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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병원이 버티니…의료분쟁 조정제도 ‘식물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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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의료과실 따져보지도 못한 채

14일내 병원쪽 대답없으면 각하

2012년 도입뒤 자동각하율 60%

의료기관 규모 클수록 조정 낮아

“조정절차 자동 개시로 바뀌어야”


50대 여성 ㄱ씨는 2012년 5월 한 성형외과에서 콧대를 높이고 비중격(콧구멍을 둘로 나누는 벽)을 교정하는 성형수술을 받았다. 수술 뒤 밤이 되면 자주 코가 막혀 호흡곤란으로 잠을 자기 힘들 정도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어려워진 ㄱ씨는 그해 8월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료중재원)에 의료사고 여부를 판단해 달라며 조정 신청을 냈다. 하지만 병원 쪽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그걸로 끝이었다. ㄱ씨의 주장대로 후유증이 병원의 과실인지 아닌지 따져보지도 못한 채 조정 신청이 묵살된 것이다.

의료분쟁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해결하려고 2012년 4월 출범한 의료중재원이 정작 관련 법률의 허점으로 조정 절차를 시작도 못하는 경우가 신청 건수의 과반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21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김현숙 새누리당 의원이 의료중재원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2012년부터 지난 9월까지 의료중재원에 조정·중재를 신청한 사례가 3335건이다.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1380건(57.55%)은 아예 조정 절차를 시작도 못한 채 각하됐다. 피신청인(주로 병원)이 조정·중재에 참여를 거절하거나 아무런 의사표시를 하지 않아서다. 관련 법률엔 피신청인이 14일 동안 응답을 하지 않으면 의료분쟁 조정 신청이 자동 각하되도록 규정돼 있다. 의료분쟁 조정 제도가 전적으로 병원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구조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규모가 큰 병원일수록 태도도 뻣뻣하다. 지난 7월 말 현재 상급종합병원의 조정 참여율은 24.9%에 그친다. 조정 신청 4건에 1건꼴로 응한 셈이다. 조정 참여율은 종합병원이 35%, 병원은 51.1%, 의원은 43.7%였다.

이런 사정 때문에 전문가들은 조정 신청이 이뤄지면 피신청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곧바로 조정 절차에 들어가도록 하는 ‘의료분쟁 자동 조정절차 개시’ 제도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피신청인이 동의하지 않아 의료분쟁 조정이 각하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도 신청인들은 애꿎은 의료중재원만 비난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도 “의사들도 애초 소송에 휘말리는 것보다 의료중재원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게 더 효율적일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반면 대한의사협회 쪽은 “의료분쟁조정제도는 자율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조정 절차를 강제하면 피신청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의료분쟁 조정을 하다 결렬되면 소송을 진행할 수 있고, 의료분쟁 조정과 비슷한 언론중재위원회,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 등은 피신청인의 뜻과 관계없이 신청인이 분쟁 조정 신청을 하면 바로 조정 절차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현행 의료분쟁조정제도가 병원과 의사들에 대한 ‘특혜’라는 지적이 적잖다. 김민중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금처럼 피신청인이 조정 참여를 거부하면 중재원의 존재 의미가 없다”며 “다른 조정·중재제도 절차와 비교해도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짚었다.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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