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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소설로 쓰는데 26년이 걸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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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배경 자전적 소설 '청동정원' 펴낸 최영미

"오랜 숙제 끝낸 느낌…차기작은 연애소설"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스무 살의 자유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었다. 책가방과 도시락통에서 해방된 손은 (어디로 뻗을지 몰라) 다방의 탁자 밑을 헤매고, 학생화를 벗고 뾰족구두로 갈아 신은 발은 극장의 뒷골목을 배회하고, 앞가르마와 검정 고무줄에서 풀려난 머리칼은 소녀에서 숙녀로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해 거울 보기가 두려웠다. 이십여 년의 시행착오를 겪고서야 나는 자유를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노는 법을 터득했다."(46쪽)

20대 시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그리고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오는데 2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장편소설 '청동정원'(은행나무 펴냄)은 20년전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한 시인이자 소설가 최영미(53)가 "신 앞에 고해하는 심정"으로 써내려간 자전적 소설이다.

"4월에 이미 우리는 5월의 냄새를 맡았다. 전경(戰警)이 상주하는 살벌한 교정에도 봄은 왔다.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면, 우리는 두근두근 어질어질 마음을 어디 두지 못했지"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소설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집필 순서는 소설이 먼저다. 작가는 이 소설의 초고를 1988년 일찌감치 써놓았다.

"소설가를 꿈꾸지는 않았지만 원래 시보다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나의 20대를 글로 정리하고 싶었어요. 격동의 시대를 살았고, 내가 내 인생이 이해가 안 돼서, 나를 이해하고 싶어서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88올림픽이 있던 해 봄에, 처음 원고지 앞에 앉았을 때 마치 신 앞에 고해하는 심정이랄까. 나 스스로 납득이 안 가는 게 많았고 스스로 나를 이해하려고 처음에 펜을 들었어요."

'청동정원'은 그렇게 초고를 써놓고 26년이 지나서야 토해놓는 지독한 청춘의 이야기다.

작가는 이 소설을 '청춘 소설' '성장 소설'이라고 했지만 어쩌다 시대를 잘못 만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캠퍼스에서 20대를 보내야 했던 청춘들에 바치는 애틋한 송가에 가깝다.

"돌아가고 싶어/아니, 돌아가고 싶지 않아./회색빛 잔디에도 가끔 햇살이 비추고/후미진 구석에서 청춘의 꽃을 피울 수도 있었으련만……/우리의 젊은 날을 위로하는 벽화를 그려야지." (315쪽)

주인공 '애린'은 작가의 분신이다. '백마 탄 기사'와의 운명적인 연애를 꿈꾸며 S대에 입학한 그녀를 기다린 것은 '백마 탄 기사'가 아니라 캠퍼스에 내린 하얀 눈 위에 아로새겨진 '자유 민주주의 만세!!!' 구호였다.

"순결한 눈 위에 인쇄된 도도한 선언을 보지 않았다면, 생이 다르게 흘러갔을까." (40쪽)

라일락 향기가 진동하던 4월, 애린은 파쇼, 광주, 투쟁 같은 무시무시한 말들이 탁자 위를 오가는 야외주막에서 술 맛을 알게 된다. 취한 그녀는 휘청거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다리를 건넌다.

22일 합정역 인근 찻집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오랜 숙제를 끝낸 느낌"이라고 했다.

26년 만에 20대의 자신을 다시 불러낸 작가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와 '청동정원'은 시대 배경도 같고, 주제 의식도 비슷하지만 시로는 못다 한 이야기들이 있어서 소설을 썼다"고 말했다.

"50대가 되니 눈도 노안이 오고 더 늙기 전에 써야겠다, 80년대를 돌아보기에 충분히 시간이 지났다 싶었지요."

"일종의 사명감으로 80년대를 글로 복원하고 싶었다"는 작가는 80년대 청춘들의 일상을 섬세하고 생생하게 살려낸다. 소설을 쓰기 위해 80년대를 함께 헤쳐온 친구들은 물론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취재했다. 작가는 "모든 것을 바쳐서 쓴 책"이라면 "앞으로 다시는 이런 책은 못 쓸 것 같다"고 했다.

"실제 80년대를 살았던 한 개인의 내면에 대해 그렇게 깊이 들어간 글은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좌든 우든 어느 쪽이든 인정하는 소설, 어느 편에서 봐도 수긍할 수 있는 소설을 쓰라는 지인의 말을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썼어요. 어느 한 문장 허투루 쓴 것이 없어요."

"시집에 이어 또 80년대 이야기다"라는 기자의 말에 작가는 "(80년대에서) 여전히 못 벗어나고 있다. 그래서 쓴 것 같다. 시로는 부족했던 것 같다. 벗어나려고 쓴 것 같다"고 했다.

소설의 원래 제목은 '토닉 두세르'다. 토닉 두세르는 프랑스 화장품 브랜드 랑콤의 화장수 이름. 주인공 애린이 동혁과 동거할 때 쓰던 화장수다.

"투쟁의 현장에서 멀어진 죄의식을 혁명의 나라에서 수입한 꽃향기와 방부제가 덮어주었다"라는 소설 속 문장은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작가가 소설에 담고 싶었던 것은 "폭압적인 체제에 맞서 앞에서 싸우지 못하고, 멀찍이 물러나 모른 척하지도 않았지만, 그래서 더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던 주변인의 초상"이었다.

'청동정원'은 원래 후배가 선물한 청동 벽걸이 장식을 보면서 쓴 시였다. 작가는 소설을 탈고하고서 '청동정원'이 눈에 들어와 책 제목으로 삼았다.

"쇠붙이로 무장한 전경들이 교정의 푸른 나무들과 겹쳐지는 풍경이 바로 '청동정원'이었지요."

소설 에필로그에 애린은 새로 산 앵클부츠를 신고 영국행 비행기를 탄다.

"80년대는 내 신발장과 옷장 속에서 아직도 나를 지배한다. 부츠가 한 짝도 없는 신발장. 롱부츠는커녕 미들이나 앵클부츠도 없고, 뒤축이 닳은 검정 정장 구두 한 켤레(중략) 시대에 뒤떨어진 단화를 벗어 던지고 목이 긴 부츠를 사야겠다. 운동화를 신고 돌덩이를 던지던 시대는 갔다." (308~309쪽)

애린처럼 작가는 제대로 된 부츠를 신어본 적이 없다.

"대학교 1학년 때 입고 싶은 옷도 많았어요. 입학하고 비키니 수영복과 부츠를 샀어요. 비키니 수영복은 한 번도 태양과 바닷바람을 쐬지 못했고 부츠도 딱 하루 학교에 신고 갔다가 부르주아적이다는 욕을 먹고는 다시는 못 신었어요. 몇십 년간 부츠는 신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이번 책이 많이 팔리면 제대로 된 가죽 롱부츠를 사고 싶어요. 더 늦기 전에 수영복을 입고 바닷물 속에도 들어가 보고 싶어요. 80년대에 갇혀서 이런 옷을 입으면 안 된다거나 이런 부츠는 신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지나친 자기 검열을 하고 싶지 않아요."

책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하고픈 말을 다 하지는 못했지만 그만 훌훌 털고 일어나렵니다"라고 글을 맺은 그는 차기작으로 "색다른 연애소설을 쓸 것"이라며 활짝 웃었다.

yunzhe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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