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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Saturday] 시중은행 본점 사옥에 얽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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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행장실 물리적 거리로 소통 부재 .‘KB금융 잔혹사’ 불러

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 간판 내려 “남대문로 기 다했다” 풍수론 돌아

신한, 조흥과 합병 후 새 본점 포기 “돈 찍어내던 전환국 터 애착 강해”

하나, 여의도로 옮긴 후 M&A 좌절 을지로로 복귀한 뒤 외환은행 인수

여의도의 은행장은 회장이 의심스러웠고, 명동의 회장은 은행장이 딴 마음을 품은 것 같다고 느꼈다. 갈등의 골은 깊어갔다. 하지만 우연이라도 마주칠 일은 없었고, 상대를 향해 속 시원히 다그치고 오해를 풀 기회도 생기지 않았다. 수장들 간에 흐르는 심상찮은 기류에 임직원 간의 발길까지 뚝 끊겼다. 완벽한 소통 부재 상태에서 내분이 전면적으로 표출했고, 결국 동반 낙마라는 비극으로 마무리됐다.

‘금융 막장 드라마’로 불린 KB금융 내분 사태의 중요한 요인은 ‘물리적 거리’다. KB금융의 한 고위 임원은 “회장과 행장이 통합 사옥에 근무하며 스킨십이 잦았다면 극단적인 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갈등의 당사자였던 임영록 회장과 이건호 행장이 얼굴을 마주 하는 일은 한 달에 한 번 저녁식사를 겸한 비공식적 경영협의 때 정도였다.

KB는 지주 회장의 집무실은 명동(옛 국민은행 본점), 국민은행장의 집무실은 여의도(옛 주택은행 본점)에 각각 자리 잡고 있다. 한 지붕 아래에 회장과 행장이 근무하는 여타 지주사들과는 딴판이다. 둘로 나뉜 헤드쿼터는 국민-주택은행이 통합한 지 10여 년이 넘도록 여전히 화학적 결합을 못하고 있는 상황을 상징한다.

두 본점의 희비는 국면이 바뀔 때마다 쌍곡선을 그렸다. 김정태 통합 은행장의 집무실이 여의도에 차려지자 명동은 사실상 사령부의 기능을 잃었다. 2008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고 회장 집무실이 명동에 차려지며 반전이 이뤄졌다. 하지만 은행장이 자리한 여의도의 위세도 쉽게 꺾이지 않았다. 국민은행은 지주 내 자산의 90% 가까이 차지할 만큼 압도적인 위상을 갖고 있다. 이런 명동과 여의도의 긴장을 무대로 CEO의 연이은 낙마와 징계의 ‘KB금융 잔혹사’가 이어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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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건건 힘겨루기를 벌였던 초대 황영기 회장과 강정원 행장은 차례로 감독당국의 중징계 통고를 받고 중도 하차했다. ‘천왕’으로 불리던 어윤대 회장은 갈등의 싹을 아예 자르려 했다. 여의도 본점 행장실 위층에 회장 집무실을 따로 두고 은행 경영을 직접 챙겼다. 임영록 회장에게는 여의도를 제압할 만한 힘이 없었다. 대신 ‘봉쇄’ 카드를 빼 들었다. 취임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은행장을 지주 이사회 멤버에서 뺀 것이었다. 윤종규 회장 내정자가 “당분간 행장을 겸직하겠다”고 나선 건 고육책이다. 1인 2역을 하며 갈등의 소지를 없애겠다는 얘기다.

통합 본점 마련은 KB의 숙원사업이었다. 대우빌딩, 여의도 MBC 부지, IFC, 광화문 파이낸스센터 등 웬만한 랜드마크 건물은 모두 후보지로 검토됐다. 하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대표금융 그룹의 ‘얼굴’을 결정한다는 무게감을 감당하기에는 KB의 지배구조가 너무 허약했다. KB금융 관계자는 “임기 3년짜리 ‘낙하산’ 수장에게 통합 본점의 입지를 결정하고 막대한 투자를 한다는 게 여간 부담스럽지 않은 일이었고 번번이 결정을 미뤘다”고 전했다.

은행의 생명은 신뢰와 안정성이다. 쉽게 터를 잡지도 않지만 한 번 자리 잡으면 잘 안 옮긴다. 그러니 본점 입지를 정할 때도 자리가 갖는 상징성과 전통, 그리고 풍수까지 꼼꼼히 따진다. 이 모두를 충족시켰던 대표적 장소가 한때 ‘한국의 월스트리트’로 불리던 남대문로다. 청계천을 옆에 낀 1가에는 시중은행의 맏형 역할을 했던 조흥은행 본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국내 최고(最古) 은행인 한성은행(조흥은행 모태)과 천일은행(현 우리은행 모태)이 있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2가에는 상업은행, 한일은행, 국민은행과 서울은행 본점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어 3가에는 제일은행 본점(현 SC제일지점) 자리가 있다. 시중은행을 대표하는 이른바 ‘조-상-제-한-서’의 본점이 모두 남대문로를 따라 들어서며 돈이 흐르는 주맥을 이룬 것이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이들 은행은 하나 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상업은행 본점은 한국은행에 매각됐고 한일은행 본점은 롯데백화점에 넘어갔다. 하나은행에 인수된 서울은행 본점은 매각된 뒤 호텔 건물로 개조됐다. 신한은행에 통합된 조흥은행 본점에는 신한생명·신한캐피탈 본사가 들어서 있다. 금융권에선 ‘남대문로의 기(氣)가 다했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쇠락하는 곳이 있으면 새롭게 일어서는 곳도 있는 법이다. 태평로(신한은행)와 을지로(하나은행)가 대표적이다. 신한은행은 한때 합병한 조흥은행 본점 자리에 새로운 통합 본점을 건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곧 접었다. 현재 본점 자리에 대한 수뇌부들의 애착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금융권에서 신한은행 본점은 대표적인 ‘명당’으로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돈을 찍어내던 전환국 자리였다. 사무공간이 부족해지자 본점 인근에 매물로 나온 빌딩을 사들이려 했다가 포기하기도 했다. 신한금융지주 고위 관계자는 “기존 업체가 망해서 나갔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고 말했다.

하나은행의 을지로 본점에 대한 애착도 그 못지않다. 단자회사 시절 몇 개 층만 쓰다 은행업으로 전환, 승승장구하며 건물 전체를 사들인 ‘성공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빌딩이다. 지주체제로 전환한 뒤에는 지주사를 한때 여의도로 옮기기도 했지만 얼마 뒤 복귀했다. 여의도로 옮긴 뒤 좀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게 이유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여의도 시절 한 차례 실패했던 외환은행 인수에 끝내 성공한 것도 을지로 복귀 이후였다.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 유제욱 과장은 “많은 시중은행이 흥하고 망했지만 본점들은 ‘4대 문’ 안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건 공통적”이라면서 “돈을 다루는 특성상 보수적이고 늘 위험이 따르는 상황에서 안정감을 줘야 한다는 업(業)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조민근 기자 jming@joongang.co.kr

[S BOX] 은행 건물 화강암 많아

‘시중(市中)은행’은 서울에 본점을 둔 일반은행을 일컫는다. 일본의 ‘도시-지방은행’에서 유래한 독특한 분류다. 이들 본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서울 중에서도 4대문 안에 자리잡고 있다.

은행이 도시 핵심부로 들어서는 건 전 세계가 공통적이다. 유럽에서 대금업자들이 벤치(bench) 하나 놓고 영업했다는 데서 유래한 은행(bank)은 점차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돈을 끌어들이는 데 공을 들이게 됐다. 이들에게 ‘안전하고, 믿을 만하다’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값비싼 땅에 고대의 성이나 신전의 모습을 본뜬 점포가 필요했다.

일제시대 가장 번성한 거리이자 근대 모더니즘이 싹튼 상징적 공간인 남대문로에 은행이 집중적으로 들어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시대 은행 건물은 두꺼운 화강암 석재에다 육중한 기둥 장식으로 ‘신뢰’를 표현했다. 또 보안을 강조하기 위해 문과 창문은 되도록 작게 만들었다. 해방 이후 지어진 은행 건물 역시 디테일을 이어받아 각진 금고를 연상시키는 건물이 많다. 은행 본점은 건물이 지어진 시대의 경제상도 반영한다. 대공황기인 1932년 건립된 조선저축은행(현 SC제일지점)은 다른 은행 건물과는 달리 출입구에 계단을 만들지 않았다. 전비 마련이 급한 때 일반 대중의 예금을 끌어들이려 설립된 은행인 만큼 ‘문턱’을 없앤 것이다.

조민근 기자 jming@joongang.co.kr

▶조민근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com/sak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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