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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맏며느리 생활 18년, 앓아누워도 김장 100포기는 제 몫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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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우리에게 겨울의 입맛을 일깨워주고, 가족 간 이웃 간 화합의 장이 되어주는 김장.

그러나 그 풍성한 축제의 뒤꼍에서는 허리 디스크와 오십견의 그늘이 서서히 드리워지는지도 모릅니다. 의미도 모르는 채 시집 김장에 불려가며 투덜대는 새댁부터 자식들 나눠줄 백 포기 배추를 혼자 절이다 분통 터지는 시어머니까지…. 그깟 김장 없애버리자는 시아버지부터, 나도 좀 도와주면 되잖느냐는 새신랑까지…. 별별다방의 우편함을 두드리는 김장 이야기들.

김장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 홍 여사 드림

3남 2녀 집안의 맏며느리입니다. 결혼하고부터 지금까지 18년째 시어머님 모시고 살고 있지요. 어른 모시고 사는 며느리의 애로 사항이라면 저도 웬만큼은 느끼며 살아왔지만, 그 세월이 저를 가르치고 키워준 것도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나이 이기는 장사 없다고 전에 없이 힘에 부치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맘때 주부들의 숙제인 김장 역시 저에게는 넘어야 할 큰 산처럼 여겨지네요.

신혼 때 삼사년간은 집에 시누이까지 함께 살았었습니다. 김장철이 되면 어머님 지휘하에 저와 제 바로 밑 동서, 그리고 시누이들이 힘을 합쳐 김장을 했죠. 그 당시만 해도 어머님이 정정하셨고, 저는 그저 어머님이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움직이면 됐었습니다. 나이 어린 시누이들은 큰 도움이 안 됐지만 동서는 참 몸 안 아끼고 일을 잘 거들어줬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십오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은 그때보다 훨씬 안 좋아요. 일단 가장 든든한 원군이던 동서가 자리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이혼으로 이 집안을 떠났거든요. 그 뒤로 서방님이 재혼을 하긴 했는데, 새로 들어온 동서는 김장 따위에는 신경을 안 씁니다. 당연한 권리인 듯 자기 몫의 김장김치를 받아갈 뿐이죠. 구차하게 엎드려 절 받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형님 고맙습니다 소리는 절대 안 합니다. 어머니, 잘 먹을게요 하고 가죠. 저희한테는 엄하셨던 어머님도 새동서한테는 말 한마디 못하세요. 탈 없이 살아주기만 바라시는지….

그 사이에 시누이들은 다 시집을 갔습니다. 그러면 김장도 알아서들 하느냐, 그건 아니죠. 각자의 시어머니 드릴 김치까지 달라고 해서 수십 포기씩 챙겨갑니다. 그러면서 일은 꼭 둘 중 한 사람만 도와주러 옵니다. 정말이지 미리 당번이라도 정한 듯이 돌아가며 와요. 하나가 대표로 참석해서 거드는 시늉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울 엄마 김치가 제일 맛있다면서도 그 솜씨를 직접 배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김치의 대를 잇는 건 며느리인 저이고, 언제까지나 저한테서 김치를 받아갈 생각이죠.

그나마 올해 막내 서방님이 늦장가를 가서 한참 어린 막내 동서가 들어오긴 했습니다. 그나마 이것저것 심부름시킬 내 밑의 '졸병'이 하나 생기나, 내심 기대했는데….

며칠 전에 그 동서가 그러더군요. 김장 김치 저희는 안 주셔도 돼요…. 동서는 원래 김치를 안 먹는다네요. 그리고 맞벌이로 바쁜 탓에 집에서 밥 먹는 일이 거의 없답니다. 친정 엄마가 조금 싸주는 걸로도 족하다고요. 김치 필요 없다고 선언하는 사람, 김장에 부를 수 있나요? 알겠다고 했죠. 그래도 혹시 김치 떨어지면 얼마든지 싸 가라고 했습니다.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우리 때와는 다른 똑 부러진 태도가 참 신기하면서도 부럽더군요. 결혼하고 첫 김장인데도, 이럴까 저럴까 시집 분위기를 살피는 기색 없이 본인 입장만 통보할 수 있는 그 쿨한 배짱이 말입니다.

결국 올해는 저와 큰시누이가 배추 백 포기와 전투를 치르게 생겼습니다. 시누이가 양념 치대는 건 거들겠지만, 배추며 무며 사다 나르고 절이고 씻는 일, 김장 마치고 뒤처리하는 일은 제 몫이죠.

그래도 나 하나의 수고로 식구들이 계절의 진미를 맛본다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김치 넉넉하게 퍼줄 수 있는 맏며느리가 되자고 매년 마음을 다잡는데….

웬걸…. 김장을 며칠 앞두고 베란다를 치우다가 그만 목을 다치고 말았습니다. 고개를 숙이지 못하고 오른쪽으로는 절반도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일단 무거운 걸 들기가 두렵습니다. 침을 맞아도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으니…. 김장 날짜를 좀 늦춰야겠다 싶더군요. 그런데 제 마음속에 꾀가 났는지, 괜스레 투정을 부리고 싶었는지, 남편을 향해서는 속에 없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여보, 올해는 내가 아파서 도저히 김장 못 하겠다. 다들 각자 해결하라고 하고, 우리는 그냥 사 먹을까?

그러자 남편 왈, "아무리 그래도 할 건 해야지."

그 짧은 대답 한마디에 너무 서운하고 화가 났습니다. 마음에 없는 소리까지 해가면서 제가 듣고 싶었던 말은 그런 말이 아니었습니다. 빈말이라도 당신이 아프다는데 김장이 대수냐 올해는 넘어가자고 해줄 줄 알았죠. 이 집안에서 내 존재는 과연 뭔가 싶어지더군요. 적어도 남편만큼은 제 수고를 알아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군말 없이 일 잘하는 우직한 소 같은 존재로 생각하나 봅니다. 진짜 김장이고 뭐고 엎어버릴까 싶게 심사가 뒤틀리네요.

시집 김장에 안 가려고 갖은 수를 다 쓴다는 요즘 새댁들…. 이제야 이해가 되고 심지어 대단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남편이고 시집 식구고, 우직한 소한테는 그저 채찍질만 날리는 법이라는 걸, 그들은 어린 나이에도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요?

생긴 대로 우직하게 이 길을 가야 하는 건지, 나도 한번 꿈틀 뒤늦은 몸부림이라도 쳐봐야 하는 건지….

[홍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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