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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정조와 함께 ‘왕의 정원’ 창덕궁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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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왕의 정원’으로 1997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 후원. 정조 이전엔 왕만을 위한 금원(禁苑)이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날 창덕궁 후원을 거닐던 정조는 경치를 혼자 보기 아까웠는지, 각별하게 아끼는 신하들을 불러 후원 유람을 떠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의 정원’은 어디일까.

경향신문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용지와 부용정. 부용정은 임금과 신하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내전 역할을 했던 아주 특별한 정자였다. / 박상미


몇 년 전, 유럽 궁전의 정원 기행을 떠난 적이 있다. 일직선의 나무 담장, 조각, 정자, 분수가 딸린 정원들은 치밀한 계산에 의해 조성되어 인공미가 물씬 풍겼고, 화려하며 웅장했다. 함께 떠났던 궁전 정원 연구자에게 ‘왕의 정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 어디인지 물었더니, 자신은 한국의 ‘창덕궁 후원’을 꼽겠다고 했다. 나는 반가움과 동시에 부끄러웠다. 창덕궁의 정원을 거닐어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창덕궁은 동아시아 궁궐 건축과 정원의 디자인이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특히 건축물이 자연적 배경과 훌륭하게 조화된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탁월한 유산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창덕궁을 이렇게 평가했다. 창덕궁 후원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왕의 정원’으로 1997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원은 자연과 인간의 손길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문화적 풍경’이다. 그 속에 조성한 사람의 심성이 고스란히 담긴다. 창덕궁의 후원을 조성하고 거닐었을 조선의 왕 중에 나는 정조를 택하여 함께 걷기로 했다. 오로지 왕이 독점했던 창덕궁 후원의 경치 구경을 신하들과 함께하고, 창덕궁 후원 유람을 문화행사로 발전시킨 최초의 임금 정조. 창덕궁을 유람하게 된 건 강세황의 글을 읽은 덕분이었다.

정조와 창덕궁 후원 유람, 꿈 같은 체험

김홍도의 스승으로 알려진 조선 후기의 화가이자 평론가인 강세황. 그가 쓴 <호가유금원기>에 보면 정조와의 창덕궁 후원 유람에 대한 감회가 상세히 나와 있다. 61세 때까지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다가 노년에 영조의 부름을 받아서 벼슬에 올랐을 때, 정조와 함께한 창덕궁 후원 유람은 그에게 마치 꿈과 같은 체험이었다. <호가유금원기> 말미에 강세황은 창덕궁 후원 유람의 감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우리 임금께서 몸소 이 미천한 신하들을 거느리고 좋은 경치와 명승지를 낱낱이 일러주면서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음성으로 한 집안 식구나 다름없이 대해주었다…. 이는 과거의 기록을 두루 찾아보아도 전혀 없던 일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이러한 과거에 전혀 없었던 은혜를 성명한 세상에서 받을 수 있었는가? 황홀하게 균천에 올라갔던 꿈에서 깬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워하면서, 대강 적어서 나의 자손에게 전하여 보이노라.”

정조가 재위한 기간은 조선시대 역사상 학문과 예술이 가장 부흥했던 시기다. 정조는 창덕궁 후원을 역대 왕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잘 활용하였다. 왕실도서관이자 학술과 정책을 연구했던 규장각에서 정조는 자신을 지지해줄 정치세력을 양성하며 신하들과 많은 시간을 보낸다. 어느날 정조는 가을이 깊어가는 후원의 경치를 혼자 보기 아까웠는지, 자신이 각별하게 아끼는 신하들을 데리고 창덕궁 후원 유람을 떠나는데….

“신축년(1781) 9월 초사흗날에 신 강세황(1713~1791)이 규장각에 있는 희우정에 입시하였다. 임금이 오색 대금전에다 병풍 쓰기를 명하였기 때문이다. 붓을 채 대기 전에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기에 구경할 만한 아름다운 곳이 있는데, 먼저 글씨를 쓴 후 놀러가겠는가, 아니면 먼저 놀고 난 뒤에 쓰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내가 우물쭈물 미처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임금께서 ‘곧바로 대답을 안 하는 걸 보니 먼저 놀고 싶은 뜻이로다’ 하셨다.”

강세황이 규장각 옆 희우정에 들자 정조가 갑자기 후원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깜짝 제안을 한 것이다. 강세황은 집안 선조들과 영조가 두터운 관계를 맺어온 덕에 정조에게도 상당한 배려를 받긴 했지만, 아무도 구경해보지 못한 왕의 정원을 구경하게 돼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허겁지겁 따라나선다. 진경산수화, 풍속화, 인물화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서양화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조선 후기 미술계의 리더였던 그에게 창덕궁 후원의 경치는 ‘신선의 세계’에서 만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정조를 따라나선 강세황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후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화가의 눈으로 묘사한 후원의 경치는 한 편의 영상처럼 펼쳐진다.

여기는 선계인가 불계인가

강세황의 글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창덕궁 후원 유람을 시작했다. 정조와 강세황이 앞서 걷고, 그 뒤를 창덕궁 후원의 유람문화에 대해 논문을 쓰고 있는 송석호 선생(고려대 박사과정)과 내가 따라 걸었다. 10월의 마지막 주, 단풍이 막 물들기 시작한 창덕궁 후원의 풍경은 윤선도 어부사시사의 한 구절을 떠오르게 했다.

‘선계(仙界)인가 불계(佛界)인가, 인간이 아니로다!’

<호가유금원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옥류천 일대라 우리는 먼저 그곳으로 향했다. 강세황은 그 주변 풍경을 이렇게 적었다.

“푸른 솔, 붉은 단풍이 양 옆에서 비치니, 마치 장막을 두른 듯 동천에 들어간 듯, 머리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반리쯤 가니 조그만 고개가 있고, 고개를 넘어 수백 걸음쯤 가니 숲이 트이고 시야가 활짝 열렸다. 바위 언덕과 소나무 숲 사이에 정자가 있는데 ‘소요’라고 현판을 붙였다. 나지막한 담이 옆으로 둘러 있고, 정자 앞에는 기묘한 바위가 옆으로 누웠다. 거기에 글씨 두어 줄이 새겨져 있지만 이끼가 끼어서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바위 아래는 반석이 편편하게 깔려서 둘레가 스무 걸음이 좀 넘는데, 물을 끌어들여 술잔을 띄울 수 있는 물굽이를 만들었다.”

이곳은 후원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술잔을 띄우고 연회를 베풀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인조 14년(1636)에 상림삼정(上林三亭)으로 불리는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을 세우면서 조성된 곳으로, ‘옥류천 권역’이라 부르며 소요정 앞에 있는 큰 산 모양의 ‘위이암’이 인상적이다.

“옥류천 각자와 시구가 보이시죠? 옥류천은 인조의 글씨고, 시는 숙종의 어제시(임금이 쓴 시)예요. 움푹 파인 물굽이에 물이 흐르면 그 위에 술잔을 띄우고 술잔이 자신의 앞에 왔을 때 시를 읊는 놀이를 하였는데, 그것을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라고 하죠.”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술잔이 내 앞에 당도하면 시를 읊는 놀이라! 조선 후기 가사인 정극인의 <상춘곡>에서 “꽃나무 가지 꺾어 수놓고 먹으리라”(꽃나무 가지를 꺾어서 술잔의 수를 세어가며 술을 먹으리라)는 구절이 자연과 술에 흠뻑 취한 풍류를 가장 잘 표현한 백미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곳에서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었을 신하들을 떠올리니 “속세를 잊고 낮술 한 잔 먹고 지고!”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청의정·존덕정에 얽힌 이야기

아쉬움을 간직한 채 바로 오른편에 있는 ‘청의정’으로 향했다. 청의정은 유일하게 짚으로 지붕을 올린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었고, 아주 작은 논 가운데 정자가 서 있었다. 대부분의 정자가 연못과 육지에 몸을 절반씩 걸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논 위에 정자를 세운 것이 의아했다. 해마다 청의정에서는 벼베기 행사가 열리는데 ‘임금이 직접 벼를 베었던 곳’이라는 설도 있다.

“사료에는 이곳에서 임금이 낚시를 하였다고 전해져요. 후원에도 임금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백성들에게 권장하는 친경례(親耕禮)라는 의례가 있었어요. 지금의 창경궁 춘당지 자리에 있었던 11곳의 내농포(內農圃)가 바로 그 자리입니다. 여기에 벼를 심고 벼베기를 했다는 기록은 사료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어요. 짚으로 지붕을 이은 정자, 즉 모정(茅亭)이라는 이유로 근대에 갑자기 만들어낸 행사죠.”

사료에서 찾을 수 없는 벼베기 행사는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벼베기 행사에 대한 의문 제기가 필요할 것이라는 대화를 나누며 존덕정 권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겹처마지붕의 존덕정은 그 모양이 낯설었다. 영화 속에서 본 청나라 정자의 모양 같아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존덕정은 인조 22년(1644)에 조영되었는데, 병자호란 당시 볼모로 잡혀간 봉림대군이 심양고궁 대정전(1625)을 보고 온 뒤에 조영된 것이에요. 그래서 만주족 특유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어요. 재미있는 건 조선의 왕 중에 봉림대군의 아들인 현종이 유일하게 심양에서 태어났는데, 존덕정을 지은 해에 처음 조선에 입국을 해요. 존덕정 현판을 쓴 사람이 바로 현종인데,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죠.”

대정전의 겹지붕이 봉림대군의 눈에 매우 인상적이었고, 인조도 그걸 반영한 정자 짓기를 시도했으리라.

경향신문

애련정 / 박상미


후원을 개방한 정조, 유람문화를 발전시키다

정조와 강세황, 두 남자의 걸음이 빠르다. 그들의 뒤를 따라서 관람정을 지나고 애련정을 거쳐서 부용정으로 가 보자. 관람정, 애련정, 부용정은 두 다리는 연못에 담그고 몸체는 육지에 앉아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이때까지는 연못 풍경을 만끽하기 위해 처음부터 그 위치에 지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애련정과 부용정은 연못의 섬 위에 지어놓은 것을 훗날 이전한 것이라 했다. 배를 타고 가서 섬 위의 정자에 앉으면 더욱 운치 있을 듯한데, 왜 육지로 옮겨 놓았을까. 궁금했으나 사료에 남은 기록이 없는 게 못내 아쉬웠다.

존덕정의 남쪽에 있는 부채 모양의 관람정을 지날 때는 그 풍경이 마치 꿈같이 아름다워서 연못 위에 배를 띄우고 노닐고 싶다고 했더니, 고종이 이 연못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던 것을 어찌 알았느냐고 송석호 선생이 묻는다. 동궐도에는 본래 3개의 연못이 있었는데 고종 21년(1884)에 배를 타기 위해서 연못을 하나로 합친 후에 관람정을 세웠다. 관람정에 앉아서 바라보는 주위 경관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이제 우리는 정조연간 유람행사의 마지막 장소인 부용정으로 향했다.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용지는 한가운데 둥근 섬을 만들고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 연못 남쪽에 부용정이 있다. 부용정에서 물 위에 떠 있는 방은 한 단이 높게 지어졌고, 창호의 문양 또한 다른 방과는 다르다. 연못 위에 지은 방은 특별한 공간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부용정 상량문에는 이 공간을 두고 ‘대장괘(大壯卦)의 견고한 상(象)’을 취했다고 적혀 있어요. 대(大)는 양(陽)을, 장(壯)은 왕성하다는 뜻이니 곧 임금의 자리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나머지 공간에는 ‘가인괘(家人卦)의 한 집안 안팎이 모두 바른 상’을 견주었다고 적혀 있는데, ‘가인’은 한 집안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니 ‘신하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개축된 정자’라는 말이죠. 예전에 후원을 금원(禁苑)이라고도 불렀는데, 정조 이전에는 일반인 출입 금지를 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정조 때부터 신하들이 왕과 동행하면서 후원 출입이 가능해지니까 정원문화 또한 확대되었죠. 부용정은 유람의 마지막 장소였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들어 갈 수 있는 내전(內殿)의 역할을 했던 아주 특별한 정자였어요.”

신하들과 함께 후원 유람을 즐겼던 정조는 내각상조회(內閣賞釣會)를 만들어서 유람문화(遊覽文化)로 발전시켰다. 오늘 우리가 왕의 정원을 거닐 수 있는 건 정조 덕분이리라.

조선왕조 5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에 역대 여러 왕들의 정원문화가 꾸준히 계승되며 발전해온 창덕궁 후원. 풍수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창덕궁은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린 매화 줄기의 끝자락에 맺힌 꽃망울 같은 형상이라 한다. 응봉산자락 구릉 자연의 품속에 아담한 연못과 다양한 모양의 정자가 곳곳에 숨어 있는 곳. 자연과 하나 된 풍경이 숨 쉬는 곳. 창덕궁의 공사감독관은 문신이 맡았다고 전한다. 건축과 조경에 인문정신을 담고자 한 왕들의 깊은 속내가 담긴 것은 아닐까.

소박한 아름다음이 화려함을 능가하고 자연의 품속에 어우러진 풍경이 500년 조선왕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창덕궁. 후원의 단풍은 이제 막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후원을 빠져나오며 옥류천을 떠올려 보았다.

지금쯤 물 위에 핀 매화 같은 술잔은 누구 앞에 당도했을까. 그는 지금 무슨 시를 읊고 있을까….

<박상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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