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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토익 대신 논어(論語)… '21세기형' 서원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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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대 중심의 인문학 교육… 상설 개원하는 서원 형식 빌려

국내외 엘리트 코스를 모델로 차세대 리더 위한 강좌 개설

지난달 서울 종로구 아산서원(峨山書院)에 입교한 대학생 30명의 평일 기상 시각은 오전 6시. 간단한 체조를 마치고 나면 이들은 토익 영어나 자격증 취득 공부를 하는 대신, 조선왕조실록이나 '논어'와 '맹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고 토론한다. 아산정책연구원이 2012년부터 10개월 코스로 진행하는 인문학 교육 프로그램이다.

기숙사에서 숙식하기 때문에 대학생들은 사실상 두 학기를 휴학해야 한다. 하지만 올해 6기에 이르는 동안 평균 경쟁률은 6대1에 이른다. 6기생인 고려대 중어중문학과 오동현(26)씨는 "'군주론'의 번역서를 펴낸 김경희 교수(성신여대)로부터 현대적 리더십에 대한 강의를 듣고 토론하면서 인문학에 대한 갈증을 맘껏 풀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산서원뿐 아니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등이 주축이 되어 내년 3월 문을 열 예정인 건명원(建明園), 김형찬 고려대 교수(철학과)가 내년 상반기 개원(開院)을 목표로 추진 중인 '청년 아카데미'까지 서원 형식의 인문학 교육 과정이 확산되고 있다.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도 동료·제자들과 함께 책을 읽고 글 쓰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최근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에 '여백(如白)서원'을 지었다. 일회성이나 단기 강좌에 치중했던 '대학 밖의 인문학'이 상설적인 공동체 형태로 진화를 꿈꾸는 중이다.

최근 들어섰거나 들어설 예정인 '인문학 서원'의 가장 큰 특징은 국내외 엘리트 교육 코스를 모델로 삼는다는 점이다. 김형찬 교수가 추진하는 '청년 아카데미'의 지향점은 일본의 마쓰시타 정경숙(政經塾) 같은 차세대 리더 양성 기관이다. 일본 기업가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行之助)가 1979년 세운 마쓰시타 정경숙은 일본 정치인이나 경제계·학계 인사를 다수 배출했다. 아산서원도 영국 옥스퍼드 대학이 고전 중심 교육과정을 현대에 맞게 보완해 만든 PPE(Philosophy, Politics and Economics)를 참고했다. 김형찬 교수는 "인문학 강좌와 여행 등을 결합한 최대 1년 과정의 교육을 통해 차세대 리더가 될 젊은이들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상설 개원이라는 서원의 형식을 빌리다 보니 단발성 특강 대신 동서양 고전 강독 같은 프로그램을 뚝심 있게 밀어붙일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청년 아카데미'는 중국의 부상과 새로운 문명, 과학기술 발전과 지속 가능한 사회 모색 같은 거대 담론을 화두로 잡았다. 내년 3월부터 40주 일정으로 진행되는 건명원은 노자의 '도덕경'을 외우고 라틴어 문법을 익혀 고전 강독을 진행할 만큼 강도 높은 수업을 예고하고 있다. 배철현 교수는 "인터넷에 모든 지식이 나와 있는 우리 시대의 공부는 결국 마음의 수련이자 훈련"이라며 "교수들도 모두 강좌에 참석해서 함께 듣고 토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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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전문경영인(CEO)이나 관료 등 기성세대에 대한 '재교육'에 방점을 뒀던 인문학 강좌의 타깃이 20~30대 젊은이로 '하향 조정'되는 것도 특징이다. 아산서원과 청년 아카데미는 30세 이하 대학생, 건명원은 15~25세 학생을 각각 대상으로 하고 있다. 배 교수는 "은퇴를 앞둔 CEO나 취직에 여념이 없는 대학생만 해도 늦다.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인문학이 청소년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 내에서는 학과 통폐합이나 폐과(廢科) 등 존폐 위기에 놓인 인문학이 서원이나 아카데미 같은 대학 외부 공간을 통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김석근 아산서원 부원장은 "대학 내에서는 모든 가치의 중심이 취업이나 스펙 쌓기, 실용성에 맞춰지다 보니 인문학은 위축되거나 뒷전으로 밀려나는 경향이 있다"면서 "서원의 문제의식도 대학이 '거리의 인문학' 같은 사회적 요구를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반성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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