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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대기업 임원→실업자' 58년 개띠, 추석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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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개띠, 은퇴역에 서다]민주화·경제성장 주역들의 쓸쓸한 퇴장…가장의 부담 "노후가 막막하다"]

머니투데이

/그래픽=임종철 디자이너


6.25 전쟁의 폐허가 막 수습되기 시작한 1955년부터 산아제한정책 발표 직전인 1963년 사이, 한국은 전무후무한 '베이비붐'을 맞는다. 이때 태어난 인구만 743만명으로 현재 전체 인구의 14.6%에 달한다. 이 베이비부머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일선에서 퇴장하며 한국 경제에 큰 파장을 낳고 있다.

특히 주요 대기업들의 직원 평균 정년은 만 56∼57세로 올해는 베이비부머의 대표 주자로 불리는 '58년 개띠(만 56세)'가 정년을 맞는 해다. 이들은 최초로 신생아수 80만명 시대를 열었고, 이른바 '뺑뺑이'로 불리는 고교 평준화의 첫 세대다. 유신독재 말기에 대학시절을 보냈고, 1987년에는 넥타이 부대의 주역으로 민주화도 이끌었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도 58년 개띠들이 '월화수목금금금' 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58년 개띠들은 월급으로 평균 414만원을 받고, 312만원을 지출한다. 부채는 8070만원, 금융자산은 1억824만원이다. 부채를 빼면 통장에 2700만원의 잔고가 있는 셈이다. 58년 개띠의 70%는 자기 집과 자동차가 있다.

자신들은 부모를 모셨지만 청년실업 자녀들 때문에 자녀에게 부양받기를 기대하기 힘든 이른바 '낀 세대'. 대부분 별다른 노후 준비나 은퇴 계획 없이 퇴직을 맞는다.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않으면 정년을 채우기 어렵다'는 그 힘든 한국의 고용환경 속에서 50대를 맞기 전에 일손을 놓는 58년 개띠들은 한숨만 나온다. 추석을 앞두고 '은퇴역' 플랫폼에서 만난 58년 개띠 4인의 일상은 그래서 더 구구절절했다.

◇"예상치 못한 퇴직, 녹록치 않은 재취업…불안하다"

대기업 임원이었던 임민식 씨(가명)는 한순간에 실업자가 됐다. 지난 2월의 일이다. 그래서 임 씨는 올 추석이 두렵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친척들은 임씨 퇴직 사실을 아직 모른다. 임씨는 퇴직 후에도 부인 모르게 매달 부모님에게 용돈을 보냈다.

임 씨는 30년을 꼬박 채워 젊음을 바쳤던 회사에서 짐을 싸던 날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사업 실적이 좋았던 만큼 본인이 임원 재계약에서 누락될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한 두 달 쉬다가 재취업 하겠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수 십 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58년 개띠를 반기는 곳은 없었다. 부인과 자녀들에게는 "추석 전에 새 직장으로 출근하겠다"고 선언했는데 공염불이 됐다.

통장 잔고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불안하기 짝이 없다. 자녀 2명 모두 결혼은 커녕 대학조차 마치지 않은 상황이어서 목돈 들어갈 일은 아직 줄줄이 남아 있다. 지금처럼 고정 수입 없이 예금을 까먹다가는 노후를 위해 모아놓은 연금저축과 보험 원금도 위태롭다. 임 씨는 "지난해 추석 때는 가족끼리 해외여행을 다녀왔지만 이제는 명절 여행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라며 "이번 추석 때는 아이들 등록금 등 가계의 큰 지출 계획을 다시 세워봐야겠다"고 말했다.

◇"월급 절반으로 줄었지만 끝까지 다니고 싶다"

A은행에 다니는 이준호 씨(가명)도 추석이 반갑지 않다. 올해부터 임금피크제 대상이 된 그는 급여가 정확히 절반으로 줄었다. 일반 직원들 모두가 받는 '명절 떡값'도 그에게는 없다. 지난해까지 실적 좋던 지점을 진두지휘하던 지점장으로 잘 나갔지만 지금은 직원들의 사후 감사 업무를 하고 있다.

추석때면 장손인 이씨 집으로 가족과 친척들이 유난히 많이 모인다. 그렇다보니 매번 차례상과 음식 장만을 위한 비용을 갹출하는데 올해는 솔직히 이 돈조차 부담스러웠다. 이 씨는 두둑한 용돈을 기대하는 부모님과 조카들의 기대를 올 추석까지만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이다. 임금피크제 이후 그 자신을 위한 씀씀이는 이미 크게 줄인지 오래다.

저녁 약속은 거의 잡지 않고 점심식사도 비용 부담 때문에 직장 후배들이 아닌 친구들과 할 때가 많다. 가끔 이렇게 구차하게 살아야 하나 싶지만 30년은 더 살 수 있으므로 더 길게 보기로 마음먹고 아끼고 있다. 이래저래 눈치가 많이 보이지만 조기 퇴직은 꿈도 꾸지 않는다. 원래 정년은 58세지만 임금피크제로 전환한 이씨는 60세까지 앞으로 4년 더 악착같이 근무할 생각이다. 이 씨는 "올 추석에는 나이가 더 들어서도 계속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 누구인지 꼽아보겠다"며 "완전 은퇴 후에는 결국 친구들이 전 재산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대학 못 갔지만 경제적으로 여유…자녀들은 대학원도 보내"

부산에서 자동차 정비소와 세차장을 운영하는 배준기 씨(가명)는 올 추석에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명절을 앞두고 자동차를 손보려는 손님들이 크게 늘면서 매출이 평일의 2~3배에 달한다. 사업이 잘 되다보니 얼마 전에는 모아 둔 돈으로 임대사업용 오피스텔을 2채나 샀다.

어린 시절 배씨는 가난했다. 14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어머니 밑에서 컸다. 3남 2녀 중 차남으로 대학은 꿈도 못 꿀 상황이어서 공업고에 진학했다. 졸업 후에는 바로 돈을 벌었다. 온 몸에 기름때를 묻히고 작업해야 하는 처지를 비관한 적도 많았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해 추석 때마다 말끔한 정장을 입고 찾아오는 친구들이 속으로는 부러웠다.

하지만 인생 후반전에 돌입하면서 이 상황은 역전됐다. 착실히 모은 돈으로 10년 전 정비소와 세차장을 잇달아 인수했다. 회사에서 잘릴 것을 걱정하는 대학 나온 친구들과 달리 숙련된 기술로 착실하게 키운 사업이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자녀 3명 중 2명은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배 씨는 "올 추석 연휴에는 차례를 지낸 후 가족들과 동남아 여행을 다녀올 것"이라며 "내년에 자동차산업 최고경영자과정에 등록할지도 진지하게 고민해보겠다"고 말했다.

◇"남편 대신 취업 전선으로…명절 잊은 지 오래"

B대형마트 계산원으로 일하는 조윤숙 씨(가명)는 올 추석도 귀향길을 포기했다. 업무 특성상 추석 연휴가 더 바쁜 만큼 3년째 고향에 가지 못하고 있다. 조 씨는 결혼 직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20년 넘게 전업주부로 지냈다. 동갑내기 남편의 사업이 번창하면서 친구들의 부러움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남편의 회사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부도를 맞으며 그녀의 인생도 달라졌다. 회사를 살리려고 백방으로 뛰던 남편은 부도 이후 재기하지 못했다. 회사 빚을 갚느라 살던 집까지 팔아야 했다. 당장 생계가 막막한데 일손을 놓은 채 등산만 다니는 남편을 대신해 조 씨가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50대 중반 전업주부가 일할 곳은 많지 않았다. 식당 주방보조와 가사 도우미 등 고된 일자리를 전전하다 대형마트에 힘겹게 자리를 잡았다. 요즘 조 씨의 가장 큰 바람은 대학교 4학년인 아들의 취업이다. 조 씨는 아들 귀에 못이 박히게 말한다. 탄탄한 회사에 입사해 평생 직장인으로 살아야지, 사업은 꿈도 꾸지 말라고. 조 씨는 "올 추석에는 남편에게 무슨 일을 하더라도 같이 돈을 벌자고 대화를 해볼 것"이라고 말했다.

송지유기자 clio@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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