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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사건의 재구성] 의로운 협객 4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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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주세요" 여성의 비명소리에…

지하방·골목·옆집·옥탑방서 달려온 남자들, 성폭행 미수범 때려잡다

괴한 제압, 1분도 안 걸렸다

서울 신림동 늦은 오후 주택가 2층 창가서 울부짖는 여성

담 넘고, 맨발로 뛰고…"꼼짝마" 4명 의기투합

무관심의 시대, 감동 주다

'나만 아니면 돼' 유행하는 때 시민정신 살아있음을 보여줘

義俠들 "감사장·포상금보다 고마워하는 女 눈빛에 뿌듯"

"살려주세요!"

지난달 24일 오후 6시 15분 서울 관악구 신림동 주택가에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지하 원룸에서 임용고사 공부를 하던 오호준(29)씨 귀에도 희미하게 이 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비명은 잇따라 울렸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해난구조대(SSU) 출신인 오씨는 용수철처럼 집 밖으로 튀어나갔다. 옆집에서 나는 소리였다. 고개를 돌리니 2층 창문에 한 여성이 보였다. 티셔츠를 입은 여성은 상반신을 창 밖으로 내밀고 발 한쪽을 창틀에 올리려 했다. 하반신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큰일 났구나!"오씨가 옆집 문 앞에 다다르자 여성이 아래쪽을 보며 외쳤다. "비밀번호는 ****예요!" 번호를 누르고 대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소리가 나는 방문을 열어젖히니 한 중년 남자가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170㎝ 정도의 보통 체격이었다. 남자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오씨가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와 동시에 또 다른 남성 두 명이 방으로 뛰어들었다. 인근 주민 박형원(48)씨와 옆집에 사는 김준영(28)씨였다. 대리운전 업체를 운영하는 박씨는 귀가하던 중 골목에서 비명을 들었다. 무슨 일인가 달려왔다가 2층 창가에서 울부짖는 여성을 봤다. 대문 앞에는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여성들과 노인들이 모여서 웅성대고 있었다. 박씨는 높지 않은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바로 이때 김준영씨는 피해 여성의 집 벽을 따라 설치된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는 휴대폰 통화를 하다가 비명을 들었다.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수화기 너머 상대방이 "이거 무슨 소리야?"라고 물을 정도였다. "잠깐만!" 김씨는 휴대폰을 내던지고 맨발로 뛰어갔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던 그는 창 너머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김씨가 소리쳤다. "건드리지 마!" 남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친구예요." 김씨가 "헛소리 마!"라고 외치며 방으로 뛰어든 때가 오씨, 박씨, 김씨가 만난 시점이다.

박씨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바닥에 널브러진 이불이었다. 방은 책상과 침대만으로 꽉 찰 정도로 작았다. 오·박·김에 포위된 남자는 몸을 피할 곳이 없었다. 인근 옥탑방에 살던 유중갑(24)씨가 네 번째로 합류하면서 몇 초 안 되는 짧은 대치는 끝났다. 일면식도 없던 네 사람은 단 한 번의 시선만으로 의기투합했다. 뿌리치듯 몸을 뒤트는 남자의 왼팔을 등 뒤로 꺾고 목덜미를 내리눌러 침대에 박았다. 박씨가 남자를 누르고 있는 사이 오씨가 여성을 이불로 감쌌다. 여성은 이불을 둘러쓰고 바지를 찾아 입었다. 공포가 채 가시지 않은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적십자에서 응급처치사로 일했던 김씨가 여성에게 물을 건네고 방으로 들어온 이웃 주민이 거실로 데리고 나갔다.

남성 4명이 문제의 중년 남자를 제압하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박씨는 경찰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누가 신고 안 하셨어요?" 나서는 이가 없었다. 박씨는 바로 112를 눌렀다. 김씨 밑에 깔린 중년 남자는 "신고했잖아, 이제 놔, 놔"라고 말했다. "니가 우사인 볼트인지 어떻게 아냐!" 흥분한 김씨가 남자의 머리를 한 대 갈겼다.

"성폭행범을 잡아 놨다"는 112 신고가 관악지구대에 접수된 시각은 오후 6시 22분. 2분 후 같은 내용의 신고가 2건 더 들어왔다. 곧바로 출동한 경찰이 남자에게 수갑을 채웠다.

남자는 여성이 사는 원룸에 3년 전 거주한 조모(46)씨였다. 여성이 조씨가 쓰던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옷을 벗기고 성폭행하려던 조씨는 강간미수 혐의로 지난 2일 검찰에 송치됐다.

◇방관자 효과… "도와야지! 나는 말고 딴 사람이"

수년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이웃의 삶에 무관한, 나 하나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사회의 단면이었다. 그러나 변고를 당할 뻔한 여성을 도운 오·박·김·유 '의협 4인방'은 우리 사회 어딘가에 살아 있는 시민 정신을 보여준다.

살려달라는 비명에 4명이나 나선 것은 사건 현장이 젊은이와 고시생이 많이 사는 신림동이었기에 가능하다는 분석도 있다. 임영환 관악지구대장은 "신림동은 딱지 하나를 끊어도 관계법 몇 조 몇 항을 대야 하는 곳"이라며 "의식 있는 사람이 많아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4명의 의협심은 50년 전 미국 뉴욕의 캐서린 제노비스 사건을 돌아보게 한다. 술집 매니저였던 제노비스(당시 28세)는 1964년 3월 13일 금요일 새벽 길거리에서 무참하게 살해됐다. 범인은 오전 3시 15분에서 50분까지 35분간 세 차례 그녀를 난자했다. 제노비스의 비명에 인근 주민들이 잠시 창밖을 내다봤으나 도우러 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범죄가 벌어지고 있는 걸 알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무관심 주민'이 38명이나 됐다는 사실이 후에 밝혀졌다. 주변에 '나' 말고도 사람이 많으면 '나 아니어도 돼'라는 생각에 결국 그 누구도 도우려 나서지 않는 현상. 제노비스 사건으로 유명해진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다.

의협 4인방은 지난 13일 관악경찰서에서 감사장을 받았다. 포상금은 30만원, 부상은 손목시계였다.

상장을 받아든 박씨는 "포상금이나 부상보다 고마운 듯 쳐다보던 그 여성의 눈빛이 더 감사하다"고 말했다. 오씨는 "기분이 좋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했다.

[신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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