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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연봉 수십억 은행장님들, 몸값 하셨습니까… 금융업계 CEO 고액 연봉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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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경영 결과가 나쁘면 (나는) 월 1원의 봉급자로 전락하고, 대신 훌륭한 성과를 거두면 명예가 뒤따를 것이다.”

1998년 외환위기 직후 주택은행(국민은행 합병 전신)의 신임 은행장에 취임한 고(故) 김정태 행장은 유례없는 ‘월급 1원’을 선언했다. 대신 주택은행 40만주를 ‘스톡옵션’으로 받았다. 은행이 이윤을 낸 만큼 돈을 받아가겠다는 의미였다.

당시 금융업계는 김 행장의 이 같은 선택을 두고 비상식적인 행보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김 행장의 경영능력은 국민·주택은행 통합 성공과 주가에서 드러났다. 통합출범 당시 1주당 4만원 정도에 불과하던 국민은행 주가가 재임기간 내에 9만원 가까이로 치솟았다. 3년의 재임기간이 끝난 뒤 스톡옵션 행사를 통해 그가 ‘1원’의 월급 대신 얻은 시세차익은 140억여원에 달했다. 그는 이 중 70억원을 고아원 등 사회복지시설에 기부했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김 전 행장의 활약이야말로 지금 금융권 CEO(최고경영자)들이 보여줘야 할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지금의 금융업계 분위기는 딴판이다. 속된 말로 ‘배부른 돼지’가 있을 뿐 침체에 빠져 있는 업계에 새 활력을 불러넣을 ‘지략가형 CEO’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글로벌화와 수익성 강화에 실패하고도 국내 은행권 CEO들은 ‘연봉 극대화’에만 골몰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향신문

■ 일본보다도 많이 받는 국내 은행권 CEO

2001년 금융지주 체제가 처음 출범할 당시 지주와 시중은행 은행장의 평균 연봉은 3억~4억원이었지만 불과 10여년 만에 이들의 평균 연봉은 20억원대를 넘어섰다.

고 김정태 행장과 동명이인인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지난해 기본급으로 9억원을 받고, 3년 뒤 경영실적을 평가해 현금으로 지급하는 성과연동주식(100% 지급 기준) 한도 3만9580주가 붙어 최대 26억여원을 받아갈 수 있게 됐다.

한동우 신한금융그룹 회장 역시 기본급·상여금 14억원에 성과연동주식 한도 3만40주를 더해 예상되는 연봉이 28억여원에 달한다.

반면 일본 최대 은행인 미쓰비시UFJ 회장의 지난해 연봉은 스톡옵션을 합쳐 1억2000만엔(약 12억원)에 불과했다. 미쓰비시UFJ는 순이익이 2008년 2569억엔(2조5000억원)에서 지난해 9848억엔(9조8000억원)으로 4배 가까이 증가했지만 회장의 연봉은 한국 은행권 CEO의 절반에도 못 미친 셈이다.

세계 4위 은행인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 CEO 연봉과 비교해도 한국의 연봉은 ‘여전히 많다’는 평가다.

지난해 순이익이 114억달러(약 12조원)를 기록한 BoA는 CEO 연봉으로 스톡옵션을 합해 1400만달러(148억원)를 지출했다. 반면 순이익이 1조원 안팎에 불과한 한국 CEO들은 평균 20억~30억원의 연봉을 받고 있다.

때문에 금융업계 안팎에서는 “성과를 낸 만큼 받아간다면 국내 CEO들은 연봉을 도로 뱉어내고 나가야 할 판”이라는 소리가 나온다. 국내 은행 가운데 글로벌 50대 은행에 포함된 곳은 한 곳도 없다. 그러나 CEO들의 연봉은 세계 최고 수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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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 “복잡한 지주사 회장 업무 감안해야”

그러나 국내 4대 금융지주를 비롯한 은행업계는 고액 연봉 논란에 대해 “많이 받는 편이 아니다”라며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이것저것 다 떼다 보면 실제 손에 들어오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데 액수가 지나치게 부풀려졌다는 것이다. 또 금융지주 CEO는 리더십을 발휘해 각 계열사별로 적절한 장·단기 계획을 세워야 하고,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도 이익추구를 해야 하는 만큼 수십억원의 연봉은 역할에 상응하는 액수라는 주장이다.

신한금융지주의 경우 성과연동주식으로 받게 되는 돈을 제외하고 지주 회장이 1년에 현금으로 받는 보수는 12억원 수준이다. 여기에는 급여와 상여금, 업무추진비가 포함된다. 다른 지주 회장들도 3~5년간의 경영실적에 따라 확정 지급되는 성과연동주식을 제외한 금액은 이와 유사하다.

일부 지주사는 말 그대로 일을 하는 과정에서 지출되는 비용인 ‘업무추진비’가 CEO 연봉에 합산되기도 한다. 한 금융지주의 경우 업무추진비가 연봉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0~40% 수준이다. 거래처나 대정부 관료를 상대로 한 식사비, 경조사비 등의 명목으로 1년에 3억~4억원이 지출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세금을 떼고 CEO의 손에 들어가는 돈은 많아야 8억~9억원 수준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성과연동주식이 포함되지 않은 액수다.

지주사들은 “이 정도 수준이면 많은 액수라고 지적하기는 어렵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금융지주체제에서 은행, 증권, 보험, 카드 등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 회장의 연봉치고는 많은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지주사 회장은 단순히 은행 업무만 보던 때와 달리 기업 간의 인수·합병(M&A)에서부터 각 계열사의 차기 플랜을 모두 계획해야 하고, 경제전망에 따른 리스크 관리까지 철저히 세워야 하는 만큼 현재 받고 있는 연봉이 많은 액수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복잡한 국내외 경제상황 속에서 지주 내 계열사의 흑자구조를 만들기 위해 지주 회장이 감당해야 할 몫이 많은 만큼 20억~30억원(성과연동주식 포함) 수준의 연봉은 많은 게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실제 경영실적 등을 따져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금융감독원이 지난 9월 발표한 ‘2014년 상반기 은행지주회사 경영실적’을 살펴보면 업종별 자산 구성에서 은행이 여전히 평균 83%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금융투자 및 보험, 비은행 부문이 지주회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각각 5.8%, 5.3%, 4.1%에 불과하다. 업종별 이익구성 역시 은행(56.9%)이 가장 높고, 비은행은 20.4%에 불과하다. 금융투자나 보험 역시 9.9%와 3.4%밖에 안된다. 굳이 지주회사 CEO에게 수십억원을 지불할 이유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한국의 지주회사는 덩치만 큰 은행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은행 의존도가 높은 국내 지주회사에서는 CEO가 리스크를 감수하며 과감한 투자를 할 환경 자체가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CEO의 역할이 크지 않은 지금의 지주회사 체제에서 CEO가 굳이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자리를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 고액 연봉은 회장·사외이사의 합작품

일각에서는 “CEO의 고액연봉은 회장과 사외이사의 공생관계가 빚어낸 결과”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기존에 사외이사가 있더라도 신임 회장에게 연임 결정권한이 있다보니 사외이사들이 저마다 회장에게 잘 보이려 연봉 및 성과급에서도 후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금융감독원의 조사결과를 보면 애초에 CEO의 성과보수를 실적 하락과 관계없이 70~80%까지 보장하도록 프로그램을 짜놓은 지주회사도 있다.

영업실적이 개선됐을 때는 성과보수가 비례해 증가하는 반면, 실적 하락 시에는 이에 비례해 떨어지지 않도록 총자산이익률(ROA), 주당순이익(EPS) 등 계량지표의 성과목표를 전년도 실적보다 낮게 잡아 실적이 떨어지더라도 70~80% 수준의 성과보수가 보장되도록 한 것이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회장이 사외이사를 결정하고, 그 사외이사가 회장을 뽑는 구조가 문제”라고 말했다. 사외이사의 임금을 회장이 결정하고, 사외이사가 회장의 임금을 결정하는 상황에서 말로만 ‘독립이사’일 뿐 사외이사는 ‘거수기’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직원은 노사 협상을 통해 임금이 결정되는데 회장과 사외이사는 그 자체가 최고의결기관”이라며 “대부분의 사외이사가 경영진의 측근으로 구성돼 있고, 실무진조차 이사회가 지시하는 대로 (연봉과 관련된 안을) 짜서 올리는 상황이어서 고액연봉은 공생관계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꼬집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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