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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증권맨 A씨의 전쟁같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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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그래픽=김지영 디자이너


"올들어 푹 자본 적이 없습니다. 3시간을 채 못자요. 예전에는 일요일 밤에 TV 개그 프로를 보면서 웃었는데 요즘은 심장이 쿵쿵 뜁니다. `내일은 어떻게 (실적을) 맞출까'하는 걱정이 떠나지 않아서요."

국내 한 증권사 지점에 근무하는 A씨(47·부장)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벌써 영업직으로만 20여년을 근무했다. 그간 어려운 순간들도 많았지만 올해만큼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 드는 때는 없었다. 다음은 A씨가 밝힌 전쟁 같은 일과다.

오전 6시. 집을 나선다. 증권사는 아침이 빠르다. 회사에서 할당해준 직급별 BEP(손익분기점)을 어떻게 맞춰야할지 출근길에서부터 고민은 시작된다. 시장 자체가 어려워 BEP 맞추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회사가 요구하는 BEP 기준은 올들어 더 강력해졌다. 새로운 급여체계를 도입해 일정기준에 미달하면 월급이 깎여 지급한다.

오전 7시. 회사에 도착. 개장전까지 아침회의가 열린다. 회의 분위기는 예전 같지 않다. 시장 연구를 하고 의견을 나누던 팀 회의가 올 들어서는 BEP를 맞췄는지 전 직원을 점검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지점장은 전일 기준으로 '숫자'를 못 맞춘 직원 한 명, 한 명에게 언제, 어떤 고객을 만나 어떤 식으로 '숫자'를 채울 계획인지 확답을 요구한다. 직원들은 언젠가부터 이 아침 회의를 '인민재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오전 9시 개장. 본격적인 지점장의 '꾸지람'이 시작된다. 지점장은 요즘 장 중에 걸려오는 전화 횟수, 직원들이 거는 전화 횟수까지 일일이 다 확인한다. 나에게 걸려온 고객 전화가 몇 통인지(인바운드), 고객에게 건 전화가 몇 통인지(아웃바운드) 모두 점검한다. 지점장이 유효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웃바운드 콜'이다. 얼마나 전화를 자주 걸어 고객에게 매매를 일으켰는지 가늠하기 위해서다. 통화 수는 매일 퇴근 무렵에 기록돼 이튿날 지점장 책상 위에 놓여진다.

낮 12시.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아서 점심을 거른다. 매일 30% 정도 직원들은 '신경이 쓰인다'며 점심을 먹지 않거나 적당히 떼운다. 시장이 지지부진하게 움직이니 고객들의 항의 전화가 잇따른다. "사라고 해서 샀더니 떨어지지 않느냐"며 항의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괴롭다.

오후 1시. 오늘도 '숫자'를 다 못 맞출 것 같아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직원들 대부분이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소위 말하는 '대패질'을 한다. 고객에게 시장 상황과 관계 없이 매매를 자주 권유해 수수료 수입을 챙기는 걸 뜻한다. 이런 관행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고들 하지만 실상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오후 2시. 대출 그리고 자기매매 카드를 꺼낸다. 고백하건대 부끄러운 '대패질'까지 해도 할당량을 채우기가 쉽지 않아서다. 대출을 받아 자기매매라도 하지 않으면 매달 깔딱대는 실적에 월급이 몇 번은 더 깎였을거다. 위에서 안 좋은 소리 듣고 월급 깎이는 것보다 스스로 그 돈을 메워넣는게 낫다고 생각한다. 주위에는 이런 식으로 하다 빚이 몇천만원씩 늘어난 동료들이 부지기수다.

오후 4시. 끊임없이 이어지는 캠페인 물량을 채우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주가연계증권(ELS), 전자단기사채, 소장펀드(소득공제 장기펀드), 연금저축펀드를 팔라는 주문이 연중 끊이질 않는다. 소장펀드 출시 첫날 1인당 30~50개씩을 채워야 한다는 주문도 떨어졌다. "못 채우면 급여 삭감은 물론 원거리 발령이 나도 책임을 못 진다, 어떻게든 맞춰야 한다"는 지점장의 압박이 거셌다. 나이가 80이 다 된 어머니와 10살 남짓 조카에게까지 연금저축펀드를 팔기도 했다.

오후 6시. 고객 또는 잠재고객을 만나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강박감을 느낀다. 실적 압박에 저녁을 개인적으로 먹는 것조차 죄책감을 느낀다. 한 끼를 먹더라도 실적에 도움이 되는 사람, 고객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만나 먹으려 애쓴다. 매번 머쓱한 마음으로 투자 및 상품 이야기를 꺼낸다. 모든 인간관계를 이렇게 맺고 있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지만 방법이 없다.

오후 10시. 다가올 내일 걱정을 하며 터덜터덜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희망퇴직시 떠난 동료 몇몇은 다른 증권사의 단기계약직으로 증권업계에 머무르고 있고 몇몇은 가족에게도 희망퇴직 사실을 숨기고 삼삼오오 모여 자기매매를 하고 있다. 원해서 나간 사람도 있겠지만 '좀 더 버텨볼 걸'하며 아쉬운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걸어오는 이들도 있다.

회사는 성과를 내야하는 만큼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때도 있다. 하지만 최근 회사의 조치들을 보면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직원들을 과연 인간적으로 존중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대로, 남아있는 사람은 남아 있는 사람대로 힘들다. A씨가 생각하는 최근 증권업계 구조조정에 대한 평가다.

[박진영 기자 트위터 계정 @zewapi]

박진영기자 j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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