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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나무에서 살아갈 자신감을 얻는다…도시의 목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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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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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삶을 위해 선택한 목수, 내가 할 수 있는 목공을 하는 목수,

살아갈 자신감을 얻는 목수…


“위이이잉.”

지난 10월14일, 경기도 성남시 ‘유니크 마이스터’에서 주갑승(32)씨가 목재를 드럼샌딩 기계에 넣고 두께를 고르게 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네 개의 나무 막대기는 이제 곧 탁자의 다리가 된다. 주씨의 머릿속은 요즘 만들고 싶은 가구에 대한 고민과 가구에 자신을 어떻게 담아낼지 등으로 가득하다.

“어떻게 회사를 그만둘까” 매일 고민하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주씨의 하루는 “참담한 기분”으로 시작됐다. 그는 손해보험회사에서 보상 업무를 담당했다. 보험에 가입한 고객이 당한 사고 현장에 가서 보상금을 합의·책정하는 업무였다. 그가 일상적으로 부닥치는 상황은 짜증과 불편이 가득했다. 주씨는 어떻게든 적은 돈을 지급하는 일에 골몰해야 했다. “터무니없이 많거나 적은 금액이 지급되는 경우도 있었다. 불합리한 상황의 한복판에 있었다.”

주씨는 2011년 회사에 입사할 때까지 전형적인 삶을 살았다. 수능 점수에 맞춰 4년제 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2학년 때 토익 공부를 시작했고, 졸업 전 손해사정사 자격증을 땄고, 졸업 1년6개월 뒤 손해보험회사에 취업했다. 주씨는 취업에 성공한 뒤 “드디어 성인이 되는 관문을 통과했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사 뒤 고민이 시작됐다. 그때까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를 고민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세상이 정해준 ‘코스’를 밟아나갔을 뿐. 고민의 가운데,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젊은 목수들의 삶을 소개한 <젊은 목수들: 한국>이었다. 그 책을 본 뒤 ‘목수’라는 직업이 계속 어른거렸다. 책에 소개된 ‘유니크 마이스터’도 알게 됐다. 유니크 마이스터는 가구 제작을 본격적으로 하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1년 과정의 전문가 양성반을 운영한다.

31년간 살아온 부산을 떠나 경기도로 올라온 주갑승씨처럼, 유니크 마이스터 9기에는 ‘제2의 인생’을 모색하는 20명이 모여 있다. 임태형(30·가명)씨는 동생의 죽음이 전환의 계기가 됐다. 지난해 여름, 휴가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임씨는 원래 자동차 부품 영업일을 했다. 공장이 주야로 돌아가서 부품에 문제가 생기면 불려가는 ‘돌발 야근’이 많았다. 동생의 죽음 뒤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특히 야근할 때면 여러 생각이 들었다. ‘동생은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을까. 나는 이 일을 하다가 지금 당장 죽어도 후회가 없을까.’ 그렇게 고민하다가 목공을 발견하고 매료됐다. 면접을 보러 갔다가 떨어진 공방의 주인이 유니크 마이스터를 알려줬다. 1년을 하려면 회사를 관둬야 했지만 “후회하고 싶지 않아” 이곳의 문을 두드렸다. 임씨는 “나무를 깎고 만지는 순간 모든 잡념이 사라진다”고 말했다. 즐거움도 회사를 다닐 때와 달랐다. “내가 만든 구멍에 장부를 끼우는데, 아무리 정확하게 나무를 깎아 장부를 끼워도 잘 들어가지 않아 한참을 싸운다. 그러다가 딱 맞게 들어갈 때 온몸이 찌릿하다.”

나뭇조각을 붙이듯 필름 컷을 붙이고

유니크 마이스터에서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이들은 그만큼 두려움도 크다. 대기업을 그만둔 김유한(32)씨는 “1년 배우면 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1년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됐다. 1년 뒤엔 이전 직장과 비슷한 형태의 직장에 재취업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목공일을 손에서 놓지는 않을 것이다. 가능성을 알았고, 내가 좋아한다는 것도 알았기 때문에 10년, 20년 뒤까지 천천히 이 일을 즐겁게 해볼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주갑승씨도 “이전 회사에 다닐 때 ‘어떻게 하면 이 회사를 그만둘까’를 매일 아침 고민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하면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한다”고 말했다.

“처음엔 꿈이었고, 지금은 살아가는 자신감을 준 일이죠.”

10월15일, 서울 홍익대 앞 이주민문화예술센터 프리포트(FreePort)에서 만난 알 마문은 목수일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1998년 방글라데시에서 한국으로 온 그는 10여 년간 경기도 마석 가구단지에서 일했다. 2003년 서울 명동성당 이주노동자 농성장에서 부인도 만났다. 결혼한 그는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마석으로 돌아갔다. 마침 함께 일했던 목수 ‘형님’이 공장장으로 가면서 그를 불렀다. 그는 “솜씨가 있다고 생각해 불렀는데 생각보다 일을 못하니 눈치가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돌이켰다. 밤마다 ‘어떻게 하면 잘 만들까’ 고민했다. 그는 “살아남으려면 일을 배워야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주문제작 가구를 만들며 그는 목수가 되었다. 공장장이 “알아서 하라”고 맡기니 일머리가 쑥쑥 늘었다.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삶을 살고

부인은 그가 다칠까 걱정이 컸다. 손가락 부상을 당하자 갈등이 커졌다. 그는 “그만두기 슬펐지만, 가족이 먼저니까”라고 말했다. 쉬는 사이에 같이 농성했던 친구가 전화를 했다. 2012년 인테리어를 해주러 프리포트에 왔다가 활동가가 됐다. 재능을 살려 그는 프리포트에서 ‘마문의 아기자기한 목공교실’을 운영했다. 그의 한국인 제자들은 “아주 실제적인 강의”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자 고민이 생겼다. “프리포트에서 내 역할이 뭐지?” 고민 끝에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세 번째 단편 <헬로>는 11월에 열리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1050 대 35의 경쟁을 뚫고 본선에 올랐다. 마문은 “나뭇조각을 붙여서 가구를 만들듯, 컷을 붙이고 신을 이어서 영화를 만든다”며 “정성을 들인 만큼 결과가 나오는 것도 같다”고 말했다.

“백수와 목수를 겸업하고 있죠.”

10월16일, 서울 영등포구 하자센터 목공방에서 만난 20대 여성 목수 간올은 그렇게 말했다. 하자에서는 별명을 쓰는데 간올, 하다, 원스가 목공방지기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간올은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 목공일을 접했다. 그는 “고양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처음에 묵묵히 일하다 어느새 목수가 되었다. 하자 공방지기들은 “최고가 돼야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목공과 자신의 경험과 재능을 접목할 방법을 찾는다. 간올은 목공일을 하면서 그것을 소재로 만화도 그린다. 대안학교 출신인 하다는 원래 하던 빵을 구웠다. 창업을 했지만 녹록지 않았다. “뭔가 몸 쓰는 일을 해야지” 해서 시작한 목공 워크숍이 운좋게 일로 이어졌다. 그는 “평생 목공일을 한다는 생각은 아니지만, 지금 배우면서 돈도 벌고 있어 만족한다”고 말했다. 머잖아 다른 나라에 가서 살 계획인 그는 “내 집을 짓기까지가 딱 내 꿈”이라고 말했다. 간올도 목공을 “인생의 다양한 흐름 속에 만난 일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저씨 목수들과 겨누는 파워목공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목공을 한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보이는 분야가 있다”고 말했다.

원스는 구호단체에서 9년간 일했다. 교육·홍보 쪽에서 일했던 그는 실물감 있는 작업을 하려고 목조건물 짓는 기술을 배웠다. 그렇게 목공을 배웠고 아직 초보 목수인 그는 발상을 다르게 한다. 만든 물건을 “팔아야 한다”에서 출발하지 않고 “만들어본다”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주변의 필요가 발견되고 누군가는 가져다 쓴다”고 여긴다. 구호단체에서 문서로 했던 일을 자신의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작업도 흥미롭다. 그는 최근 ‘잊지 않겠다’는 세월호 희생자와의 약속을 목공으로 표현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 그는 “자신이 쓸 물건이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게 하는 느낌에 중독된다”고 말했다. 하자 목공지기들은 청소년 목공 교육과 작업을 병행하면서 탐색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건강한 농부 협동조합’은 서울 금천구에서 도시농업을 해왔다. 최근엔 목공소도 열었다. 남부여성발전센터 잔디밭의 콘크리트 지붕에 나무벽을 세워 공방을 만든 것이다. 목공소 벽에는 “우리 집, 내가 디자인하고, 내가 만든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생활가구를 만드는 목공 강좌를 시작한 것이다. 현수막 아래 늘어선 흙상자는 지난해 금천구청 앞 한내텃밭에서 만들었다. 김선정 건강한 농부 협동조합 대표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흙상자가 많았다”며 “목공을 배우면 쓰레기를 만드는 도시농업이 아니게 된다”고 말했다. 이들은 동네에서 버려진 팔레트(자재를 쌓는 나무 받침대)를 모아 흙상자 틀로 재활용한다.

“손가락 마디 하나 잃지 않은 친구가 없다”

마침 목수 한정희씨가 있었다. 그가 건강한 농부 협동조합 기술이사로 오면서 도시농업과 도시목공을 잇는 끈이 단단해졌다. 지난해 그는 한내텃밭에서 오전엔 주부, 주말엔 청소년에게 목공을 가르쳤다. 올해 53살인 그는 20여 년 경력의 동네목수 선생님으로 거듭났다. 제주에서 서울까지 전국을 다니며 인테리어 목수일을 해온 그는 일당 18만원짜리 일감을 놓고 조합에서 일하기로 했다. 그는 “땅에서 자라는 나무와 땅에서 크는 곡식을 잇는 일”이라며 “강의 덕분에 지역 주민과 인사를 많이 나누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지나듯 “손가락 마디 하나 잃지 않은 (목수) 친구가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 조심스러운 일이다.

지속 가능한 동네목수를 추구하는 목수도 있다. <한겨레21> 제880호 ‘만인보’에 소개된 황연주씨는 서울 구수동에서 자율공방 ‘나무와 늘보’를 열었다. ‘나무와 늘보’에서 목공 수업을 이수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열린 공방이다. 10월16일 평일 낮인데도 목공 작업을 하는 이들이 적잖았다. 황연주 목수는 “당신의 손은 훌륭하다”고 말했다. 과연 내가 쓸 만한 물건을 만들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들어도 막상 목공을 시작하면 누구나 필요한 물건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잘 만들지 않아도, 잘 만드는 이웃에게 주문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가구 제작에 재미를 붙인 이웃에게 목공을 지속할 길이 열린다. 그는 “그렇게 만든 가구가 수제 가구보다 저렴하고, 몇 해 쓰고 버리는 기성품보다 낫다”고 말했다. 그는 자율목공이 협동목공으로 진화해 “생산의 본능”이 동네마다 꽃피기를 희망한다.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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