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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Saturday] 싱글족 '생활 해결사' 심부름 보이 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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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떡볶이 부산 보내달라" … 1만2000원어치 배달료 45만원

야식 먹는 밤 10시~새벽 2시 피크 "구운 삼겹살 1인분 사달라" 까지

죽 시켜놓고 "장화 좀 벗겨주세요" "친구 집 가서 전화 받으라 해줘요"

"고스톱 치는데 광 팔아 달라" 요청 카드 맡기고 명품 백 구매 주문도

중앙일보

언제 어디든지, 무슨 심부름이든 곧바로 달려가는 ‘심부름 보이.’ 지난달 29일 생활편의 서비스업체 ‘띵동’의 심부름 보이 심상무씨가 서울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강북으로 음식을 배달하기 위해 소형 오토바이를 타고 동작대교 위를 달리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달 28일 오후 8시쯤 서울 논현동의 한 골목. 꽁무니에 네모난 박스를 올린 소형 오토바이 10여 대가 쉴 새 없이 떡볶이 가게를 들락거렸다. 헬멧과 바람막이 재킷으로 단단히 무장한 청년들은 모바일로 미리 주문해 놓은 각종 간식을 수령해 황급히 사라진다.

얼핏 보면 식당 배달원 같지만 이들에겐 한층 난이도 있는 임무도 끊이지 않는다. ‘셋이서 고스톱 치는데 와서 광 좀 팔아달라’ ‘부동산 계약서를 쓰러 가야 하는데 여자 혼자라 무서우니 동행해 달라’ 같은 내용들이다. 이름하여 ‘생활편의 서비스맨’. 혹자는 ‘생활밀착형 서비스맨’이라고 부른다. 그게 어려우면 그저 ‘심부름 보이’라고 하면 된다.

기동력이 생명인 이들은 스쿠터가 기본이다. 서울 강남에만 십여 개 업체, 수백명의 심부름 보이가 활동 중이다. 야식 배달이 몰리는 오후 10시~익일 오전 2시가 피크다. 요즘 ‘강남의 밤은 스쿠터와 함께 열린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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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예랑 인턴기자가 한 심부름업체에 ‘알바’로 취직해 고객들의 주문을 받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기자들이 직접 심부름 보이 임무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신체 건강하고, 오토바이를 탈 줄 알고, 20년 정도 혼자 산 경력이 있어 집안일에 일가견 있다는 남자 기자 두 명이 뽑혔다. 인턴기자도 합류했다. 오후 3시 서울 논현동 차병원 네거리와 역삼역 사이에 있는 한 업체로 출근했다. 한 시간 만에 들어온 요청은 싱거웠다. 콜센터 직원은 “죽 배달 있는데, 갈래요”라고 물었다. 일단 신고식을 치르기로 했다. 주소는 청담동의 한 아파트. 하지만 혼자 가는 건 허용이 안 됐다. 신입 때는 혼자 보내지 않는 게 철칙이다. 민감한 업무 특성 때문이란다. 고객의 집 안에서 수행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프라이버시에 대한 전문성이 필요하다. “배달은 손만 내미는 게 예의입니다. 혼자 사는 여성분들은 얼굴을 마주치기 싫어해요.” 심부름업체 ‘해주세요’ 정다운(31) 팀장의 신신당부다. 소형 오토바이를 타고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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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할 죽을 받으러 쏜살같이 죽집으로 내달렸다. ‘식기 전 식탁 앞으로’. 음식 배달의 대원칙이다. 고객은 20대 초반 여성이었다. 시선을 피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재빨리 고개를 돌린 뒤 죽값 8000원과 배달료 5600원을 합쳐 “1만3600원입니다”고 말했다. 2만원을 받아 거스름돈을 주고 돌아서 나오려는 순간, 등 뒤에서 생각도 못한 요구가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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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저 장화 좀 벗겨주세요. 아무리 해도 안 벗겨져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돌아서 여성의 발을 보니 정말 집 안에서 장화를 신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 동안 신고 있었던 것일까. 한쪽 무릎을 꿇고 장화를 힘껏 당겼다. 신발이 쑥 빠졌다. 고객은 해방감, 나는 성취감에 서로 멋쩍게 웃었다.

추가 임무에 대한 요금은 받지 못했다. 요구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장화 벗겨준 값으로 얼마가 적당한지 판단이 안 돼 그냥 나왔다. 아파트 1층에서 기자를 기다리고 있던 정 팀장은 “그런 경우도 종종 있지요. 음식을 시키고 나서 ‘들어와서 벌레 잡아 달라’고 덤으로 요구하기도 해요”라고 말했다.

이날 ‘택배를 부쳐 달라’ ‘커피 거름종이를 사다 달라’는 주문을 추가로 수행했다. ‘구운 삼겹살 1인분만 사다 달라’는 손님에게 식당에서 구운 삼겹살을 돼지기름이 굳기 전에 수송하느라 스쿠터로 위험지대를 넘나들었다. 아찔했다. 언젠가 비 오는 날 피자 배달을 시켜놓고 ‘30분 안에 안 오기만 해봐라’ 하며 벼르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름 모를 ‘배달의 기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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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해드립니다’를 모토로 내건 심부름 업체는 강남 차병원 네거리를 중심으로 약 5㎞ 반경이 주무대다. 강남·서초·송파 등 세칭 ‘강남 3구’와 강 건너 남산 일대다. 심부름업체 ‘띵동’의 김보민(36) 팀장은 “부산까지 떡볶이도 배달해 봤지만 콜은 주로 강남 유흥업소 밀집지역과 한강 주변이 많다”고 말했다.

사무실은 강남, 집은 옥수동인 맞벌이 김지연(34)씨는 ‘생활편의 서비스’ 단골이다. “퇴근 시간에 맞춰 식재료를 부탁하거나 음식을 배달시키면 편해요. 이불 빨래나 강아지 밥 먹이는 일을 요청할 때도 있고요. 일주일에 서너 번, 월 20만원 정도 들긴 하지만 가사도우미를 부르는 것보다 저렴하다”고 말했다. 생일 파티 같은 이벤트도 심부름업체의 단골 메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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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 보이는 약 10년 전쯤 서울 강남 논현동 고급 유흥업소 주변에서 생겨났다. 논현초등학교 인근의 한 수퍼가 원조라는 증언도 있다. 유흥업 종사자가 많은 오피스텔이나 업소에서 음식을 시킨 김에 ‘수퍼에 들러 담배 한 갑’ ‘약국에 들러 술 깨는 약’을 주문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아예 신규 업종이 됐다. ▶반려동물 밥 주기 ▶동사무소 서류 떼기 ▶간단한 공구작업 등 서비스 범주도 넓어졌다. ‘음식배달원+택배+잔심부름+수리공+동물돌보미’의 다기능을 수행하는 융합형 서비스업으로 우뚝 섰다. 연간 매출이 50억원을 넘는 업체도 있다. 불륜 추적이나 빚 독촉 등 불법 소지가 있는 업무는 안 맡는 게 불문율이라는 점에서 과거 일부 악덕 심부름센터와 차이가 난다.

물론 애환도 있다. 악성 고객이 주범이다. “고주망태가 돼서 음식을 주문한 뒤 전화 끊고 자고 있는 경우가 있지요. 배달할 곳을 잃어버린 음식으로 회식 할 때도 있죠. 식은 음식 먹는 서글픈 회식이죠.” 김보민 팀장의 말이다.

싱글족·싱글맘·싱글대디 같은 ‘싱글 패밀리’가 귀한 손님들이다. 가을 운동회 시즌엔 “좋은 자리를 선점해 달라”는 주문이 들어와 직원들이 단체로 교문 앞에서 밤새 줄을 서기도 했다. 사무실을 떠날 수 없는 직장인을 위해 신용카드를 넘겨받아 백화점에서 신상품 명품 백을 대신 사준다. 서울 강남의 한 유명 떡볶이 1만2천원어치를 택시로 부산까지 45만원에 배달한 사례도 있다.

서울의 1인 가구는 2010년 기준 약 400만 명. 2020년에는 600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추산도 있다. 심부름 보이의 ‘예비 고객’이 는다는 얘기다. 김 팀장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워낙 바쁘게 돌아가 남의 손을 빌리는 잔심부름이 필요하다”며 “요즘은 유흥가 손님보다 오피스텔 밀집지역에서 각종 민원, 집안 청소 등 서비스가 많다”고 했다.

글=김영주·배재성 기자, 배예랑 인턴기자 humanest@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조선시대 기생도 야밤에 냉면 주문 … 배달의 역사 200여 년

‘진찬합과 건찬합, 교자음식을 화려하고 정교하게 마련해 뒀으니 필요한 분량을 요청하면 가깝고 먼 곳을 가리지 않고 특별히 싼 가격으로 모시겠습니다’.

1906년 7월 만세보에 실렸다는 광고다. 우리 민족 ‘배달의 역사’가 최소 108년은 됐다는 얘기다. 심부름 서비스의 원조는 뭐니뭐니해도 음식 배달이다. 증언에 따르면 역사는 1800년대로 올라간다. 평양냉면과 함께 ‘조선 2대 냉면’으로 꼽히는 진주냉면이 주인공이다.

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장은 “진주관아는 재색을 겸비한 기생이 많았는데 왜인이나 지주 등 한량들이 기생놀이를 하고 야심한 밤에 냉면집을 찾아 밤참으로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며 “당시에는 기생뿐 아니라 부유한 가정집에서도 냉면을 배달시켜 먹어 냉면집에는 배달을 주로 하는 남자 하인이 서너 명씩 있었다”고 설명했다.

‘목숨 건 배달’의 기록은 “청요리 배달부가 우동을 배달하다 차에 치여 빈사상태에 빠졌다”는 1936년 신문기사로 확인된다.

반찬이 많은 한식과 달리 단무지만 있으면 쑥쑥 넘어가는 짜장면이 배달업계를 선도했고, 졸업식과 이삿날의 상징 음식이 되면서 배달음식을 평정했다.

그러나 이젠 ‘보온 배달’의 테크놀로지가 급성장하면서 서울 강남의 고깃집과 레스토랑이 잇따라 도전장을 냈고, 스타벅스까지 가세했다. ‘생활편의 서비스맨’들도 바빠지고 있다.

김영주·배재성기자 , 배예랑 인턴기자 humanest@joongang.co.kr

☞ 11월 1일자 지면 중 '전국 잔심부름 업체는…' 정보에 '수원 애니맨'으로 게재됐으나, 이후 애니맨측이 "애니맨은 수원 뿐만 아니라 서울과 경기도 부산 해운대(11월 오픈 예정) 등 전국에 체인을 둔 심부름업체"라고 알려왔습니다.

김영주.배재성.배예랑.권혁재 기자 shotgun@joongang.co.kr

▶권혁재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com/shotgun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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