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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수갑 대신 볼펜 쥐고 피해자를 위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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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실화소설 낸 이인열 前 경정

조선일보

/이명원 기자


"제 소설이 망인(亡人)에 대한 위로이자, 후배 경찰관들을 위한 수사(搜査) 교재가 됐으면 좋겠네요."

이인열(57) 경정은 30년 가까이 수사관으로 근무하다가 지난 31일 퇴직하며 소설가로 변신했다. 그는 서울의 한 경찰서 강력팀장으로 일하던 지난 2005년의 '오피스텔 예비신부 살인 사건'을 소재로 최근 실화 소설 '열대야'를 냈다. 같은 오피스텔에 살던 20대 남성이 결혼을 3개월 앞둔 여성을 성폭행한 뒤 목 졸라 살해한 사건이다. 그는 사건 해결을 위해 1000명이 넘는 주민을 일일이 찾아가 DNA 검사 동의를 받아낸 끝에 범인을 검거했다. 26일간 귀가하지 않고 경찰서에서 먹고 잤다고 한다. 범인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수사를 마무리하면서 그는 언제가 소설로 다뤄보고 싶었다고 한다. "신고 안 할 테니 제발 목숨은 살려달라고 애원한 예비 신부를 죽인 범인의 모습과 애인의 시신을 바라보며 오열하던 예비 신랑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수사 보고서 말고는 글을 거의 써본 적이 없던 그다. "아내와의 연애 시절에도 편지 한 장 써보지 않던 내가 소설을 완성하자니 정말 어려웠어요." 밤늦게까지 범인을 쫓다가 귀가해 졸린 눈을 비벼가며 앉아봐야 원고지 서너 장 분량을 쓸까 말까 한 정도였다. 태권도·유도·합기도를 합쳐 총 21단인 그가 솥뚜껑만 한 손으로 수갑 대신 볼펜 잡고 글을 써 나가는 모습을 보고 동료들도 "형사가 무슨 소설이냐, 체력 단련이나 하러 가자"며 놀리기도 했다.

이씨는 8년간 보관해온 당시 사건 기록과 메모를 다시 들여다보고, 사건 현장도 수없이 다시 찾아가 당시 정황들을 재생했다. 퇴근 후엔 서점을 찾아가 사건·추리 소설을 읽으며 글을 풀어갈 방법을 연구했다고 한다. 소설 속 이름들은 물론 모두 가명이다.

"2009년 북한이 갑자기 물을 방류해 우리 주민 6명이 숨진 '임진강댐 방류 사건'이 있었잖아요. 그 이야기를 토대로 두 번째 실화 소설을 쓸 계획입니다."

당시 그는 담당 수사과장이었다. "댐을 방류한 주범(主犯)인 김정일은 이미 사망했으니 더 이상 처벌할 순 없지요. 하지만 소설로라도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이동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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