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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취재파일] 연평도 포격전…훈장 없는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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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의 포격에 불타는 K-9 자주포

4년 전 오늘은 북한이 연평도를 향해 무차별 포격을 퍼부은 날입니다. 군은 오늘을 공식적으로 ‘연평도 포격 도발 4주년’이라고 칭합니다. 군 스스로 북한의 도발에만 방점을 찍었지 해병대 연평부대의 영웅적 항전과 승리에 대해서는 평가하기를 주저합니다. 사실 오늘은 ‘연평도 남북 포격전 4주년’이자 ‘연평도 포격전 승전 4주년’입니다.

그날 북한은 장사정포로 연평도를 선제공격했고 해병대는 K-9 자주포로 맞섰습니다. 쏟아지는 포탄을 뚫고 불 타는 자주포를 수습해 반격을 가해 북한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해병대 병사 2명과 민간인 2명이 산화했지만 북한은 노동신문이 “북한군 병사들이 피흘리며 쓰러졌다”고 묘사할 정도로 심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정보 당국은 북한군이 최소 30~40명의 사상자를 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명백한 전승 기념일입니다.

대승을 거뒀지만 놀랍게도 해병대 연평부대 장병 누구 하나 훈장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 군 최고 지휘부는 애써 승리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확전을 막아야겠기에 해군, 공군 전력을 가동하지 않았고 해병대를 고립무원 전장에 남겨뒀습니다. 질 줄 알았는데 이겨버렸습니다. 지휘부는 민망했습니다. 지휘부는 졌지만 해병대는 이겼습니다. 지휘부에게는 이겼지만 이겼다고 말하기가 쑥스러운 전투가 돼버렸습니다.

● 그날 그들은 비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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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의 포격에 불붙은 포 진지

4년 전 해병대 연평부대에는 자주포가 딱 6문 있었습니다. 이 6문으로 구성된 자주포 1개 중대가 북한 땅의 장사정포를 때릴 수 있는 유일한 타격 수단이었습니다. 북한 서남전선사령부는 연평도의 유일한 자주포, 포 7중대를 노렸습니다. 170mm, 240mm 장사정포로 해병대 포 7중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군 교범에는 1개 포 부대가 공격을 받으면 그 부대는 접어두고 주변의 다른 포 부대가 공격한다고 돼있습니다. 그러나 연평부대에는 그럴 전력이 없었습니다. 포 7중대는 교범에도 없는 “맞으면서 때리는” 처절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당시 포 7중대의 중대장이었던 김정수 대위에게 부하들의 절규 같은 무전이 타전됐습니다. “사격 준비 끝” 잠시 후 “사격 준비 끝” 또 “사격 준비 끝”.... 속절없이 북한의 공격을 받다가 이제는 반격할 준비가 됐는데도 사격 명령을 안내리니까 부하들이 화가 나서 지휘관에게 “사격하게 해달라”고 애원을 한 것입니다.

김 대위도 쏘고 싶었지만 적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적어도 3문 정도의 포가 필요했기에 입술을 꾹 깨물고 참았습니다. 마침내 3문의 사격 준비가 끝나자 해병대는 고대하고 고대했던 정밀 타격을 시작했습니다.

북한 포격이 있은 지 13분만입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늦었다고 말하지만 대단히 빠른 대응입니다. 기습을 당한 뒤 수습해서 반격하는데 걸린 시간입니다. 지난 달 10일 북한군이 남쪽을 향해 고사총을 처음 쏜 것이 15시 55분이고, 육군의 첫 대응 사격 시각이 17시 40분입니다. 15분 모자란 2시간 만에 대응했습니다.

그때는 누구도 늦었다고 타박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포탄이 비처럼 쏟아지는 상황에서 13분 만의 대응 사격을 누가 늦었다고 탓하겠습니까. 실전 경험 풍부한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은 해병대의 13분 만의 반격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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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모 외피에 불 붙은 것도 모르고 싸운 임준영 해병대

2년 전인 2012년 오늘 그들을 만났습니다. 그날을 상징하는 사진 ‘불 타는 K-9 자주포’의 사수, 강승완 해병대. 불 붙은 자주포 안에서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는 믿는 신이 없지만 너희들은 믿고 있는 신이 있으면 살려달라고 빌어라. 꼭 살아나가서 우리가 여기서 겪은 일들을 밖에 알리자. 꼭 살아남아라.” 그리고 싸웠습니다. 두려웠지만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조수원 해병대와 한규동 해병대, 포격전 때 다리에 파편이 박히고 얼굴이 찢겨 나갔지만 건강하게 전역해서 훌륭한 사회인이 돼있었습니다. 한규동 해병대는 여전히 얼굴에 큰 상처가 도드라졌지만 “나라 지키다 받은 훈장”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철모 외피와 콧잔등에 불 붙은 것도 모르고 싸워서 화제가 됐던 임준영 해병대도 꼭 만나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됐습니다. 어렵게 전화가 연결돼서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극구 사양했습니다. “다 함께 싸웠다” “저 혼자 부각되는 것 같아 미안하다”는 것이 인터뷰 거절 이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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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서정우 해병대 정모에 있던 앵커가 피폭 충격에 소나무에 박혔다

산화한 두 해병대도 누구보다 용감했습니다. 서정우, 문광욱 해병대는 휴가 가는 길이었습니다. 연평도 포구에서 인천행 여객선을 타려던 순간 포격 소리를 들었습니다. 부모, 애인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그냥 가도 되는데 미련한 두 해병대는 싸우겠다고 부대를 향해 뛰었습니다. 그러다 포탄에 맞고 숨을 거뒀습니다.

● 훈장 없는 승리…탓하지 않는 해병대

연평도 포격전 당시 우리 군은 북한 무도의 북한군의 동향을 감청했습니다. 그때 북한군의 무전에서 “포탄이 어디서 날아오는 거야. 저 XX들 왜 이러는 거야. 이거 뭐야”라는 외침이 잡혔습니다. 예상치 못한 포 7중대의 반격에 무도의 북한군이 화들짝 놀란 것입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도 연평도 포격 도발 5개월 뒤인 2011년 4월 30일자 정론에서 “‘여러분, 원쑤의 포탄에 우리 병사들이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앉아 있어야 합니까’라는 방송차 소리에 ‘아닙니다’하고 병사들이 싸우는 전호(戰壕)로 달려갔던 황해남도 농민들이여, 연평도에서 날아온 원쑤의 포탄에 밭을 갈던 암소가 넘어졌을 때…” 등의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포격전 당시 북한군의 피해가 상당했음을 노동신문이 사실상 인정했습니다.

정보 당국은 북한군 사상자가 최소 30~40명에 달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망자는 10여명으로 추산됩니다. 탈북자들은 당시 전투로 북한군 피해가 사망 10여명, 부상 30여명이라고 증언했습니다. 해병대가 이긴 싸움, 승전입니다.

<전쟁론>의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의지의 충돌’로 규정했습니다. 연평도 포격전도 남북 두 의지의 충돌이었습니다. 끝까지 버틴 의지는 해병대였습니다. 포를 먼저 내린 쪽은 북한군 서남전선사령부였습니다. 해병대는 맞고 시작했지만 전투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런데도 훈장 받은 해병대는 한명도 없습니다. 훈장 못 받았다고 나라 탓하는 연평부대원도 없습니다. 또다시 그날과 같은 상황이 닥치면 해병대는 똑같이 싸울 겁니다.

당시 해군 함정들은 포격전이 벌어지는 연평도와 북한쪽 해변 사이에서 빠져나왔습니다. 피한 것입니다. F-15K가 출격했지만 미사일을 탑재하지 않았습니다. 합참의 지시에 따른 것입니다. 확전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밑천이 뻔한 해병대에게만 맡기고 말 그대로 싸움 구경을 했습니다. 군 지휘부가 연평 포격전에서 해병대가 이겼지만 이겼다고 말 못하는 이유입니다.

[김태훈 기자 oneway@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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