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기획사 대표, 명함 주며 접근
1주일 만에 성관계, 동거·출산까지
소녀 편지엔 “사랑 … 함께 살고 싶다”
대법, 성폭행 판단한 1·2심 뒤집어
2011년 8월 중학교 3학년이던 A양은 교통사고로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마침 같은 병원에 입원한 아들을 보러 온 B씨(45)와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연예기획사를 운영하는 B씨는 키도 크고 예쁘장한 얼굴의 A양에게 명함을 주며 접근했다. 그는 바로 다음날 A양에게 강제로 키스를 시도했고 일주일쯤 지나 차 안에서 성관계를 가졌다. 두 사람은 그 뒤 몇 차례 성관계를 더 가졌고 A양은 임신했다. 2012년 초에는 가출해 B씨와 동거에 들어갔다. 한 달 뒤 B씨가 다른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자 교도소에 찾아가 사랑한다는 말로 위로했다.
하지만 그해 말 아이를 출산한 뒤 A양은 B씨를 고소했다. 성관계는 B씨가 강제로 한 것이고, 그의 집에 머문 것도 B씨가 가출을 권유해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면서다. A양 가족의 신고로 B씨는 아동청소년성보호법상 강간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B씨는 “두 사람이 사랑해서 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하급심 재판부가 본 사건의 본질은 성폭행이었다. “우연히 만난 부모 또래 남자를 며칠 만에 이성으로 좋아해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1심 재판부는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형량을 3년 깎았지만 유죄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넉 달 만에 상황이 돌변했다. 대법원이 최근 무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사건을 맡은 대법원 3부(주심 김신 대법관)는 A양이 B씨에게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와 B씨 수감 후 교도소에 찾아가 만난 접견기록, 편지에 주목했다. 특히 교도소에 보낸 편지에는 “사랑한다” “함께 살고 싶다”는 등의 애정표현이 가득차 있었다. 형광펜으로 편지지를 꾸미고 하트 표시를 그려넣기도 했다. 또 수백 차례 오간 카톡 메시지에도 “처음 보자마자 반했다”는 A양의 고백이 남아 있었다.
물론 A양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B씨가 화를 내고 욕설을 해 무서웠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메시지와 편지를 종합하면 A양은 처음 볼 때부터 B씨에게 사랑을 느꼈고 이 같은 감정이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하급심에서 다뤄진 15세 소녀의 판단 능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대법원 관계자는 “검찰이 B씨 혐의를 성매수나 협박에 의한 강간 등으로 바꿀 수는 있다”며 “그 경우에도 돈이나 대가가 오갔는지 협박이 있었는지는 검찰이 입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당장 검찰과 여성계가 반발하고 나섰다. 신진희(44) 성폭력범죄 피해자 국선전담 변호사는 “15세 여자 아이에게 연예인을 시켜주겠다는 사람은 엄청난 권력으로 보였을 것”이라며 “미성년자들이 쉽게 빠지는 전형적인 성폭력 패턴인데 이런 점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법률상 성적 자기결정권의 인정 연령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송란희(36) 한국여성의전화 인권정책국장은 “현재 12세까지만 부모 동의 없이 성관계를 할 경우 상대방을 처벌할 수 있다”며 “이를 미국처럼 16~17세로 올리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현철·이유정 기자
최현철.이유정 기자 chdck@joongang.co.kr
▶최현철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com/chdc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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