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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조용하고도 이국적인, 다른 동네와 너무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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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연희동

도심이 가까운데 새소리 지저귄다

인테리어 좋은 곳은 많지만

사람 향기 좋은 곳은 드문데…

연희로 11가는 그런 곳이다

조선일보

그저 동네 마트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외국 유명 식재료 상점에 온 듯 제품 구성이 다채롭다. 연희동의 랜드마크인 ‘사러가 쇼핑센터’. 혹자는 강북의 ‘SSG(신세계푸드마켓·고급 식품관)’라고 부른다. 주말이면 외국인이 매출의 3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외국인에게 특히 사랑받는다.


좀 지쳤던 것 같다. 새로 뜬다며 찾았던 곳들이 어느새 머릿속에서 중첩되기 시작했다. 창고를 개조하고, 공장 지대를 단장하고, 예스러움을 현대적으로 조화시킨 공간들. 철재 소품이나 노출 콘크리트를 동원한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의 가게들은 '복제'한 듯 어딜 가나 하나씩 꼭 있다. 온갖 수식어를 동원하며 내뱉었던 경탄은 점차 '아'라는 짧은 감탄으로 바뀌고, 어느 순간 '또'라는 탄식으로 탈바꿈했다. 주말만 되면 차로까지 도열하는 사람 물결은 가끔, 현기증마저 유발했다. 출사족 카메라 시선을 피해 다니는 고단함 속에 통행의 자유마저 뺏긴 느낌이다. 자본의 확산과 발달의 평준화라는 측면에선 박수받을지는 몰라도 남다른 희소성을 찾는 이들에겐 슬픈 현실일 뿐이다.

그때 마주하게 된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은 어쩌면 이런 한탄에 대한 일종의 위로다. '다름'에 대한 발견이었다. 용산구 한남동과 이태원에 이어 외국인 선호 주거 지역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인데, 색깔은 완전히 달랐다. 동네 대부분이 1종 주거전용지역인 데다 인근 초등학교·외국인 학교가 여럿 들어서인지 '유흥' 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때, 새소리가 귀를 잡는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소리다. 아니, 다른 곳서도 분명 새는 지저귈 텐데 사람이 만드는 소음에 묻힌 게다. 괜히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연희동이 주목받는 건 연희로 11가 길 때문이다. 최근 1~2년 사이 디자인 갤러리와 카페·레스토랑이 속속 들어섰다. 지금 가장 '뜨거운' 동네인 연남동의 연장선상에서 주목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횡단보도 하나 건너면 서로 닿는 거리에, 화교가 많은 것도 공통점이다. 실상 연남동이란 동네도 연희동에서 떼어져 나온 게 아닌가.

조선일보

한배에서 나와도 이렇게 다를 수 있나 보다. 둘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곳 주민들은 지하철과 바로 연결되지 않는 '교통의 불편함'이 역설적으로 동네의 느낌을 보존하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미래학자 리처드 왓슨의 말처럼 트렌드는 역트렌드를 동반하지 않는가. 빠르고 간편한 걸 찾다가도 느림의 미학을 원하고, 기계적인 화려함에 매료됐다가 히피적인 자연 속에 파고드는 것처럼 말이다. 홍대 인근임에도 홍대 상권 영향이 상대적으로 미미하다는 희귀함이 연희동의 독자성을 지켜내고 있었다.

연희동에서 39년간이나 자리를 지킨 '사러가 쇼핑센터'는 그 세월만큼이나 연희동의 DNA를 그대로 담고 있다. 고급 수퍼마켓 앞 미제 상품 판매대는 다양한 인종이 공존하는 연희동의 한 단면이다. 30년 단골의 힘이 어찌나 센지 그 흔한 대형 마트 하나 진입하기 어렵다. 연희동에 새 가게를 내려던 유명 셰프에게 이곳 토박이 셰프들이 이런 조언을 했다고 한다. "TV에 좀 나오고 인테리어 신경 썼다고 다 됐다고 생각 마라. 다른 곳에선 손님 끌진 몰라도 여기선 몇 달 버티기 힘들 거다. 자부심이 다른 동네다. 매일 출근하고 전력 다해 주민 마음 잡을 각오 없으면 생각부터 접어라."

그 동네가 뜨는 건 몇몇 유명한 셰프나 독특한 인테리어 감각의 아티스트가 전적으로 좌우한다 생각했다. 그들 명성을 좇아 그 동네를 그렇게 다녔으니까. 생각해보니, 앞뒤가 바뀌었다. 사람과 동네는 동떨어진 게 아니다. 셰프와 아티스트의 발을 잡은 건 동네 냄새고, 사람의 향기이며 분위기고 정이다. 먼저, 그 동네의 매력에 반해 자리를 잡은 게다. 단지 가격만으로는 부족하다.

연희로 11가 길을 지나 작은 공원에 닿는다. 40년 된 시민 아파트가 철거된 뒤 2006년 조성됐다. 궁동 공원. 궁이 있던 터란 뜻과 더불어 산이 마을을 자궁같이 포근히 감싸 안은 형상을 딴 말이란다. 엄마의 품. 숨이란 걸 불어넣어 준 생명의 공간. 연희동은 그랬다. 그곳엔 사람이 있었다.

[글=최보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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