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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빚 내서 빚 탕감받아라" 브로커의 치명적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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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회생 신청 10만명 시대… 악성 브로커들 기승]

추가대출로 돌려막기 유도, 재직증명서 위조하고 채무 규모 부풀려 주기도

수수료만 챙긴뒤 대개 잠적… 채무자만 벌금 덤터기

소득에 비해 빚이 너무 많은 사람에게 법원이 채무 일부를 탕감해주는 제도가 '개인회생(個人回生)'이다. 그런데 이 신청자가 작년에 10만명을 넘어서는 등 계속 늘어나자 제도를 악용하는 브로커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개인회생을 받게 해주겠다며 추가 대출을 알선하거나 서류를 위조해주고 수수료를 챙긴다는 것이다.

◇"추가 대출 받아서 급한 불 끄세요"

이불 가게를 하다 망해 은행 대출 9000만원으로 고민하던 A씨에게 최근 낯선 문자메시지가 왔다. '빚으로 고생하는 분들께 개인회생으로 도움을 드린다'는 내용이었다. 당장 전화를 걸어 개인회생·파산 전문 컨설턴트라는 B씨를 만났다. 그는 "지금 대출금이 적으니 추가로 대출을 몇천(만원) 받아라. 이걸로 빚을 갚는 척하다가 나중에 '도저히 안 되겠다'고 개인회생을 신청하면 된다"고 했다. 또 "대출해줄 사람은 소개해줄 테니, 돈이 입금되면 수수료를 달라"고 했다. 5000만원을 대출 받아 B씨에게 수수료 500만원을 떼어준 A씨는 최근 개인회생 절차를 밟던 중 추가 대출 과정을 수상하게 여긴 법원에 적발돼 벌금 200만원을 물었다. 브로커에게 속아 전과자가 되고 빚만 늘어난 것이다.

조선일보

브로커들은 불법 수집한 개인 금융정보를 이용해 무작위로 문자를 보내거나 인터넷 광고 등을 통해 '고객'을 유치한다. 빚이 많아야 개인회생 신청에 유리하고 또 빚 갚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면서 추가 대출을 유도한다. 이 같은 '대출 돌려막기' 전문 브로커들은 대출금의 10%를 '자문료'로 챙긴다고 한다.

재직증명서를 위조해주고 빚 규모를 부풀려주는 '서류 조작' 전문 브로커도 있다. 이들은 '직장에 다니고' '빚이 많아야' 개인회생 허가에 유리하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무담보 채무 5억원, 담보 채무 10억원 미만인 사람이 개인회생을 신청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한도에 육박하는 채무를 가진 사람이 법원 허가에 유리할 것이라는 심리를 자극한 것이다. 또 소득을 거짓으로 줄여주거나, 개인회생 신청 직전에 재산을 빼돌려주는 브로커들도 있다. 그러나 법원 관계자는 "빚이 많다고 개인회생 허가에 유리한 게 아니다"면서 "실제 소득 여부와 빚이 생기게 된 경위, 서류 신빙성 등을 더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고 했다.

◇절차 모르는 일반인들 속수무책

전문가들은 개인회생 신청자들이 브로커에게 속아 불법 행위에 발을 담그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수수료를 챙긴 브로커들이 사무실을 닫고 잠적하는 경우가 많고, 브로커의 말을 따랐다가 전과자가 되는 사람들도 많다. 부산에서 활동하던 브로커 C(48)씨는 연간 20~30여명의 개인회생 서류를 위조해줬는데, 그가 구속되면서 가짜 차용증을 만든 주부, 재직증명서와 소득확인서를 위조한 남성 등이 덩달아 법원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브로커들과 짜고 거액의 빚을 탕감 받으려는 '먹튀 신청자'들의 도덕적 해이도 문제다. 법원 관계자는 "빚 갚을 생각도 안 하고 반복적으로 개인회생을 신청하는 악성 신청자들도 많은데, 이들 때문에 선량한 신청자들이 피해를 본다"고 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서울중앙지법 파산부는 지난 5월부터 '개인회생절차 업무개선 연구반'을 가동했으며, 조만간 수사기관과 변호사·법무사협회에 브로커 의심자들을 통보하기로 했다. 법원 관계자는 "브로커의 감언이설에 속아 불법 행위를 저지르기보다는 법원이나 유관 기관에 절차 및 조건에 대해 문의해 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최연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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