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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초점]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 왜 주목받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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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서울=뉴시스】손정빈 기자 = 드라마와 영화를 막론하고 한국 사극이 가장 자주, 깊이 다루는 역사는 조선이다. 해가 뜨는 시기(이성계의 조선 건국)부터 해가 지던 때(명성황후 시해)까지,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세종대왕 집권 시기)과 최악의 위기(왜란과 호란), 그리고 '만약에'라는 단서를 달게 하는 탄식 섞인 시대(광해군과 정조)에 이르기까지 조선 왕조 500년사는 대부분 극으로 재현됐다. 조선은 오래 살아남았고 창작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기록이 비교적 충실히 남아있다. 어느 부분을 잘라내도 '이야기거리'가 된다.

조선 왕조는 시대와 현실을 반영해 끊임없이 변주돼왔다. '개혁'이 화두가 된 시기에 가장 주목받은 임금은 정조와 광해군이었다. 이 두 지존의 이름 앞에 붙는 단어는 '개혁군주'다. 정조를 다룬 드라마로는 MBC의 '이산'(2007), 숨겨진 걸작 드라마로 평가 받는 KBS 2TV의 '한성별곡-正'(2007) 등이 대표적이다. 광해군의 이야기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가 있다. 정권 교체기와 맞물려 200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정조와 광해군은 가장 많이 다뤄진 왕이었다.

최근 대세를 물려받은 건 영조와 사도세자다. SBS는 현재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비밀의 문'(연출 김형식·극본 윤선주)을 방송 중이다. 영조는 최고의 연기력을 자랑하는 한석규가, 사도세자는 또래 연기자 중 발군의 연기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 이제훈이 맡았다. 영화계도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준비 중이다. 내년 개봉을 목표로 촬영 중인 이준익 감독의 '사도'다. 최고 배우 송강호가 영조를, 이제훈에 뒤지지 않는 연기력을 갖춘 배우 유아인이 사도세자를 연기한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서 잠시 모습을 감췄던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 조선 후기 부흥기, 영조와 정조를 잇는 연결고리

영조와 정조가 조선을 지배했던 시기는 조선 후기 부흥기였다. 왜란과 호란 이후 침체했던 조선이 되살아나고, 근대의 맹아가 싹트던 시기다. 하지만 이 시기에 석연치 않은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이 바로 영조가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일이다.

사도세자는 우리 드라마와 영화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영화 '역린'에서 정조(현빈)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말할 때 환기되는 정도의 인물이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정조를 이야기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에 대한 극적 해석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시점에서 관심이 영조와 사도세자로 옮겨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관심은 적극적인 해석을 촉발한다.

사도세자는 조선의 왕족 중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정조의 생모이자 사도세자의 빈인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사도세자가 미친 것으로 적고 있지만 이는 당시 정치적 상황을 감안해 볼 때 가해자의 입장에서 쓴 기록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사도세자를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궁금증과 아쉬움이죠. 조선은 유교적 생활 방식이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사회였잖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어요.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왜 그랬을지 궁금하잖아요. 또 한 가지는 아쉬움인데, 우리는 보통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에 대해 그에게 무언가가 있었을 거라는 기대를 합니다. 사도세자의 삶은 여기에 딱 들어맞아요."(황진미 영화평론가)

황 평론가는 사람들이 실제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서거 뒤 그를 그리워하게 된 이들이 늘어난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해석했다. 여기에 사도세자를 죽인 사람이 아버지 영조라는 점이 더해진다.

사도세자는 실현되지 못한 포부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그것이 영조와 사도세자를 다시금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 영조와 사도세자, 막장을 뛰어넘은 막장드라마

어찌됐든 막장이 대세다. '막장'은 이제 장르가 됐다. 막장의 기본은 얽히고설킨 가족관계다. 따지고 보면 셰익스피어의 비극도, 그리스·로마 신화도 신이 됐든 왕족이 됐든 가족간의 물고 뜯는 싸움이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여기에 딱 들어맞는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지점은 두 사람의 역사가 가족막장극에 그치지 않고 정치 헤게모니 싸움으로 한 발 더 나아간다는 것이다. 드라마 '비밀의 문'에도 묘사되는 것처럼 노론은 영조와 가까웠다. 노론과 대립하던 소론은 사도세자를 옹호할 수밖에 없었다. 붕당정치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갈라 놨고 그 결과가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해석이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말초적인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중심이 되는 질문은 '아버지가 아들을 왜 죽였을까'하는 것이겠죠. 정조와 광해군의 이야기는 거시 담론이었어요. 비슷한 패턴이 자주 반복됐고, 피로감을 느낀 거죠. 이제 시청자와 관객의 관심이 미시적인 가족사로 넘어가는 단계인 것 같아요. 영조와 사도세자의 텍스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것 외에도 정치와 한 인간의 내면 같은 정신분석학적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재밌을 수밖에 없어요."(윤석진 드라마 평론가·충남대 교수)

한석규·이제훈, 송강호·유아인,등 자타공인 최고 연기력을 갖춘 배우 네 명이 영조와 사도세자를 연기한다. 이는 지금 우리가 복잡한 내면을 가진 두 인물과 그 가족사에 새로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방증이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이야깃거리가 넘쳐나는 텍스트다.

◇ 아버지와 아들, 결국 우리의 이야기

아버지와 아들은 영원한 애증 관계다. 아들은 아버지를 모델로 성장하지만 언젠가는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해야하는 경쟁관계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오이디푸스왕 신화를 가족관계의 심리적 원형으로 확장시킨 결과물이다.

"아무리 한국사회가 변했다고 해도 여전히 가부장적인 사회죠. 이런 사회에서 자란 남자들은 대개 아버지에게 피해 의식이 있잖아요. 엄격하고 폭압적인 아버지에게서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 거죠.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이 이야기의 극단이죠. 사극의 주소비층이라고 할 수 있는 현재 중장년층은 더 심하겠죠. 자연스러운 관심이라고 봐요."(이문원 문화평론가)

결국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둘러싼 이야기는 영원히 반복될 테마이고 그런 이유에서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에는 감정이입을 할 여지가 많다고 해석할 수 있다. 왕가의 비극으로 위장한 가족시네마가 시작되고 있는 셈이다.

jb@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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