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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위태롭게 젊은, 우리들의 ‘촐라체’ 박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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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불멸의 ‘은교’ 같은 소설을 써낼 수 있는 건 여전히 살아 있는 순정이 있기 때문이다. 70을 앞둔 그는 죽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쓰고, 도무지 죽지 않는 감수성과 순정 때문에 울고, 긴장감이 죽어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까봐 오늘도 자신을 철저한 고독 속으로 유배시킨다.

지난여름, 독일 본에서 함께 지낸 프랑스 교수의 책상에서 ‘박범신’이라는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오, 오!”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박범신의 소설 <더러운 책상>을 프랑스 드크레센조 출판사에서 출간한 것이었다. 문학을 공부하는 청년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자전적 소설 <더러운 책상>은 존재의 의미를 묻는 소설이다. 성장소설인데도 계몽적이지 않아서 박범신답다. 40권이 넘는 그의 장편소설 중에 내가 가장 아끼는 소설이었으나, 국내에서는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지난봄, 프랑스의 권위 있는 평론가 모리스 무리에가 ‘위대한 한국 작가, 위대한 소설’로 박범신의 <더러운 책상>을 소개한 덕분에 자신도 읽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의 소설이 이국땅에서 새로운 언어로 태어나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걸 작가는 알고 있을까. “이 소설 최고야!” 그가 말했고 “안목이 탁월하군!” 내가 답했다.

소설가 박범신. 그의 소설은 늘 전작을 배반하고 새로운 얼굴을 내민다. 그래서 박범신의 작품세계를 몇 문장으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원소스 멀티유즈(One source Multi use)의 추세가 문화 전반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는 요즘, 나에게 소설을 각색하여 영화를 만들라고 한다면 가장 탐나는 작가가 박범신이다. 그의 소설은 신만 나누어 놓아도 탄탄한 시나리오가 된다. 박범신의 소설은 영화 13편, 드라마 12편, 무용, 노래, 연극, 입체작품 등 다양한 예술 장르로 재탄생했다. 집필관이 있는 논산에서 박범신 작가를 만났다.

문학, 목매달고 죽어도 좋을 나무

책 귀신이랑 떨어져 살아야 사람 된다고, 아버지는 18세 박범신을 계룡산 국사봉으로 보냈다. 아들이 안쓰러웠던 아버지는 딱 한 권 <희곡 시나리오선집>을 이불 보따리에 넣어주셨다. 책 모서리가 다 닳도록 읽었고, 덕분에 박범신은 작가가 되었다.

지독하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훗날 영화화된 소설 <풀잎처럼 눕다>는 고등학교 때 쓴 시나리오를 소설로 옮겨 쓴 것이다. 시골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건 문학밖에 없어서 소설가가 되었다. 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나 얼마 못 버티고 서울로 상경했다. 잡지사 기자, 드라마 더빙원고를 소설로 옮겨 쓰는 일을 하다가 대학으로 돌아갔다. 원광대 국문과에 편입하여 아내를 만났고 졸업 후엔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면서 작가의 삶이 열렸다. ‘여름의 잔해’는 낙방한 원고를 모아둔 박스에 들어가 있었으나, 이를 우연히 발견한 기자가 본심 책상에 슬쩍 올려놓아 당선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당선소감은 비장하고 당돌했다. ‘문학, 목매달고 죽어도 좋을 나무!’

등단 후 매달 소설 600장을 쓰기도 했고, 잡지 3개에 동시연재를 하기도 했으며, 등단 후 10년간 20권의 소설을 출간했다. 문학에 목매달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신들린 작업이었다.

내 아버지와 박범신

열여섯 살, 내가 혹독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을 때 마흔아홉 살 내 아버지는 책을 읽는다는 이유로 서재 밖을 나오지 않았다. 책을 읽고 싶은 건지, 가족들로부터 도망치고자 구석방에 유배지를 만든 건지 모를 일이었다. 나보다 아버지가 위태롭고 불안해 보였다. 나는 오랜 시간 아버지와 불화했고, 이해하기 싫었으나 그를 알고 싶어서, 아버지가 부재 중인 날 비밀의 방에 잠입하여 책상 위의 책들을 훔쳐 읽었다. 한동안은 박범신의 책만 쌓여 있었다. <죽음보다 깊은 잠>을 시작으로 박범신을 만났고, 아버지가 병상에 있을 때 <침묵의 집>을 갖다드렸다. 박범신의 소설 중 최고라 했다. 아버지가 이승에서 읽은 마지막 소설이었다.

대중의 찬미 박수와 엘리트 비평가들의 인민재판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까지는 작가가 축복받은 시대였다. 연예인보다 작가의 인기가 높았다. 그 한복판에 작가 박범신이 있었다. 그의 소설은 영상적 묘사가 탁월한 덕분에 대중성을 동시에 얻는다. 박범신은 대중적 인기작가일 뿐이라는 오해와 비판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대중들의 찬미미사와 비평가들의 인민재판 사이에서 멀미를 겪으며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범신은 예리하고 예민한 사람이다. 다수의 찬미미사보다 소수 엘리트 비평가들의 비판은 그에게 견디기 힘든 상처이자 굴욕이었을 것이다.

“저처럼 대중에게 드러나 있는 사람은 그가 가지고 있는 진실과 떠 있는 소문에 의한 이미지 사이에 깜깜한 오해의 거리감이 있죠. 예술가는 참담한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건 내게 축복이었어요. 나를 긴장시켰기 때문이죠. 내 몸을 추락과 상승, 냉탕과 온탕을 반복해 오가게 하며 나를 긴장시켰기에 상상력의 우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창작력의 에너지였던 셈이죠. 그래서 나는 강력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어요.”

그 가파른 경계에 예민한 박범신이 서 있었다. 오로지 원고지를 메워서 세 아이를 키워야 했다. 매일 쓰지 않았다면 미치거나 자살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경향신문

‘와초 박범신 문학제’에서 독자들과 이야기하며 즐거워하는 박범신 작가. 와초 문학제는 그의 집필관이 있는 논산에서 2년째 독자와 만나고 함께 걷고 노래하는 축제다. /이재형 제공


아버지, 굴욕을 견디는 외로운 짐승

그가 어떻게 그 시절을 건너왔을까, 나의 의문은 <소금>을 통해 해소되었다. 자신의 소금기를 다 빨려버린 이 시대 아버지들의 이야기. 꿈 같은 건 일찌감치 포기한 아버지, 굴욕과 모욕을 견디느라 쓰러진 아버지의 목에 빨대를 꽂고 단물을 빨아먹는 우리들이 읽어야 할 이야기.

“아버지는 슬프고 아름다운 존재죠. 소금기는 존재의 근원이에요. 죽음은 소금기가 다 빠져나가는 것이죠. 아버지가 일사병으로 쓰러졌을 때 아들이 아버지를 간호했다면 살았을 텐데, 아들은 곧 일어나겠지 하고 서울로 떠나요. 소금을 생산하는 아비가 몸뚱이 안의 소금을 챙기지 못해서 죽는 것은 아이러니죠. 많은 아버지들이 자신의 소금을 챙기지 못하면서 새끼들이 잘 빨아먹을 수 있도록 등을 대주고 있어요.”

자본주의가 장악한 시대, 아비의 소금기를 빨아먹는 것쯤이야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 아비는 “물 좀 주소” 외치는데, 핏줄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어떠한 미안함도 없이 아버지의 목에 빨대를 꽂는다. 과연 윤리적인가? 소설은 우리에게 묻는다.

암 선고를 받은 명우는 목에 빨대가 꽂힌 ‘아버지’라는 삶을 버리고 가출하고, 딸은 그를 찾아 헤맨다. 내 아버지도, 지금 등짐을 지고 걸어가는 모든 아버지들도 가끔은 집을 버리고 가출하고 싶었으리라. 쓸쓸하고 눈물겨운 아버지의 모습은 그의 글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나는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책상에서 훔쳐 읽던 소설을 통해서 내 아버지도 오욕칠정을 가진 남자였구나, 굴욕을 견디고 욕망을 삼키고 목에 빨대 꽂힌 채 쓰러져 죽은 게 내 아비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글을 읽는 동안, 나는 수도 없이 집 나간 아버지를 찾아 나서고, 아버지를 만나고 울고 화해해야 했다.

‘아버지는 또 속으로 저승사자를 향해 외치고 있었을 것이다. 난 지금 못 가, 저 어린 것 때문에 못 가, 나는 아버지야, 애비노릇 저것 클 때까진 해야 해….’ 산문집 <남자들 쓸쓸하다>에서 만난 문장을 안고 며칠 밤을 운 적도 있었다.

상상력의 불이 꺼지면, 박범신은 사라진다

1993년, 그는 ‘상상력의 불은 꺼졌다’는 글을 발표하고 절필선언을 한다. 대중적 인기와 기득권이 좋았으나 어느 순간 기득권을 버리고 죽어서 새로 태어나야겠다는 절실함이 생겼다.

“한 인간으로서의 나, 작가로서의 나, 독자들이 이미지로 갖고 있는 소문으로서의 나는 각각 너무 멀다고 느꼈지요.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 나 사이도 그러했고요. 너무 고독했어요. 베스트셀러 시장을 다 버리고 새로 태어나고 싶었어요. 장편 <외등>을 연재하다가 절필선언을 하고 3년 동안 용인 외딴집에 은거해 오로지 혼자 지냈어요. 독자들이 나를 잊기 바랐던 시기였고, 유명작가로서 얻은 기득권이 해체되길 기다린 시기라고나 할까요. 절필은 작가로서 일종의 자기죽음의 선언이었지요, 나날이 죽고 싶었고 새로 태어나고 싶던 시기였지요.”

교수직을 박차고 나오기도 했다. 히말라야에 가서 3개월을 걸어다녔다. 몸무게는 50㎏까지 내려갔다. 사서 하는 고통이지만 나를 긴장시켜야만 글을 쓸 수 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 자신을 긴장시키기 위해서는 늘 변화를 시도해야만 했다.

“나를 긴장시킬 수 있는 건 모조리 다 해봤으니 이제 안 해 본 건 이혼밖에 없는 거예요. 원고를 쓰다가 새벽에 침실에 내려가서 자고 있는, 40년을 함께 산 아내 얼굴을 들여다보았어요. 함께 오래 산 남편이 아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건 슬픈 일이에요. 이 여자와 이혼한다는 생각을 하니 울컥 눈물이 나더군요. 젊은 시절 내가 사랑한 여자는 오간 데 없고 그 얼굴에는 나와 함께한 41년 인생 동안 잃어버린 젊음과 열망…, 잃어버린 것만 가득했어요. 뜨겁게 그 여자를 안아주고 싶었어요. 저처럼 감상적이면 이혼할 수가 없어요.”(웃음)

차라리 소설을 버리는 게 쉽겠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 고향 논산으로 내려갔다. 문학적으로 더 긴장하기 위해서 철저히 고독하고 거친 환경으로 자신을 유배시켰다.

경향신문

‘와초 문학제’에서 박범신 작가와 박상미 필자가 대담하고 있다./이재형 제공


강남 룸싸롱엔 ‘은교’가 산다… 소설 <은교>에 대한 오해

소설 <은교>. 17세 소녀 은교는 과연 그에게 여자였을까? 소설을 안 본 독자들은 노교수가 은교를 사랑했다고 오해한다.

“은교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죠. 우린 모두 마음속에 은교를 품어야 해요. 마음속에 꿈꾸는 것, 그리운 것, 진선미를 갖춘 완전한 아름다움, 그게 다 은교인 거죠. 내겐 좋은 소설이 은교예요. 은교는 영원히 불멸하는 17세예요. 영원히 죽지 않는 가치가 은교입니다. 노인의 욕망은 죄가 아니에요. 그건 주자학이 전파한 바이러스죠.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걸 노욕이라 하지 마세요. 나는 꽃이 아름다운 걸 느끼는 데 50년이 걸렸어요. 은교를 꺾어서 가지고 싶은 게 아니라 바라보고 싶은 것, 이게 은교의 본질이죠. 내 소설을 오해하지 마세요.”

소설 속에 젊은 서지우와 노교수 이적요의 노트는 있지만 은교의 노트는 없다. 은교는 현실의 존재가 아니라 관념이자 불멸하는 꿈의 존재인 것이다.

“<은교>를 쓴 지가 5년이 넘었습니다. 영화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은교가 일종의 보통명사처럼 회자되고 있어요. 강남의 룸싸롱마다 ‘은교’가 있고, 여자를 만나면 성희롱처럼 ‘너 내 은교 해줄래?’ 말하고 다니는 남자들도 많대요. 내 작품이 문학작품으로 비판받고 회자되는 건 환영하지만, ‘은교’를 오독할 거라면 차라리 잊어주세요. 늙어가는 노인의 슬픔, 그렇지만 그 시간에 순응하고 싶지 않은 반역의 마음이 담긴 소설이란 걸, 독자들은 알 것입니다.”

박범신의 나이와 호기심은 함께 자란다

2005년, 네이버에 소설 <촐라체>가 연재되기 시작했다. 작가는 박범신이었다. 인터넷 소설은 저급하다는 인식이 팽배하던 시절이었고, 문학성을 인정받은 작가가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없었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육체적 나이가 높아질수록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도 함께 자라는 듯했다. 출판사를 설득하여 종이책과 전자책을 동시에 출간하는 모험을 처음으로 시도한 것도 박범신이었다. <은교>를 출간할 때의 일이다. 그의 시도는 늘 성공했다. <촐라체>는 100만명 이상의 독자들이 읽었고, 그 후 인터넷 소설 쓰기는 보편화됐다.

“<촐라체>를 연재할 때 후배들이 말렸어요. 무절제하게 달리는 악플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냐, 작가로서 이미지가 손상될 것이다…. 악플은 처음부터 걱정 안 했습니다. 평생 부도덕한 일을 한 적이 없고, 악플이 있다면 다 박범신의 문학에 대한 거겠죠. 문학에 대해서는 어떠한 비난도 감수해야 되는 것이 작가죠. 인터넷 글쓰기가 저급하다는 인식은 저한테 전투력을 배가시켰죠. 내가 인터넷 상에서 모범적인 글쓰기를 한 번 해볼 게. 거기가 쓰레기통이라면 내가 들어가서 쓰레기를 줍겠다고 생각했죠. 작가는 독자가 없으면 죽습니다. 대중들과 만날 수 있는 좋은 채널이 있다면, 전향적으로 받아들여야 문학이 소외되지 않아요.”

감수성이 살아 있다는 것, 천당과 지옥을 왕래하는 것

“한 번도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없는 인생이었어요, 환경적으로 불행해서가 아니라 내 감수성에 비치는 세계는 여전히 불온하고, 광기로 가득 차 있고, 상처투성이에요. 내가 행복해진다면 무엇을 동력으로 글을 쓰겠어요. 작가는 자신이 사는 시대가 가장 위험한 시대라고 가슴 아프게 느끼는 존재지요. ‘좋은 소설이 나의 은교야, 소설은 나의 촐라체야, 더 좋은 소설을 써 봐야지’ 하면서 우기고 가는 거지요.”

다음 소설은 어떤 이야기를 써보고 싶은지 그에게 물었다.

“<은교>를 써서 성공했으면 다음에 비슷한 스타일로 <금교>를 써야 장사가 좀 되죠.(웃음) 그런데 난 <소금>을 썼습니다. 전혀 다른 작가가 쓴 것 같은 소설이죠. 나는 끝없이 내가 쓴 작품을 배신하려고 노력하고, 독자를 어떻게 깜짝 놀라게 할까 고민합니다. 아직도 쓰지 못한 가슴속 이야기가 많아요.”

‘사랑의 끝에는 무엇이 있어요?’

어느날 한밤중에 딸에게서 온 문자다.

“뭔가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입은 듯했어요. 밤새 잠을 잘 수 없었죠. ‘사랑에 완성이 있겠니…’라고 답장을 했지만 밤새 걱정을 했지요. 아침에 아내에게 물어봤어요. 당신이라면 뭐라고 답했겠느냐고. 그랬더니 아내가 단호하게 말했어요. “사랑의 끝에는 사랑이 있지!” 사랑의 끝에 사랑이 있다고 믿는 여자는 어떤 어려움도 다 이겨내는 거 같아요. 사랑에 있어서 단 한 번도 아내를 이겨본 적이 없어요. 자궁을 가지지 못한 자의 한계라고 할까요? 자궁은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어요. 사랑을 지키고 희망을 접지 않는 것은 남자들이 이를 수 없는 경지죠.”

이룰 수 없을지라도 가슴속에 ‘촐라체’ 하나 품고

그의 집필관이 있는 논산에서는 2년째, 독자와 작가가 만나서 함께 걷고,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와초 박범신 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지난 18일, 작가와의 대담을 맡게 된 건 내게 남다른 의미였다. 열여섯 살의 나와 마흔아홉 살 아버지, 늙지 않는 박범신이 다시 모였다.

늦은 밤, 문학축제는 끝났지만 작가도 독자들도 차마 아쉬워서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4일간 작가와 함께 논산의 아름다운 산천을 걷는 ‘소풍’ 행사부터 공연과 작가와의 대담으로 꾸며진 문학제, 집필관 오픈하우스까지 5일간 논산에 머문 독자들도 여러 명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건 문학축제를 바라보는 작가의 마음은 어떨까.

“민망하고 부끄럽지요. 안 하고 싶었는데 고향사람들의 권유를 뿌리치기 어려웠어요. 논산 집을 공개하는 오픈하우스 행사에서 독자들이 작가의 서재를 방문하는 건 특별한 경험이 될 테니까 저도 좋아요. 논산 길을 함께 걷다가 독자끼리 만나서 결혼을 하기도 해요. 작년 걷기행사 때 만난 처녀 총각이 결혼을 약속했다고 이번에 인사를 하더라고요. 정말 기뻤어요. 내가 주례를 서줄 거예요. 육체적 나이듦이 주는 흐뭇함이란 게 있어요.”

그에게 꼭 묻고 싶었던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젊음은 아름답지만 늘 위태롭습니다. 저희들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젊음은 어느 시대든 불안한 거지만, 젊기 때문에 그것을 뛰어넘을 에너지도 함께 부여받았다고 생각해요. 자기정체성만 확인한다면 벽을 넘어갈 수 있는 에너지를 자기 내부에서 끌어낼 수 있다고 믿어요.”

집에 돌아온 나는, 다시 촐라체를 펼쳤다.

촐라체는 ‘산’이며 ‘꿈’이고, 살아 있는 ‘사람’이며 온갖 카르마를 쓸어내는 ‘커다란 빗자루’이다. 예컨대, 내겐 평생 ‘문학’이 피켈 하나 들고 거대한 빙벽을 실존적으로 올라야 되는 ‘촐라체’였고, 앞으로도 아마 죽는 날까지 그럴 것이다…. 이 유한한 인생에서 참으로 위로가 되는 것은, 욕망에 따른 ‘성취’가 아니라 이룰 수 없을지라도 가슴속에 ‘촐라체’ 하나 품고 사는 일이 아니겠는가.(본문 11쪽)

위태롭게 젊은, 작가 박범신. 70을 앞둔 작가가 뿜어내는 강력한 에너지의 원천은 죽음과의 투쟁이다. 그는 죽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쓰고, 도무지 죽지 않는 감수성과 순정 때문에 울고, 긴장감이 죽어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까봐 오늘도 자신을 철저한 고독 속으로 유배시킨다.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나기에 도무지 늙을 시간이 없는 사람 박범신- 당신은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의 영원한 촐라체!

<박상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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