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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개헌, 분권형 대통령제가 대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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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은 불가피한 시대적 요청인가, 개헌을 한다면 어떻게 바꿀 것인가. <주간경향>이 국회의원, 학자, 법조인 등 각계 전문가 30인에게 물어봤다.



개헌 논의가 정치권을 휩쓸고 있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개헌 논의 여부를 둘러싸고 정면 충돌하는가 하면 여당과 야당의 주요 대권 후보들도 앞다투어 개헌 필요성을 제기하고 나섰다.

여야 국회의원 70여명은 지난 2월 1987년 체제의 산물인 대통령 5년 단임제를 시대에 맞게 손질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개헌 추진 국회의원 모임’을 발족하기도 했다

과연 개헌은 불가피한 시대적 요청인가, 개헌을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주간경향>은 개헌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를 진전시키는 차원에서 국회의원, 학계, 법조계 등 각계 전문가 30인에게 개헌에 대한 의견을 들어봤다. 전화 면접과 종이 설문 방식을 병행했다.

국회의원-학자ㆍ법률가들 ‘분권형’ 엇갈려

전문가들은 대체적으로 개헌의 필요성에 공감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국회의원들의 경우 권력구조와 관련, 대체로 분권형 대통령제를 지지했다. 반면, 학자와 법률가들은 분권형 대통령제도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특효약은 아니라는 입장이 다수였다. 아직은 개헌 방향을 둘러싸고 사회적 합의가 정해지지는 않은 듯했으나,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의원들의 의견이 일치한 지점은 대통령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는 필요성이었다.

우윤근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개헌추진 국회의원 모임 야당 간사)는 “제왕적 대통령제로 인해 국회가 대권 고지를 향한 베이스캠프가 되고, 여야의 대립과 갈등이 반복되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서기호 정의당 의원도 “막강한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제와 승자독식의 정치체제로 인해 증오와 적대의 정치가 만연하고 민생이 소홀해졌다”며 개헌 필요성을 강조했다.

권력구조 개편 방향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분권형 대통령제를 선호하는 목소리가 다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4년 중임제와 내각제를 지지하는 답변도 적지 않았다.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개헌추진 국회의원모임 고문)은 4년 중임제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을 주장했다. 그는 개헌이 될 경우 “헌법에 주어진 권한대로 대통령과 총리가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권력의 집중으로 인한 문제점들을 해소할 수 있고, 효율적인 국정운영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학자들이나 법률가들은 특정 정치체제가 옳다는 답변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최태욱 한림국제대 국제학과 교수는 분권형 대통령제가 꼭 정답인지에 대해서도 숙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재의 양당제 구조를 놔둔다면 헌법을 바꾸더라도 기득권이 유지되는 승자독식 구조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최 교수는 “영국의 마거릿 대처는 12년 동안 철의 여왕으로 불리는 제왕적 총리였다. 집권당 1인자가 대처처럼 카리스마가 있다면 당, 국회, 행정부도 장악할 수 있다”며 “개헌을 한다면 이념과 가치 중심으로 다당제가 될 수 있는 선거제도 개혁이 같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10월 초 CBS 여론조사 때만 해도 4년 중임제를 지지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개헌 찬성 의원 231명 중 105명이 4년 중임제 개헌을 지지했고, 분권형 대통령제 지지자는 94명이었다.

그러나 CBS 여론조사 이후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방안이 많이 논의됐다. 10월 6일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권의 개헌 논의에 대해 “개헌 논의 등 다른 곳으로 국가 역량을 분산시킬 경우 또 다른 경제 블랙홀을 유발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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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6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정치권의 개헌 논의에 반대 입장을 피력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제왕적 대통령 막으려다 제왕적 총리 우려

이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10월 16일 중국 상하이에서 기자들과 만나 작심한 듯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로의 개헌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했다. 귀국 후 김 대표는 박 대통령에게 사과했다.

한편, 야당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대통령 중임제의 경우 대통령이 단기 실적에만 매몰되는 단점은 보완할 수 있지만, 지나친 권력집중 문제는 해결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주간경향> 조사에서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지지한 답변이 14명으로 개헌에 찬성한 23명 중 절반을 넘었다. 분권형 대통령제가 대세로 떠오르고 있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물론 분권형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분권형 안에서도 미세한 차이점이 있다.

현재 정치권에서 주로 논의되는 분권형 권력구조의 모델은 프랑스와 독일, 오스트리아다. 분권형 권력구조는 순수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대통령제에 가까운 이원집정부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경우 대통령이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한 의원내각제 국가로 일반적으로 분류된다.

물론 정치권이 두 체제를 엄밀하게 구분하는 건 아니다. 우윤근 원내대표의 경우 평소 독일식 정치체제로의 개헌을 주장했지만, <주간경향>에 보내온 답변서에는 “국민 직선 분권형 대통령제”를 지지한다고 답했다. 독일에도 대통령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김무성 의원이 언급한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도 실질적으로는 의원 내각제에 가깝다.

프랑스와 독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대통령의 존재감이다. 애초 프랑스는 간선제로 선출되는 상징적인 대통령이 있었으나, 1950년대 알제리 독립전쟁 이후 제5공화국 개헌을 통해 상대적으로 강력한 대통령이 탄생했다. 대통령은 직선으로 선출되며, 의회 해산권, 각료 지명권의 권한을 갖는다.

다만 프랑스의 경우 대통령과 총리가 다른 정당에 소속되어 대립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김하중 전남대 교수는 “프랑스에서 (5공화국) 개헌 직후에 그런 일이 생겼다. 외국 정상회의에서 대통령과 총리가 모두 프랑스를 대표해 간 적이 있다”고 말했다.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의 경우 1997년부터 5년간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총리와 동거했다. 오히려 총리의 권한이 더 강해 노동시간 단축 등 시라크 대통령이 반대하는 정책들이 국회를 통과하기도 했다.

반면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이원집정부제에 가까운 정부 형태를 가졌다가 나치 집권기를 겪은 이후 대통령은 상징적인 존재로 격하됐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사실상 의원내각제 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두 나라의 차이점은 독일은 대통령을 간선으로 뽑는 반면, 오스트리아는 국민직선제라는 점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다수당의 대표가 총리직을 맡고, 총리가 국가의 실세라는 점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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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권 지지자도 독일ㆍ프랑스식 등 10인10색

국회의장 직속 헌법개정자문위원을 지낸 이건개 변호사는 ‘한국적 분권형 대통령제’를 제안했다. 6년 단임제의 분권형 대통령제 안이다. 이 변호사는 “한국의 현실에서 순수한 내각제는 불가능하다. 또한 한국은 외교·안보가 중요하기 때문에 6년간 내정에 초연하게 하는 방안으로 6년 단임제가 적절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소수지만 현행 헌법으로도 충분히 분권형 대통령제를 구현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전원책 변호사는 “궁극적으로 대한민국도 내각제 국가가 되어야 한다”면서도 현재의 개헌 논의에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분권형이나 내각제 개헌이 될 경우 의회에 더 많은 권력이 주어지는데, 의원들의 자질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전 변호사는 “현행 헌법은 순수 대통령제에 가까운데 총리직을 규정해서 모순이 있다. 차라리 총리 대신에 부통령을 신설해 순수 대통령제에 가깝게 하는 게 낫다”며 “현행 헌법도 독재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등 장점이 많다”고 말했다.

심지어 전 변호사는 “현행 헌법은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의견을 정리하면 이렇다. 현행 헌법 86조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임명하기 전에 국회의 동의를 얻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현실에서는 대통령이 지명하는 인물이 총리가 되지만, 다수당 의원들이 하기에 따라서는 다수당이 원하는 사람을 국무총리로 앉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 변호사는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은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말이고, 대통령을 무소불위의 제왕으로 만든 게 바로 정치인들, 특히 현 집권당 정치인들”이라며 “헌법대로라면 대통령이 가진 건 인사권뿐이고,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방식은 국회가 총리를 뽑는 내각제 방식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이재교 변호사도 비슷한 입장이다. 그는 “현재 개헌 논의에서 대통령 권한이 너무 많다는 의견이 나오는데, 국회가 헌법상 제 역할만 해내면 큰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시키는 것보다 의회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방향의 개헌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헌법이 1987년생인데 세계적인 기준으로 보면 아직 신제품이다. 헌법은 함부로 바꾸면 안 되고,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법률이나 시행령으로 바꿔야 한다”며 “국민 피부에 와닿지 않는 지금 시점보다는 차기 대선 후보들이 부각되는 시점에 개헌 논의를 하는 것이 더 원만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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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견제기능만 작동하면…” 개헌 무용론도

개헌 반대하는 입장인 조경태 새정치연합 의원은 “19대 국회는 개헌을 논의할 자격이 없다”고 답했다. 조 의원은 설사 개헌을 하더라도 현행 대통령제를 유지하는 선에서 4년 중임제를 해야 한다고 답했다.

전원책 변호사는 “국회의원들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분권형 대통령제나 내각제로 권력구조가 바뀔 경우, 청와대가 아닌 정당에서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

전 변호사는 “다른 내각제 국가들은 야당 시절부터 섀도 캐비닛(그림자 내각·정권을 잡을 경우를 예상한 국무위원 후보군)을 구성한다. 지금 여야를 막론하고 내각을 구성할 정도로 경륜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 의문”이라며 “국회의 수준이 오를 때까지는 내각제로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개헌 논의가 정치인끼리의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는 “헌법 개정은 헌법과 현실 사이에 간극이 생기고 국민 다수가 원할 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국민들은 정부 형태에 큰 관심이 없다. 이번 개헌 논의는 정치인들을 위한 정치인들의 게임”이라고 말했다.

신인수 변호사는 개헌 이슈가 오히려 중요한 민생 현안을 가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개헌 논란 때문에 모든 이슈가 가려지고 있다. 비정규직 기간을 3년으로 늘리겠다는 등 직접적으로 노동자들의 삶과 연관된 문제들이 나오고 있는데, 개헌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신 변호사는 “현행 헌법 자체가 상당히 잘 만들어진 것이며, 운영을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라며 헌법 개정에 반대의사를 밝혔다.

하승수 변호사(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는 개헌 자체는 필요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하 위원장은 “현재의 개헌 논의는 정치권에서 자기들끼리 어떻게 권력을 나누느냐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어떻게 더 많은 권력을 돌려줄 수 있는지에 관한 논의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하 변호사가 제시하는 것은 직접민주주의 강화다. 그는 “현행 헌법에서는 대통령만 국민투표를 부칠 수 있다.0 0우리 헌법에는 직접민주주의에 관한 내용이 없는데, 스위스처럼 국민 발의를 통해 국민투표를 할 수 있게 열어놓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하 변호사는 이왕 시작된 개헌 논의가 시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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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권력 분배보다 국민ㆍ지방과의 분권 중요

아이슬란드 개헌이 한 사례다. 아이슬란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국가쇄신 차원에서 개헌이 논의됐다. 아이슬란드 정치권은 개헌과정을 국민들에게 공개했다. 인터넷으로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물론, 일반인으로 구성된 헌법심의회가 개헌안을 직접 심의했다. 2년간의 숙의 끝에 국부가 함부로 외부에 유출될 수 없게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새로운 헌법이 국민투표를 통과했다.

하 변호사는 “87년 헌법이 나름 민주화 운동의 결과인데, 국민의 참여가 보장되는 방식으로 개헌을 하지 않으면 야합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조정 변호사(지방분권운동 대구경북본부 기획위원장)는 중앙권력 내부의 권력 분할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분권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 변호사는 지방분권 강화를 위해서는 대통령이 아닌 국회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며 프랑스식 양원제를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 등의 사례를 보면 하원은 지금처럼 국민이 직접 대표들을 뽑는다. 반면 상원은 일종의 간접선거 비슷한 방식으로 각 지역의 대표성을 갖는 사람들이 선출된다”고 말했다. 조 변호사는 “현행 헌법은 중앙정부만이 입법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상원이 설치되면 지방의 관점에서 입법을 할 수 있는 창구가 열린다”고 말했다.

몇몇 전문가들은 지방분권 강화 역시 대통령과 국회에 집중된 권력을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방안이라고 주장한다.

하승수 변호사는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더 가까운 곳에 있는 지방정부에 더 많은 권력이 분산되어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현행 헌법에서는 100개가 넘는 조항 중 지방정부를 규정하는 조항이 2개밖에 없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검사 출신 김경진 변호사는 지방분권 강화의 일환으로 국가권력의 상징인 검찰과 경찰의 권한을 상당 부분 지방정부로 옮기는 안을 제시했다. 미국처럼 지방정부에 검찰권과 경찰권을 이양하자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한다 하더라도 제왕적 대통령 대신 국회의원들이 소통령적 권력을 행사할 위험성이 있다”며 “국가권력을 지방에 분산시키거나 교육자치를 고등교육까지 확대하는 방안 등이 오히려 정치구조의 폐해를 줄이는 데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백철·윤호우·권순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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