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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취재파일] 도서정가제 앞으로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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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 책값은 패스트패션의 가장 저렴한 옷값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싸다. 지난 십 년간 우리나라의 물가는 36퍼센트가 올랐는데 책값은 불과 18.5퍼센트밖에 오르지 않았다. 실제 가치로 본다면 책값은 십 년 사이에 더 떨어진 것이다. 종잇값도 오르고 인건비도 오르는 판에 책은 왜 더 싸지는 것일까. 스위스 명품 시계 회사 사장의 인터뷰에 힌트가 있다. 당신네 회사 시계는 왜 그렇게 비싸냐고 묻는 기자에게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필요가 없으니까요.” 의아해하는 기자에게 이렇게 부연했다.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은 값이 떨어집니다. 많은 회사들이 뛰어들어 서로 경쟁하며 값싸게 생산할 방법을 결국 찾아내거든요. 저희가 만드는 시계는 사람들에게 필수품이 아닙니다. 그러니 값이 떨어지지 않습니다…(중략).. 반면 책은 일종의 필수품이다. 롤렉스 시계가 없는 사람은 있어도 책이 없는 사람은 없다. 소설은 읽지 않는 사람도 경제 경영서나 자기계발서는 들여다볼 것이다. 필수품이 되면서 책은 점점 더 저렴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책값이 너무 비싸다는 사람들이 다수다. 더 싸게 팔라고 아우성친다. 그래서 정가에서 할인해주고 선물도 준다… >
- 김영하 산문집 ‘보다’ 中에서..


그렇다. 책값은 싸다. 물론 ‘싸다’, ‘비싸다’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고, 책의 내용에 따라 ‘값어치 못한다’고 말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다른 문화상품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비싸지 않다. 대략 1~2만원을 주고 사서, 짧게는 하루 종일, 길게는 한 달, 더 길게는 6개월을 야금야금 읽어나갈 수 있고, 10~20년을 책꽂이에 꽂아놓고, 보고 싶을 때 다시 꺼내볼 수 있을 뿐더러, 한 명이 사서 여럿이 돌려가며 읽을 수도 있으니, 이만하면 싸지 않은가.

그리고, 최근엔 더욱 더 싸졌다. 서점마다 ‘오늘만 반값’, ‘특가 도서’, ‘90%할인’ 등 각종 이름 아래, 대대적인 할인이 진행중이다. 서너 달 전에 만원에 샀던 책이 5~6천원에 팔리고 있는 걸 보며, 마음이 쓰린 한편, 나 역시 할인에 편승해 대량 구매에 나섰다. 좋아하는 작가의 사지 않았던 책들과 ‘언젠가 읽어야지’ 했던 책들을 (당장 읽지도 않을 거면서) 최근 여러 차례 무더기로 인터넷서점에서 주문했다.

●11월 21일, 도서정가제 시행

이 ‘대대적 할인’은 시한부다. 다음달 20일까지다. 11월 21일부터 ‘출판문화산업 진흥법’ 개정안이 효력을 발휘해,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기 때문이다. 주요 내용은 책 할인을 종류 구분 없이 무조건 10%로 묶는 것이다.(여기에 책값의 5%에 해당하는 경제적 이득- 마일리지라든가, 선물 등을 추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언론에서는 간단히 ‘15%할인’으로 통칭하기도 한다.) 현재는 ‘출간 18개월’을 기준으로, 18개월이 안 된 책은 ‘신간’, 지난 책은 ‘구간’으로 분류해, ‘신간’에만 할인폭 제한(10%할인+9%마일리지)을 두고 있다. 18개월만 지나면 ‘정가제 FREE’라는 딱지를 달고, 할인 대열에 합류한다.

하지만 11월 21일부터는 모든 책에 같은 기준이 적용된다. 또 현재 정가제 예외인 실용서도 정가제의 적용을 받게 된다. (이전엔 요리책, 인테리어책, 운동책 등 흔히 생각하는 실용서 외에도, ‘인문’과 ‘실용’의 경계에 있는 책들이 할인을 노리고 ‘실용서’로 출간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 밖에, 공공도서관이나 교정시설에서 구입하는 책도, 지금까지는 정가제 적용을 받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예외 없이 정가제가 적용된다. 전자책도 마찬가지다.

또 18개월이 지난 책은 할인 대신 정가를 다시 매길 수 있게 된다. 만원에 팔던 책을 30% 할인해 7천원에 파는 게 아니라, 아예 7천원으로 다시 가격을 붙이는 식이다.

● 도서정가제, 왜 하나?

조재은 양철북 대표는, 프랑스 문화장관이었던 자크 랑의 말로 도서정가제의 목적을 설명한다. (프랑스는 책의 할인판매를 전면 금지하고 있고, 인터넷 서점의 무료배송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프랑스)는 책을 다른 일반적인 상품과 동일하게 간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시장의 매커니즘을 수정하여, 당장의 이익에 가려서는 안될 책의 문화적 특성을 보장하고자 한다. 도서정가제는 전국적으로 어느 곳에서나 동일한 가격으로 도서를 판매하여 국민의 독서 평등권을 확보할 것이며, 유통체계에 있어 집중화를 방지하고, 특히 어려운 작품들을 창작 출판할 수 있는 출판 다양성을 보장할 것이다.”

인터넷 서점에 밀려 동네 서점이 문을 닫고, 책을 ‘직접 보고 살 수 없는’ 지역이 늘어나는 현실과 이미 할인을 염두고 두고 책값을 매기는 행태를 없애는 것도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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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부 내용 놓고 의견 조율중

‘출판문화산업 진흥법’은 하위법령인 시행령이 현재 규제심사위원회에서 규제심사중이다. 서점연합과 출판인협회는 ‘시행령’의 내용에 따라, 도서정가제는 뿌리부터 흔들릴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오픈마켓이 할인하는 걸 막을 수 없고, 상품권 등을 끼워줘 사실상 할인율을 높이거나, 편법 중고거래로 할인에 뛰어들거나, ‘해외에서 발행된 간행물’은 정가제 적용을 받지 않는 점을 악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부내용을 놓고, 문체부와 서점연합, 출판인회의 등 업계 관련단체가 모여 오늘부터 다시 의견조율에 들어갔다.

● 혼란은 불가피

11월 21일 이후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업계 관련자들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매우 혼란스러울 것’이라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 할인에 익숙해진, 그것도 법 시행을 앞두고 대대적 할인을 맛본 독자들이, 갑자기 비싸진(정가는 그대로지만, 체감 가격은 오른) 책을 얼마나 사겠느냐며 소비 급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론적으로는 ‘소비 유도를 위해 출판사들이 자발적으로 책값을 낮게 매길 것’이라지만, 과연 이게 얼마나 실현되겠냐는 부정적 의견도 있다.

과연 도서정가제가 동네 서점을 살리고, 장삿속에 급급하지 않은 다양한 좋은 책들을 만들어내는 ‘만능 해법’이 될 수 있을까.

● 숨어 있는 문제는 ‘공급률’

이 문제를 생각하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공급률’이다. 마냥 생소한 이 ‘공급률’이란 용어는 서점이 도매로 책을 떼어올 때 내는 비용을 뜻한다. 그리고, 서점마다 ‘공급률’은 다르다. 정가 만원짜리 책이라면, A라는 대형 인터넷 서점은 4천 5백원~5천원 정도에 책을 공급받지만, B라는 동네서점은 8천~8천 5백원에 공급을 받는다. 그러니 동네서점은, 같은 책을 팔아도 대형서점만큼 이윤을 남길 수 없는 것이다. (현재 동네서점들이 대형서점처럼 책을 할인해서 팔지 못하는 속사정이기도 하다.) 동네서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동일 공급률’이 실현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 해피엔딩을 바라며…

글 앞부분에서 인용한 김영하 작가의 산문 ‘패스트패션 시대의 책’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사람들이 책값을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 과당경쟁과 적은 이윤율로 출판계가 공멸하고 사람들은 책이 없는 상황에 익숙해지고(음반이 사실상 사라진 세상에 우리는 이미 적응하고 있다), 그리하여 책이 더 이상 필수품이 아니게 된다면 말이다. 그 때는 선택받은 부유한 소수만이 책을 사고 읽을 것이다. 소설은 ‘리미티드 에디션’ 같은 라벨이 붙어서 한정된 독자에게만 비싼 값으로 팔릴 것이다. 필요한 사람이 없으니 비싸다는 항의도 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런 시대를 원하는가. 답은 물론, 아니오다. 나는 지루하고 쾌적한 천국보다는 흥미로운 지옥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선택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책이라는 상품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 >

책이 계속 ‘필수품’으로 남길, 그리고 이 ‘필수품’을 파는 곳이 동네마다 남아 있기를, ‘요리도, 연애도, 육아도 책으로 배운’ 나는 바랄 뿐이다.

[조지현 기자 fortun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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