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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Saturday] 미국서 쓴잔 앱솔루트, 앤디 워홀 그림 입혀 판매 1위 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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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솔루트 보드카’ 통해 본 아트마케팅

제품에 예술 입히는 감성마케팅 고객 충성도 창출, 시장점유율 높여

프랑스 와인 ‘로칠드’ 대표적 사례 샤갈 등 아티스트 라벨로 1등급 승급

베네통은 논란 부른 사진작가 해고 신세계 등 국내 업계 일회성에 그쳐

중앙일보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병이 천장과 벽을 온통 형광색으로 물들였다. 1986년 미국의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이 그린 병이다. 5년 뒤, 그림 속 이 병은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수입 보드카가 됐다. 스웨덴 주류 브랜드인 ‘앱솔루트 보드카’(이하 앱솔루트)다. 지난달 1일 앱솔루트는 워홀의 활동무대였던 뉴욕 맨해튼에서 ‘앤디 워홀 한정판’ 출시행사를 열었다. 앱솔루트로 만든 칵테일을 마시면서 병에 입혀진 워홀의 그림을 즐기는 자리였다.

앱솔루트가 28년 만에 워홀을 불러냈다. 최근 미국의 주류 시장은 앱솔루트가 워홀을 필요로 하던 당시와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버번위스키 등 ‘브라운 스피릿’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보드카는 럼이나 진처럼 칵테일 베이스로 쓰이는 ‘화이트 스피릿’이다. 앱솔루트가 워홀이 남긴 ‘아트마케팅’이란 유산(heritage)을 무기로 꺼내든 이유다. 기업이 추구하는 브랜드 이미지 또는 제품에 예술적 요소를 입히는 고도의 감성마케팅이 아트마케팅이다.

아트마케팅은 역설적으로 기업이 가격 또는 기술력 등으로 우위를 점할 수 없을 때 구원투수가 된다. ‘아티스트 라벨’로 유명한 프랑스 와인 ‘샤토 무통 로칠드’(이하 로칠드)가 그랬다. 23년 보르도 지방에서 와인사업을 시작한 바롱 필리프 드 로칠드는 다른 와인 메이커들과 달리 와인을 오크통이 아닌 병째로 팔기로 결정한다. 이때 라벨은 다른 와인과 로칠드를 차별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45년부터 호안 미로(1969)·마르크 샤갈(1970) 등 당대 유명한 예술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아티스트 라벨을 만들었다. 이들에게 로칠드는 와인 두 박스를 대가로 지불했을 뿐이다. 아티스트 라벨 성공에 힘입어 로칠드는 73년 만년 2등급 와인 신세에서 벗어나 1등급 와인이 된다.

79년 미국 시장에 갓 진출한 앱솔루트도 아트마케팅을 통해 큰 성공을 거뒀다. 당시 앱솔루트의 미국 유통 담당자였던 미셸 루스는 85년 친분이 있던 워홀에게 앱솔루트 병을 소재로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한다. 여기에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앱솔루트는 러시아의 스톨리치나야, 미국의 스미노프 등에 밀려 고전하고 있었다. 사실 보드카를 맛으로만 구별해 내기는 어렵다. 그래서 앱솔루트는 목이 짧으면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용기로 시각적 차별화를 시도하고자 했다. 루스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인 워홀은 단숨에 ‘손에 넣고 싶은’ 앱솔루트 병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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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 이후 앱솔루트의 아트컬렉션. ① 사진작가 얀 샤우데크(1998) ② 현대미술작가 로즈마리 트로켈(1999) ③ 회화작가 프란체스코 클레멘테(1999) ④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2000) ⑤ 수채화가 베아트리체 쿠솔(2002) ⑥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2003).


기존 마케팅 전략과 아트마케팅이 다른 점은 제품이 아니라 경험을 판다는 것이다. 이는 고객 충성도를 창출해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장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에 따르면 아트마케팅은 특히 가시성(visibility)이 높은 제품군에서 효과가 크다. 이 교수는 “해당 제품을 소비하지 않더라도 그 브랜드를 의식하는 잠재 고객이 필요한 법이다. 이때 가장 고급스럽게 가시성을 높이는 방법이 바로 아트마케팅”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주류 등 유통업계와 패션·자동차업계에서 아트마케팅이 활발한 이유다.

아트마케팅은 브랜드 이미지와 예술가의 비전이 맞아떨어질 때 성공 확률이 커진다. 앱솔루트의 경우 소비자들에게 단순하면서도 창의적인 이미지를 심어 주고 싶어 했다. 그런 점에서 워홀과의 협업은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워홀은 실크스크린 기법을 통해 대중에게 친숙한 코카콜라·캠벨 수프 등의 이미지를 하나의 미술작품으로 승화시킨 예술가다.

하지만 너무 대담한 시도는 오히려 고객을 잃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2000년에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베네통은 18년간 아트디렉터를 맡아 온 사진작가 올리비에로 토스카니를 떠나보냈다. 베네통 광고에 가감 없이 사용된 토스카니 사진은 때때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인종차별·전쟁·기아 등을 주제로 찍은 사진들이다. 이에 공감하지 못하는 소비자들은 베네통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베네통은 자라·H&M 같은 패스트패션 브랜드 등장에 밀려 성장세가 크게 위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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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보르도 와인인 샤토 무통 로칠드가 1945년부터 만든 아티스트 라벨. ① 살바도르 달리(1958) ② 파블로 피카소(1973) ③ 앤디 워홀(1975) ④ 키스 해링(1988) ⑤ 영국 찰스 왕세자(2004) ⑥ 제프 쿤스(2010). [사진 샤토 무통 로칠드 홈페이지]


물론 아트마케팅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다. 기업이 아트마케팅의 개념을 이해하고 예술가를 선정하는 식견을 갖추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앱솔루트는 워홀 이후 키스 해링(1986), 데이미언 허스트(1998), 백남준(2000), 존 레넌 부부(2001) 등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들과 꾸준히 협업을 이어 왔다. 2004년에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스피릿 박물관’을 지어 앱솔루트를 주제로 만든 작품 850여 개를 모아 뒀다. 이 작품들 중 일부는 스웨덴 밖에서 순회 전시를 통해 대중에게 공개하기도 한다. 2011년에는 신진 예술가를 발굴하기 위해 미술상도 따로 제정했다. 큐레이터 출신 아트매니저가 이를 전담한다. 예술가뿐만 아니라 주 소비계층인 젊은 소비자를 붙잡기 위해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아트바를 선보이기도 한다. 앱솔루트 본사의 발레리 추 글로벌마케팅 매니저는 “예술은 미술관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다양한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대중과 친숙하라는 워홀의 유산을 충실히 지켜왔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다양한 아트마케팅이 전개되고 있다. 2007년 매일유업이 당시 서울에서 열린 ‘반 고흐 전시회’를 기념해 우유 패키지에 고흐의 그림을 입힌 적이 있다. 같은 해 LG전자는 신제품 TV 출시 광고에 인상파 화가들의 명화를 등장시켰다. 2011년 신세계백화점이 네오팝 아티스트인 제프 쿤스의 작품 ‘세이크리드 하트’를 전시했을 때 해당 작품을 주제로 만든 목걸이·티셔츠 등이 품절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하지만 대부분 일회성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범상규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국내는 아직 아트마케팅 전문 인력이 적고, 아이디어도 제한적인 상황”이라며 “다양한 층위에서 아트마케팅을 꾸준히 시도해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브랜드 이미지를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아트마케팅은 또 하나의 제품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앱솔루트는 지난달 2일부터 온라인에서 ‘앤디 워홀 아트 익스체인지’도 열고 있다. PC는 물론 스마트폰·태블릿PC를 이용해 그림을 그린 뒤 홈페이지에 올리면 된다. 기업과 고객이 바로 소통 하는 디지털마케팅을 아트마케팅에 접목한 것이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들어온 앱솔루트의 아트마케팅이 대중과 또 하나의 접점을 만들어 내려 하고 있다.

뉴욕=위문희 기자 moonbright@joongang.co.kr

[S BOX] 아트마케팅의 산실 워홀 재단 “로열티로 예술가 육성”

지난달 1일 미국 뉴욕에 위치한 앤디 워홀 재단. 라이선싱 디렉터인 마이클 허먼의 사무실에는 각종 브랜드에서 출시한 워홀 한정판 제품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었다. 허먼은 “재단으로 들어온 로열티는 워홀의 유언에 따라 시각미술 예술가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데 쓰인다”고 밝혔다.

실물 크기의 브릴로 비누 상자와 캠벨 수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워홀의 실크스크린 작품 ‘슈즈’를 그려 넣은 크리스찬 디올의 핸드백도 있었다. 앱솔루트와 같은 주류 브랜드에서 나온 한정판 제품도 눈에 띄었다. 2010년 프랑스 샴페인 브랜드 동 페리뇽이 출시한 앤디 워홀 한정판이 색깔별로 진열돼 있었다. 영국 작가 개빈 터크가 워홀의 ‘자화상’에 감명을 받아 만든 실크스크린 작품을 라벨로 붙인 제품이다. 당시 국내에선 병당 27만원대에 팔려 나갔다. 탄산수 브랜드 페리에도 보였다. 워홀은 83년 페리에 병을 소재로도 그림을 그렸다. 지난해 페리에 탄생 150주년을 기념한 워홀 한정판이 출시된 바 있다.

물론 앱솔루트가 이번에 내놓은 워홀 한정판도 자리하고 있었다. 허먼은 워홀이 앱솔루트로부터 제안을 받았을 당시에 그렸던 수십 종류의 도안을 보여 줬다. 그림 속 병의 형태는 물론이고 브랜드 글씨체며 색채 선택까지 워홀이 고심한 흔적이 엿보였다.

워홀 한정판은 다음주부터 한국에서 만나 볼 수 있다. 가격은 3만원대. 21일부터 서울 통의동 진화랑에서 워홀 한정판 출시를 기념하는 전시회가 열린다.

위문희 기자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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