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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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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철원서 평화 미사 희망 … 북 자극 우려해 장소 바꿔

중앙일보

지난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평화 미사가 열리기 전에 프란치스코 교황(오른쪽)이 국내 12개 종단 지도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 14~18일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동선 하나하나에는 언뜻 봐선 놓치기 쉬운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한국을 위한 배려,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을 보듬으려는 교황 방한의 뒷이야기들을 모아 봤다.

◆시복미사, 광화문이어야 했던 이유=교황 방한의 하이라이트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미사’가 진행된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는 20만 명의 군중이 몰렸다. 시복이란 성인(聖人)의 전 단계인 복자(福者)로 추대하는 걸 말한다. 교황이 직접 해당 국가에 와서 시복미사를 집전하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교황은 시복미사 집전에 앞서 서소문 순교 성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시복자 가운데 가장 많은 27위가 희생당한 이곳에서 교황은 고개를 숙이고 1분 동안 기도했다.

사실 정부가 원하는 시복미사 집전 장소는 광화문이 아니라 서소문이었다. 고층 빌딩이 즐비하게 서 있고 지하철역과도 연결돼 있는 광화문광장은 경호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황청의 의지는 확고했다. 순교자들의 ‘신원(伸<51A4>)’을 위해서였다. 시복자 124위가 순교했던 조선시대 때 광화문광장과 세종로 인근은 행정부의 중심이었다. 하느님 앞의 만민 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 신자들을 국가의 기반을 흔드는 국사범(國事犯)으로 몰아 고문하고, 배교(背敎)하지 않으면 극형에 처하도록 한 의금부와 포도청이 이곳에 있었다. 거기서 판결이 나면 신자들은 서소문·새남터·절두산 등으로 끌려가 목숨을 잃었다.

교황은 순교자들이 처형당한 곳에서부터 움직여 판결한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복미사를 진행한 셈이다. 교황방한준비위원회 관계자는 “광화문에서 시복미사를 집전한 것은 곧 이들은 부당하게 판결받았고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공식 선포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평화미사, 파주·철원 바랐던 교황=교황 방한의 대미를 장식한 18일 서울 명동대성당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는 분단된 한반도의 아픔을 위로하는 자리였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은 서로 적대시하는 남북 모두에 던지는 메시지였다.

평화미사로 처음 고려했던 장소는 파주 통일동산과 철원 노동당사였다. 통일동산은 남북 교류 협력의 장을 마련하고 이산가족들의 망향의 한을 달래고자 조성됐다. 1946년 지어진 철원 노동당사는 6·25전쟁 발발 전까지 북한이 노동당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교황청과 정부가 처음 통일동산과 노동당사를 염두에 뒀던 것은 북한과 좀 더 가까운 곳에서 평화를 위한 미사를 드리고자 했던 교황의 의중이 반영된 조치였다. 장소 자체의 상징성도 컸다. 하지만 교황청 사절단이 사전답사를 벌인 결과 명동대성당을 선택했다. 가장 큰 이유는 교황의 미사가 북한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고령의 교황이 마지막 날까지 파주나 철원으로 가는 강행군을 감당하기에는 무리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교황은 한국에 있는 4박5일 동안 1000여㎞에 이르는 거리를 이동했다.

◆방한 불씨 이어 가는 6·25전쟁 순교자 시복=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6·25전쟁 전후에 순교하거나 실종된 이들을 위한 시복 추진도 탄력을 받고 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2009년부터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에 대한 시복을 준비해 왔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된 지 4개월 뒤인 지난해 7월 교황청은 전 평양교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가 사망한 것으로 공식 인정해 시복 추진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

홍 주교는 50년 공산정권의 박해로 체포됐지만,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 살아있는 사람은 시복 후보자과 될 수 없기에 교황청이 당시 상황의 특수성을 감안해 실종자였던 홍 주교를 사망자로 인정한 것이다. 81위에 대한 시복 추진은 이제 교황청 시성성에 청원을 공식 접수하기 전 마지막 국내 절차(시복재판)만을 남겨 두고 있다.

81위 중에는 전쟁 발발 뒤에도 한국에 남아 있다 인민군에 변을 당한 초대 교황 사절 패트릭 번 주교(당시 62세), 도림동 성당 앞마당에서 신자와 함께 희생당한 이현종(당시 28세) 야고보 신부, 해주의 모래톱에서 생매장당한 유재옥(당시 52세) 프란치스코 신부 등이 포함됐다. 당시 순교자 대부분은 즉결 처형됐고, 강제북송 과정에서 병사한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큰 관심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안중근 의사 복자 추진은 주춤=서울대교구는 2011년 안중근 의사에 대한 시복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살은 하느님의 정의에 부합한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확정된 ‘근현대 신앙의 증인’ 시복 추진 대상 명단에는 안 의사가 빠졌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관계자는 “서울대교구의 1차 명단에는 안 의사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명단을 올릴 때 안 의사는 없었다”며 “순국은 맞지만 신앙을 이유로 목숨을 바친 순교로 보기엔 논란이 있다는 점 때문에 조금 더 조사하기로 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유지혜 기자

[S BOX] ‘악마의 대변인’ 둔 까닭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에 다녀간 이후 시복시성 절차에 대한 관심이 높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 추진 중인 시복시성은 모두 4건, 결과에 따라서는 교황이 우리나라를 다시 찾는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시성을 위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복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시복시성은 100년 이상 걸리기도 하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경우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시복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1997년이었다.

시복시성 절차는 일단 교구의 예비심사로 시작된다. 관할은 대상자가 사망한 지역의 주교가 한다. 복자나 성인이 될 만한 자격이 있는지 검증하기 위해 목격자 진술은 물론 대상자가 쓴 일기, 편지까지 꼼꼼히 살펴본다. 시복재판을 통해 국내 절차를 마무리하면 비로소 교황청 시성성에 공식 청원을 하게 된다. 시성성은 검증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이란 직위의 조사관은 대상자가 시복시성을 받으면 안 되는 이유를 찾아내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흠결이 발견되지 않으면 의원 추기경과 주교들이 판결을 내리고, 최종 재가는 교황이 한다.

유지혜 기자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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