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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김경란의 아름다운 사람] 겸손하게 머물다 간 여행자, 벌써 그녀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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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모독'

조선일보

김경란 방송인


2011년 박완서 작가가 작고했을 때 마음에 서늘하고 서운한 바람이 불던 기억이 난다. 3년이 지난 이 가을, 새로 발간된 작가의 책을 만났다. '모독'(열림원). 15년 넘게 희귀본으로 보관돼 오던 박완서의 기행 산문집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라니 반가움과 그리움이 교차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왜 티베트이고 왜 '모독'일까.

나라면 예순다섯 나이에 고산의 부족한 공기와 거친 바람을 알면서도 티베트로 갈 마음을 먹었을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책 속엔 힘겹고 지친 작가의 심신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황량한 벌거숭이 갈색 산과 스산한 바람 소리를 접하며 황혼녘의 작가는 젊은 날엔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본다. "흙바람을 통해서 어렴풋이 산의 원형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도 창조의 시초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 너무도 황량하고 쓸쓸하여 시초가 아니라 종말의 풍경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구가 마침내 생명을 품을 수 없을 만큼 지치고 노쇠하면 저런 모양으로 먼지로 풍화해버릴 것도 같다."

여정에서 계속 작가의 눈에 들어온 건 풍경과 함께 뜻밖에도 어딜 가나 만나던 구걸하는 아이들이었다. 비루한 거지 근성만 같아서 넌더리가 났었다는 작가의 생각이 뒤바뀐 계기는 한족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에서였다. 일행이 음식을 남기기를 바라며 문 앞에 수도 없이 서 있는 거지 떼에게 여주인이 고스란히 남은 음식들을 개죽으로 만들어 안겨주는 행태를 보고 작가는 "그 여자가 한 것은 적선도 보시도 아니었다. 그건 순전히 인간에 대한 모독이었다"고 말한다.

조선일보

그나마도 먹지 못한 이들에게 갖고 있던 빈 페트병이라도 주려고 밖으로 나온 작가는 마음이 민망해지는 광경을 마주한다. 작은 도시 여기저기 뒹구는 썩지 않는 비닐조각과 페트병들. 그리고 생각한다. "식당주인 나무랄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우리의 관광 행위 자체가 이 순결한 완전 순환의 땅엔 모독이었다"라고.

마치 낯선 이의 집을 방문할 때 긴장하며 조심스레 있다 나오듯, 낯선 나라에선 그저 겸손하게 머물다 오기를. 여행자는 그 땅의 간섭자나 선생이 아니라 흔적 없이 다녀가는 손님이어야겠구나 싶어진다. 책을 덮으니 그리웠던 작가와 함께 희로애락을 겪어낸 듯하다. 힘들면 힘든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터벅터벅 걸어온 그 긴 여정의 마침표를 곱게 찍고서는 다시 우리 곁에서 멀어지는 작가의 뒷모습이 벌써 그리워진다.

[김경란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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