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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잊혀진 사람들, 노숙인] 그들의 힘겨운 겨울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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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체 혹한기 지원 소극적… 민간단체서 뒤치다꺼리

“진짜 저 사람들 때문에 못 살겠어요.”

서울역 인근 가게의 한 상인이 22일 아침 가게 앞을 물로 씻어내며 하소연했다. 노숙인들의 노상방뇨를 막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노숙인들이 근처에만 있어도 장사에 방해가 되는데, 경찰은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면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며 “시민들이 피해를 보는데도 정부가 수수방관하고 있다”고 투덜댔다.

이 상인의 불평은 노숙인 정책의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정부의 노숙인 정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노숙인들을 길거리에서 내쫓을 수도 없고, 눌러앉아 있게 내버려 둘 수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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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줘야 한다” vs. “내쫓아야 한다”

서울에서 노숙인이 가장 많은 곳은 서울역이다. 교통이 편리하고, 무료급식소 등 많은 노숙인 지원 단체들이 이 부근에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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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밤 서울 중구의 한 건물 지하에서 노숙인들이 잠을 청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노숙인 지원단체들과 주변 상인들 간 갈등이 많다. 상인들은 노숙인 지원센터들이 서울역 뒤쪽으로 이동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노숙인들이 TV를 보거나 세탁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쉼터가 생기면서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한 상인은 “봉사단체들이 모이면서 동네가 황폐해졌다”며 “상인들 입장에서는 타격이 크다”고 말했다.

노숙인이 많은 영등포역과 고속버스터미널역, 을지로입구역 등지에서도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노숙인 위기관리대응콜센터’에는 매달 300여건의 신고가 접수된다. 노숙인의 역내 숙박 허용 여부에 대한 논란이 대표적이다. 영등포구청은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는 노숙인들이 영등포역사 공용통로에 눕는 것을 허용한다. 아예 출입을 막을 경우 밖에서 더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곳도 사람이 다니지 않는 야간에는 노숙인들의 출입을 허용한다. 한 역사 관계자는 “노숙인 때문에 골머리가 아프지만 무조건 쫓아낼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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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수 기자(맨 오른쪽)가 지난 10일 서울역 앞 광장에서 열린 ‘일반인 노숙 체험’ 행사에 참여, 박스 안에 누워 있다. 성북예술창작센터 제공


◆‘수용해서 변화시켜야 할 사람’…단편적인 인식 벗어나야


서울역 지하에는 노숙인들이 야간에 이용할 수 있는 쉼터가 있다. 혹한기(11∼3월)와 혹서기(7∼8월)에만 운영된다. 서울시의 한 관계자는 “응급대피소 성격이라 실외에서 자는 게 위험한 계절에 개방한다”며 “노숙인 시설에 보내 자활토록 하게 하는 것이 목표인데 매일 열면 이곳을 벗어나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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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기와 혹서기가 지나 이곳을 이용할 수 없는 노숙인들은 근처 민간 건물 지하를 찾는다. ‘풍선 효과’처럼 다른 곳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이처럼 지방자치단체가 노숙인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보다는 ‘최소한의 위험 예방’ 조치만 취하다 보니 뒤치다꺼리는 민간단체들이 맡는다.

20년 넘게 노숙을 한 박모(44)씨는 장애가 있어 말을 더듬고 체력이 약해 일을 구하려 할 때마다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그러나 나이가 젊다는 이유만으로 주거 지원도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노숙인 지원 민간단체인 홈리스행동을 통해 ‘희망온돌’(공적지원으로는 혜택을 받지 못하는 대상자들에게 민간 자원을 활용해 생계·주거비를 지원하는 제도) 혜택을 받았다. 홈리스행동의 황성철 활동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인데도 정부는 ‘젊으니 일을 하라’고만 한다. 무조건 스스로 자활하라고만 하니 답답하다”며 “현재 정부 정책은 주거, 식생활, 일자리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고 꼬집었다.

노숙인 정책이 ‘일단 시설에 보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도 문제다. 시설 입소 이후에 대한 지원책이 약하기 때문에 시설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퇴소 후 지역사회에 정착하지 못해 다시 길거리로 나오는 사람도 많다.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의 한 관계자는 “알코올 중독 등은 센터에서 치료를 한 뒤 지역사회로 내보내지만 지자체의 정신보건센터에서도 노숙인을 기피하다 보니 연계가 안 되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단체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엄격한 규제 때문에 쉼터에서 밀려나는 노숙인이 많은 만큼 좀 더 다양한 노숙인 시설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신원우 협성대 교수(사회복지학)는 “현재 노숙인 쉼터는 대규모 시설 위주인데, 좀 더 세분화된 시설이 필요하다”며 “시설에 왜 안 들어가느냐고 따지거나 길들이려고만 하지 말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해 궁극적으로 노숙생활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성공적인 정책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유나·최형창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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