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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J Report] 경기부양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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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용 드러난 역대 정권 ‘부양책’

카드대란·증시안정·내수살리기 …

가계대출 급증하고 신불자 양산

최경환 부총리가 쏟아낸 정책도

인위적 경기부양 역효과 대비해야

지금은 까맣게 잊혀진 LG카드. 2003년부터 거듭 부도위기를 맞은 끝에 2006년 말 신한금융지주에 인수돼 간판을 내린 LG그룹의 핵심 금융계열사였다. 사달의 계기는 정부의 공격적인 경기부양이었다. 구조조정 여파로 실업자가 쏟아지자 정부는 대출 규제 완화를 비롯해 소비 진작에 필요한 수단을 총동원했다. 은행과 카드사들은 경쟁적으로 고객 확보에 나섰다. 행인을 대상으로 한 길거리 카드 발급이 허용되고 카드론(카드로 대출)으로 카드값을 갚는 악순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2002년 4월 ‘카드버블’을 경고했지만 후유증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신용불량자가 400만명에 육박하고 개인 파산이 줄을 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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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서울올림픽 직후 한국은 3저 호황(저금리·저유가·저달러)이 막을 내리면서 급격한 경기 둔화에 직면했다. 실물 경제의 악화는 곧 바로 증시 침체로 나타나 주가가 연일 곤두박질쳤다. 정부는 89년 12월 12일 증시안정화조치를 발표하고 증시부양에 나섰다. 시중은행을 통해 대형 3개 투자신탁회사(대한투자·한국투자·국민투자)에 지원된 돈은 2조7000억원. 당시 70조원가량이었던 증시 규모에 비하면 ‘돈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은행이 돈을 대줬으니 발권력을 동원한 셈이었지만 결과는 허탕이었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여서 이 돈을 모두 투입한 뒤에도 주가는 한 동안 계속 곤두박질쳐 대책 발표 전보다 30% 넘게 하락했다.

‘카드로 빚 돌려막기’·‘은행 돈으로 증시 띄우기’…. 이들 정책의 공통점은 정부가 경기를 인위적으로 띄우려다 극심한 부작용과 후유증에 시달렸다는 점이다. 기업 이익 증가와 가계 소득 증대 같은 실물 경제의 뒷받침 없는 경기부양은 자칫 재정이나 금융 같은 정책수단만 허비하고 국민에게 돌이킬 수 없는 고통만 안겨준다는 교훈을 남겼다.

이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최경환 경제팀의 경기대응에도 반면교사가 된다. 확장적 재정정책과 역대 가장 낮은 기준금리(2.0%)를 동원해 경기부양에 나섰는데도 약발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어서다. 증시와 주택시장이 잠시 꿈틀댔지만 경기 회복의 핵심 바로미터인 투자와 소비는 여전히 싸늘하다. 이는 그동안 쏟아놓은 경기부양책을 뒷받침할 만한 구조개혁 조치가 병행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단기적 경기부양에만 매달려서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지난 20년여 년 간 일본이 극명하게 보여줬다. 일본은 90년대 초반 거품경제 붕괴 이후 재정을 확대하고 금리를 낮췄지만 근본적인 구조개혁에 실패해 장기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은 “국내에서도 김영삼 정부 이후 역대 정부가 구조개혁 없이 경기부양에만 매달리는 바람에 성과가 오래 가지 못했다”며 “이번에도 지금처럼 하면 다음 정부에선 (후유증으로) 상황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왜 그런지는 1980년대 말, 90년대 말, 2000년대 초 역대 정부의 경기대응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먼저 소비가 부진하다는 측면에서 이번과 상황이 비슷한 카드대란 때를 보자. 당시 김대중 정부는 상시 구조조정과 실업 증가로 극도로 부진했던 내수를 살리는 수단의 하나로 소비 활성화에 나섰다. 집권 기간 중 여덟 차례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고 대출 규제를 완화해 이를 뒷받침했다.

경기는 회복세를 탔다. 강력한 기업 구조조정으로 국내 기업의 체질이 한층 강화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과도한 소비 진작은 깊은 후유증을 남겼다. 가계대출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신용불량자가 양산되고, 수도권 집값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는 뒤늦게 2002년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을 도입해 돈줄을 죄었지만 저금리 기조까지 겹치면서 대출 광풍을 차단하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는 사실상 5년 내내 이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세금폭탄으로 불렸던 종합부동산세를 2005년 도입하고, LTV에 이은 대출 규제의 2중 장치로 소득인정비율(DTI)을 추가 도입했지만 임기 말까지 과열은 식지 않았다.

최 부총리가 한 겨울의 여름옷이라며 확 풀어놓은 대출 규제는 이미 부작용을 드러내고 있다. 주택담보대출이 늘고 있지만 주택 구매로 돈이 모두 흐르지 않고 생활비로 쓰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어서다. 국민·신한·우리·하나·기업 등 5개 주요 은행의 지난 1~7월 주택담보대출 신규 취급액 51조8000억원 중 53.8%(27조9000억원)가 주택 구입에 쓰이지 않은 걸로 나타났다. 주택담보 대출자의 절반 이상이 실제 주택 구입보다는 생활비 충당 같은 다른 용도를 위해 대출받고 있는 것이다. 부동산 규제 완화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려는 정부 의도와 달리 가계부채만 악화시킬 것으로 우려되는 부분이다.

대책이 발표되기도 전에 실효성 논란이 일고 있는 금융위원회의 증시 활성화 대책 역시 부작용 우려가 크다. 증시는 실물을 비추는 거울인데 거래시간을 연장하기로 한 데 이어 거래세를 인하하는 방법으로는 증시를 띄우기 어렵다는 것을 시장에서 먼저 알고 있는 것이다. 인위적 증시 부양은 이미 두 차례나 부작용을 남겼다. 25년 전 실패로 끝난 증시안정화 대책은 주가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줬다. 또 2000년 초 벤처 활성화 대책은 고용과 정보통신기술(ICT)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과도한 쏠림 현상으로 닷컴 버블이 꺼지자 코스닥시장이 장기간 침체의 늪에 빠지는 부작용을 남겼다.

노무현 정부 때는 경기부양을 걱정하지 않았다. 국내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한껏 경쟁력을 드높이고 있어서였다. 이 때는 오히려 경제정책의 초점이 복지 확대와 동반성장에 맞춰졌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장기 성장동력 확충에 소홀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명박 정부 역시 세계 금융위기 극복에 급급하느라 구조개혁의 타이밍을 놓치면서 저성장의 수렁으로 빠져들어 갔다. 역대 경제수장들의 모임인 재경회 강봉균 회장(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금의 단기적인 경기부양책으로는 지속적 효과를 내기 어렵다”며 “돈이 필요한 곳으로 흘러가야 경제가 살아나므로 그런 쪽으로 돈이 흘러가게 근본적인 구조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동호 선임기자

김동호 기자 dongho@joongang.co.kr

▶김동호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com/e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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