왔다. '동해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들어간다. 이후 북유럽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그 다음은..' 그때 생각해보기로 했다. 당장 회사를 그만 두고 여행을 가게 될 줄도 몰랐는데 몇 달 뒤 일을 어떻게 미리 계획하겠는가. (또 거창하게 세계 일주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유라시아 일주에 더 가깝고, 더 자세히는 아직 정확한 계획이 없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동해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잠깐 여행 팁

-꽤 많은 사람들이 생각만하다 말았던 세계일주를 현실로 이뤄낸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이 있다. 어떤 사람들이 세계 일주를 감행했는지, 또 그 이후 그들의 삶이 궁금하다면, 또 구체적인 여행 계획을 세우는데 도움을 받고 싶다면 이들이 운영하는 카페나 블로그 등을 찾아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세계 일주를 다녀온 이들이 여행을 준비하는 이들을 모아 정기적인 모임을 여는 '세계일주 스터디 클럽' 같은 곳도 있다.



-장기 여행을 생각한다면, 가장 첫 번째로 정해야 할 것은 ‘어디를 갈 것인가’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세계를 다 돌아보겠다'는 거창한 포부로 시작하지만, 예산이 매우 넉넉하지 않으면 모든 곳을 다 돌기는 힘들다. 평소 가고 싶었던 곳이나, 관심 있는 테마를 중심으로 두고 갈 곳을 정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여러 나라를 거치는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자'다. 다른 준비물들은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도 돈만 있다면 준비할 수 있지만, 비자의 경우 한국에서만 발급이 가능한 국가들이 있다. 예를 들어 파키스탄 같은 경우 국경이나 제3국에서 발급이 불가능하다. 비자가 없으면 입국 자체가 불가능만큼 미리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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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희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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