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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소녀는 자라고 완전체 신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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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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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 소속 아이돌 그룹 탈퇴해 중국 시장으로 간 제시카와 루한

미래를 고민할 상생의 프로그램 짜야


무명의 연예인조차 오늘 어디서 뭘 하는지 회사에 일일이 보고해야 한다고들 한다. 계약서를 바탕으로 엄격하게 해당 연예인의 사적인 일정까지 확인하는 것도 회사의 역할이고, 그러다 열애설이 터지고 각종 범죄의 영역까지 다가가더라도 수습은 회사가 다 한다. 이런 관리가 무섭기도 하고 사안과 시점에 따라 고맙기도 하지만 결국 별로 달갑진 않을 것이다. 어딜 가나 근본적으로 조직과 일개 사원은 가진 힘이 다르고, 결정적으로 나눠 갖는 돈이 다르다.

‘노예 계약’에서 ‘소속사 동정론’으로

시간이 지나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통제가 불편을 넘어 부당하다고 느끼거나 노동에 대한 보답이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 그들도 발언권과 의사결정권을 갖는다. 최근 제국의 아이들과 엠블랙의 멤버는 소속사 및 내부 갈등이 곪아터지는 지경에 이르자 용기를 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대고 사장과 동료를 욕했다. 그런데 이런 공개적인 폭로는 그나마 좀 소심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다. 분노는 확실하게 전달되지만 크게 처지의 변화가 따르지는 않는다. 그냥 자신의 편이라 믿는 팬들을 향한 단발의 호소에 가깝고, 나중에는 당사자들끼리 ‘좋게좋게’ 해결하고 끝내고 말 일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거둔 수확이 다르고 좀더 확실한 인기와 지지가 보장된 가수들은 의사 표현의 차원이 다르다. 선례를 모델로 삼아 좀더 위협적이고 승산 가능성이 높은 분쟁을 택한다. 사업가 남자친구와 패션사업을 시작했다는 제시카는 소녀시대와 작별하고 홍콩으로 갔다. 최근 SM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전속계약 효력부존재확인 소송을 제기한 루한은 엑소 탈퇴 이후 중국에서 활동할 것으로 보인다. SM을 대표하는 두 그룹 소속의 탈퇴 멤버가 향하는 길은 중화권이다.

2010년 전속계약 13년의 동방신기 세 멤버가 그룹을 빠져나올 때만 해도 전반적인 여론은 멤버의 편을 들어줬다. 소속사가 소속 가수를 노예 취급하고 줄 돈 안 주면서 무리하게 굴린 결과로 봤다. 이를 계기로 기나긴 법정 공방 끝에 아이돌의 일반적인 계약 기간은 7년으로 조정됐다. 과연 소속사와 가수의 관계가 얼마나 공정해졌는지 하는 현실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어쨌든 법적 처우 개선이 따르게 됐다는 것이다.

진통 이후 유사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좀 달라졌다. 제시카는 소녀들과의 역사를 버리고 불확실한 사업에 뛰어든 무모한 배신자이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고 비난받고 있다. 엑소의 루한은 같은 중국 출신의 한경(슈퍼주니어), 크리스(엑소)와 동일한 내용의 소송을 제기한 ‘외국인’ 멤버로 본다. 그리하여 가장 가여운 존재는 무기력한 기업이 됐다. 덩달아 주식회사 SM의 주가도 곤두박질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SM이 싸워야 할 대상은 불화를 야기한 개별 멤버이기도 하지만, 떠나는 그들이 원하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올팬’과 ‘빵녀’ 사이

5인조 동방신기를 사랑하는 팬은 스스로를 ‘올팬’이라 부른다. 하지만 개별 멤버를 따르는 팬들은 올팬을 ‘빵녀’라고 부른다. 그 난리를 겪고 나서도 5에서 무엇을 빼도 ‘0’이 된다고 믿는 순박하고 눈치 없는 팬덤에 대한 비하의 표현이다. 팬덤 내부에서도 영원을 믿을 수 없듯이 성공한 아이돌의 오늘은 데뷔 시절과 같을 수 없다. 분리된 동방신기가 그랬고 멤버 한 명을 잃고 위기에 처한 2PM이 그랬다. ‘지금은 소녀시대, 앞으로도 소녀시대’라며 사랑스럽게 미래를 약속했던 소녀들의 시대도 갔다. 고작 데뷔 4년차인 엑소의 일부 멤버도 절정의 인기를 경험한 시기에 유명 법무법인과 손을 잡았다.

게다가 9인조, 12인조 그룹이라면 소속사의 통솔력도 확신하기 어렵다. 애초부터 연기와 예능 등 번외 활동에 소질을 보이는 멤버들을 엮었기에 일부가 외출한다 해도 무대 활동에 크게 티나지 않는 방식으로 아이돌은 만들어졌다. 홍보가 간절했던 데뷔 시기에서 벗어나면 멤버들에겐 자아가 생기고 때때로 제3의 세력도 붙는다. 서로 다른 성격과 개성을 지닌 대규모 집단이기에 다투거나 특정 멤버를 따돌릴 수 있다는 것을 티아라가 보여줬고, 나아가 부모가 개입해 그룹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4인조 그룹 카라가 보여줬다.

한 소문에 따르면 f(x)의 중국인 멤버 빅토리아 앞으로 오는 중국어 대본이 한 무더기라 한다. 현지 가수 활동부터 대박 예감 사업 아이템을 제시하는 브로커들이 하도 부모 집으로 찾아오는 통에 이사했다는 얘기까지 돈다. 멤버가 직접 혹은 멤버의 가족이 외식 등 다양한 사업에 뛰어들어 팬덤 등을 상대로 영업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인기를 얻을수록 끊임없이 유혹이 따르고 돈이 돈을 불리는 한 멤버 개인도 그룹의 우정과 의리를 지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SM은 일찍부터 무한한 가능성을 예견하고 중국 시장을 개척한 기업이다. 슈퍼주니어부터 엑소까지 점진적으로 중국인 멤버의 지분을 확대하면서 중국 팬과 교감의 폭을 넓혀왔을뿐더러 주요 중국 미디어와 다양한 형태로 제휴를 맺어 유리한 홍보 기반을 얻어왔다. 그렇게 연구하고 실험하고 투자했던 중국 시장으로부터 이제는 역풍을 맞고 있다. 중국의 SM 브랜드 신뢰도는 여전하지만 여러 사건·사고를 겪으며 그룹에 대한 완전체 판타지가 사라진 시점이고, 게다가 중국은 한류를 비롯해 돈이 도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압도적인 물량으로 승부하는 폭풍의 시장이다.

탈퇴 뒤 곧바로 자국에서 영화로 음악으로, 공격적으로 솔로 활동에 매진하는 한경과 크리스의 사례는 제시카와 루한에게도 상당한 영감이 됐을 것이다. 제시카는 패션과 음악을 아우르는 중화권의 셀러브리티가 될 수도 있고, 중국인 루한 또한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자립할 손색없는 기반을 가지고 있다. 계약을 파기하고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복잡한 소송 문제를 감당한다 해도 결코 손해 보는 게임이 아니다. 리스크는 국내시장에 한정될 뿐, 이미 가지고 있는 브랜드를 바탕으로 더 많은 인구가 기다리는 중국에서 더 나은 결과를 예정하고 과감하게 베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폭풍의 시장, 다국적 아이돌의 한계

게다가 엑소의 경우 중국인 팬덤은 본토 출신 멤버의 귀환을 금의환향으로 받아들인다. 한국의 아이돌이 연습생 시절에 얼마나 고되고 빡센 훈련 과정을 감내해야 하는지 그들도 다 안다. 따라서 사랑하는 나의 가수가 언어와 문화가 다른 타지에서 고생하다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환영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중국 활동에만 집중한다면 시간을 쪼개 아시아 전역을 순회하던 과거와 다르게 훨씬 더 밀착해 팬과 가수가 자주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따른다.

우리의 아이돌이 치열하게 몸을 가꾼 뒤 프로페셔널하게 무대를 누빈다 해도 우리는 그들이 근본적으로 순수한 존재이기를 바란다. 대부분 10대 시절에 활동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람과 달리 아이돌은 시간이 흘러 인기를 얻고 어른의 세계에 진입할수록 업계의 거물들과 인맥을 쌓고 거부하기 힘든 유혹을 경험한 끝에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비즈니스의 주체로 성장한다. 계약이라는 철벽은 로펌이 뚫어주고 경제활동은 중국이 통 크게 보장한다.

그렇게 큰 스케일로 탈퇴를 고민하는 멤버와 달리 여전히 SM을 비롯한 대형 기획사 소속의 아이돌이 활동하는 방식은 큰 변화가 없다. 소속사에 의해 잘 훈련되고 팬들의 기대에 응답하는 형태로 데뷔하고, 안무나 의상 등 스타일을 바꿔 복귀해 국내외 활동에 집중하는 것이 전부다. 소속사가 소속 가수에게 얼마나 불합리한 구조인지에 대한 논쟁은 아직까지도 끊이지 않는다. 그 와중에 더 큰 시장을 노렸던 ‘다국적 아이돌’이라는 포맷은 이제 완벽한 한계에 부딪혔다. 언어 및 기타 재능을 가진 멤버들은 언제든 이력의 2라운드를 모색하고 있다.

상황이 이리 되니 SM을 비롯한 각 소속사는 재능 있고 신선한 아이돌의 출시 이상으로 유지 방식에 혁신을 기하는 일이 필요해 보인다. 대안이 있을까? 애초부터 의리를 강조하고 결성된 인간적인 그룹? 활동 기간의 대대적인 축소? 계약 기간 재조정? 제3의 시장을 상정한 모델? 아예 극단적으로 아이돌 사업을 접고 육성 노하우를 파는 것? 죄다 무용한 시나리오인지 모른다. 그들은 속된 말로 이렇게 ‘통수’를 맞는다 해도 중국이라는 어마어마한 시장을 포기할 수 없다. 그리고 약 20년간 성공적으로 이룬 콘텐츠 장사가 중단될 리도 없다.

그들에게 직장이자 학교였던 소속사

어차피 갑과 을의 목표는 똑같다. 더 활동해봐야 손해니까 중국으로 가야 한다고 느끼는 소속 가수든, 어떻게든 약속한 기간에 최대치를 뽑아야 할 소속사가 됐든, 둘 다 국내외에서 얻는 인기와 돈을 원한다. 그리고 시끄럽지 않은 상황을 모두가 원한다. 아무리 완전체 신화가 사라지고 있다지만 그래도 잡음 없이 유지되는 의리의 아이돌을 팬은 기대하고, 아이돌에 관심 없는 이들은 잊을 만할 때쯤이면 비슷비슷한 이슈로 미디어가 도배되는 것이 영 피곤하다.

소란스럽지 않은 상생의 비즈니스가 목표라면 결국 필요한 건 조율이다. 늘 돈 때문에 싸우는 때 묻은 관계라고 해도 서로 없어선 안 될 관계라면 믿음을 나누는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다. 대형 소속사에서는 소속 가수를 대상으로 슬럼프가 찾아올 때를 대비해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하니, 여기서 더 나아가 인기가 소멸한 미래의 진로를 함께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는 커리큘럼을 짤 수도 있겠다. 10대 시절 연습생으로 입문한 아이돌에게 소속사는 곧 학교이자 직장이 되는데, 그렇다면 어른됨과 인간됨을 같이 배우고 나눌 수 있는 환경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익만큼 명예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 당사자가 함께 인식하는 건강한 파트너십이 구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민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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