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합천에 가니…'자연의 포로'가 되고 싶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남 군 중 면적 가장 넓어

1읍 16개 면에 산이 75%

황매산 철쭉·억새 번갈아 펴

남산제일봉 정상 단풍도 장관

스포츠월드

요즘 합천 앞에 붙이는 수식어가 있다. ‘水려한’이 그것. 합천을 상징하는 단어로 물(水)이 선택될 정도로 합천은 물이 풍부하다. 곳곳이 내고 천이다. 그래서 합천댐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합천은 경남의 군 가운데 가장 면적이 넓다. 면의 갯수도 최고다. 1읍 16개 면이다. 산이 75%를 차지한다. 작고 좁은 산이 지천이니 당연히 계곡과 물이 많을 수밖에. 합천호와 홍류동계곡은 합천의 물과 산이 빚은 예술품이라 할 수 있다.

합천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합천의 젖줄 황강에는 캠핑 및 수상레포츠를 즐길 수 있는 황강레포츠공원이 잘 조성돼 있으니, 합천이 ‘물(水)’을 앞세우는 이유를 알겠다. 이번 합천 취재는 억새가 지천으로 피어있는 황매산(1108m)과 가야산(1430m)을 마주보고 있는 남산제일봉(1010m)의 단풍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황매산은 해인사를 품은 가야산과 마주보는 형세로 합천의 맨 남쪽에 산세를 펼치고 있다.

◆황매산 기적길은 억새 천지

승용차로 한 참을 올라가 황매산휴게소에 도착했다. 황매산 억새를 보기 위해서다. 해발 850m에 위치한 휴게소 앞에는 축구장만한 크기의 주자창이 잘 만들어져 있다.

고개를 들어 산을 쳐다보니 억새만 햇빛을 받아 출렁이고 있을 뿐 나무는 거의 전멸 수준이다. 정해식(53) 합천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전두환 대통령 때 이곳에 목장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모두 베어냈는데 그 자리에 철쭉이 군락을 이뤄 봄이면 철쭉으로 온 산이 뒤덮인다”고 황매산이 민둥산이 된 이유를 설명했다.

스포츠월드

남성적인 강인함과 여성적인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춘 황매산은 철쭉이 유명하다.

황매(黃梅)산이라는 산 이름을 보면 매화와 관계가 있을 듯하다. 하지만 황매산엔 매화는 없다. 다만 봄에는 철쭉이, 가을에는 억새가 번갈아 장관을 이룰 뿐이다. 눈꽃이 피어나는 겨울 정취도 감탄을 주지만 억새풀이 흐드러지는 가을의 황매산의 비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해발 850여 미터의 황매산휴게소에서 발걸음을 몇 걸음 옮기자 ‘황매산 기적길’ 안내표지판이 나타난다. 기적길은 에너지가 크게 넘치는 모산재(767m)로 가는 길이다. 황매산 정상을 목표로 한 발걸음이기에 모산재를 등 뒤에 두고 정상을 향했다. 목장으로 조성한 산이니만큼 완만한 곡선의 너른 평지가 펼쳐지고 곳곳에 억새가 군락을 이뤄살아가는 데 지친 도시인의 마음을 위무한다.

정상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바람이 거세게 불어온다. 억새는 산발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가느다란 몸통에 힘을 줘 보지만 고개는 어쩔 수 없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휙휙 휘어지고 만다.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는데 과연 억새에도 생각이 있는지 퍼뜩 궁금증이 인다. 억새라고 마음이 없겠는가, 살아 있는 풀인 것을.

황매산 정상으로 향하는 산등성이에는 두개의 길이 나란히 조성돼 있다. 하나는 황톳길과 자연길로 이루어진 길이고 하나는 나무데크로 잘 만든 계단길이다. 전자는 합천군이 만든 것이고 후자는 산청군이 만들어 관리하고 있다. 황매산 능선 왼쪽이 산청이고 오른쪽이 합천군인 데서 비롯된 일이다. 예산이 좀 더 넉넉한 산청군이 황매산에 좀 더 투자를 많이 했다고 보면 된다. 두 군이 황매산을 사랑하는 것은 다를 바가 없겠지만, 황매산을 두고 선의의 경쟁을 하는 두 군의 모습이 한 편으로 씁쓸하기까지 하다.

너르고 평평한 들판을 거쳐 정상으로 가는 길은 바위산 그 자체다. 황매산이 (합천)군립공원인 탓에 약간 산세가 험한 곳이 있음에도 안전장치는 다소 미흡해 보인다. 정상에 오르니 황매산의 진가가 확 느껴진다. 합천군 가회면, 대병면과 산청군 처황면의 경계에 위치한 높이 1108m의 황매산 정상 바위에 오르니 세상이 달리 보인다. 머릿속을 오고가던 온갖 생각이 다 사라지고 자연의 포로로 돌변한다. 사위엔 산과 산이 만나 빚은 비경이 끝없이 펼쳐진다. 대자연이 탄생시킨 한 편의 수묵화는 분명 행복호르몬인 세로토닌 방출을 늘렸으리라 의심하지 않으면서 하산을 감행한다.

하산길에 비로소 억새의 참 모습이 드러났다. 억새는 역광일 때가 아름다는 법이다. 구름에 가려 좀처럼 억새를 비추지 않던 태양이 오후4시쯤에 이르자 갑자기 맨얼굴을 드러낸다. 천지가 환해지고 태양광선이 억새를 관통한다. 억새가 환희의 비명을 지를수록 억새는 찬란한 은빛으로 빛난다. 바람에 휙휙 휘어지던 억새도 이때만큼은 숨죽여 속삭이듯 흔들림을 억제했다.

황매산 억새산행에 나선다고 아무나 다 이러한 비경을 맛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일행 중 한 사람이 강조한다.

황매산 정상서 고개를 북서쪽으로 돌리면 삼봉이 보인다. 세 개의 돌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 있는 것이다. 삼봉에는 전설이 있다. 현인 3인의 현현을 상징하는데 이성계의 국사 무학대사와 조선중기 대유학자 남명 조식이 그들이고 한 명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전설이다. 최근 한 지역 언론이 3인의 현인 마지막 인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을 거론했다가 호되게 지적을 받았다고 한다. 전 전대통령에 대한 지역민의 정서가 아직 좋지 않음을 반영한 에피소드다.

참고로 황매산은 한때 애국가에도 등장했다. 옛날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면 장엄한 산의 배경이 나오는 데 그게 황매산이다. 황매산은 철쭉축제 때면 전국에서 몰리는 인파로 북적거린다. 합천영상테마파크와 함께 합천 관광의 효자다. 하지만 황매산 억새의 진가는 황매산 철쭉만큼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낭중지추 아닌가. 황매산 억새의 가치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시점이다.



◆남산제일봉 정상에 해인사 화마 막는 소금단지 뭍어

남산제일봉은 황매산에서 60여km나 더 위에 위치한다. 가야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산이다. 군 관광 지도상에는 매화산 위쪽에 남산제일봉이 위치한 것으로 나타나 별개의 산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매화산 남산제일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매화산’ ‘남산제일봉’ ‘천불산’, 같은 산 다른 이름의 현주소다.

스포츠월드

해인사 암자인 청량사에서 이번엔 단풍 산행 채비를 마치고 등산화 신발끈을 꽉 조였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만만치 않다는 소리를 듣고서다. 소위 말하는 깔딱고개길를 지나자 기암괴석이 펼쳐지면서 산행의 진정한 맛이 피어오른다. 천개의 불상이 능선을 뒤덮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 천불산이라고도 불린 산 아닌가. 남산제일봉의 절경을 맛보았으니 올 가을은 더욱 건강하고 행복해질 것 같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 오른쪽으로 멀리 가야산이 보인다. 그 중턱에 법보사찰 해인사가 은은한 모습으로 시야를 차지한다. 팔만대장경을 봉인한 해인사는 화재를 최대의 위험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매년 단오에 특별한 의식을 행한다. 바로 소금단지를 뭍는 의식이다.

스포츠월드

장소는 어디일까. 남산제일봉이다. 남산제일봉 정상에는 8개의 소금단지를 뭍고 해인사에는 5개의 소금단지를 뭍는다. 그런데 그냥 마른 소금이 아니다. 소금단지에 물을 부어 뭍는다. 바닷물로 화기를 제압하자는 것이다.

왜 하필 남산제일봉일까. 남산제일봉은 매화산의 주봉으로 산봉우리가 불꽃처럼 뾰쪽뾰쪽 솟아 있다. 화산(火山)인 것이다. 남산제일봉이 해인사 대적광전을 마주보고 있어 해인사 측으로선 모종의 조치를 취해야 했던 셈. 소금단지를 뭍는 의식은 해인사에서 스님들이 공개적으로 진행한다. 하지만 그동안 뭍는 장소만큼은 비밀로 부쳐왔다. 남산제일봉 정상에 소금단지가 뭍혀 있다니 궁금하지 않은가. 아는 만큼 재미 있는 법이다.

남산제일봉 바로 밑의 산이 매화산이다. 정해식 문화관광해설사는 매화산도 불을 뭍는(埋火) 산이라는 의미의 매화산이었다가 매화(梅花)산으로 의미를 달리해 불렸다는 얘기도 귀띔해줬다.

스포츠월드

남산제일봉에 오르려면 가파른 철제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야 한다. 황매산과 비슷한 높이지만 주변 풍광은 또 다른 느낌으로 와 닿는다. 삐죽삐죽 솟은 바위가 때론 고개를 빼들고 주인을 기다리는 멍멍이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옆모습으로 안겨오기도 한다. 갖가지 형상의 기암괴석의 호위를 받으며 산 아래를 펼쳐보니 천상과 지상의 차이가 이러할까 싶다.

하산길. 돼지골을 터벅터벅 내려간다. 쉽고 편한 길이 계속 이어진다. 어려움이 지나가면 언젠가는 즐거움이 오는 게 세상 이치. 숨을 헉헉 거리며 산을 올랐던게 언제였나 싶게 ‘착한 길’이 반겨준다. 수북히 쌓여만 가는 낙엽을 밟으며 호젓한 산길을 내려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붉고 노랗게 물든 한무리의 단풍이 가슴이 미어질듯한 감동과 환희를 안겨준다. 저렇게 아름다운 단풍도 햇빛으로 인해 더욱 찬연해지는 것을, 인간은 무엇으로 인해 더욱 빛을 발할까. 아마도 사랑이 아닐까 싶다. 자연이 주는 울림 앞에 가슴이 찡해졌다면 ‘나를 살리는’ 평화와 치유의 시간을 제대로 보냈다는 증거일 게다. 가야산국립관리사무소(055-930-8000)

◆주변 볼거리

스포츠월드

해인사 쪽으로는 대장경기록문화테마파크(가야면 가야산로, 055-930-4793)와 해인사 소리길(가야만 황산리, 055-930-8000)이 있고, 황매산 쪽으로는 영암사지(가회면 황매산로, 055-930-4753), 황매산 오토캠핑장(가회면 둔내리, 055-930-4753), 합천영상테마파크(용주면 합천호수로, 055-930-3751)가 볼만하다. 황강 쪽으로는 황강레포츠공원(대양면 동부로, 055-930-4665), 정양늪 생태공원(대양면 대야로, 055-930-3313), 함벽루(합천읍 죽죽길, 055-930-3176)를 찾아가면 된다.

합천=글·사진 강민영 선임기자 mykang@sportsworldi.com

억새산행에 나선 여성등산객들이 황매산 억새 군락지에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물든 억새를 감상하고 있다.

황매산 보리수나무밭 사이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촬영지임을 밝힌 팻말이 세워져 있다.

남산제일봉(1010m)은 봄에는 진달래, 가을에는 단풍, 겨울이면 소나무 숲과 어울린 설경이 천하절경이다.

남산제일봉 돼지골의 단풍.

지난 17일 한 등산객이 남산제일봉 돼지골 단풍길을 걷고 있다.

합천영상테마파크 내 남영역 철교.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 Segye.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