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아버지와 딸, 너무 닮은 사랑 이야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은인의 아내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졌던 바그너, 사고뭉치인 그가 잠잠히 음악에만 심취할 사람인가. 그는 또 한 번 사고를 일으키고 만다. 이번에는 제자의 아내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친구인 프란츠 리스트의 딸이자 자신의 작품을 지휘한 한스 폰 뷜로의 부인 코지마가 그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언제나 그렇듯, 천재 예술가들의 러브스토리는 엿볼수록 관음의 충동에 가속도가 붙는다.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그러나 독일 음악계에 큰 공헌을 한 이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따라 바이마르에서 뮌헨, 그리고 바이로이트까지 흥미로운 여행길에 올라보자.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1811~1886), 독일의 대표적인 예술감독 코지마 바그너(1837~1930), 오페라 작곡가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 독일 최초의 프로 지휘자 한스 폰 뷜로(1830~1894), 이 네 사람의 이야기다. 코지마의 아버지 리스트, 리스트의 친구 바그너, 바그너의 아내 코지마, 코지마의 첫 남편 한스, 한스의 스승인 바그너…. 자, 복잡하더라도 잘 따라오시라.

1 원하는 건 다 가져야 했던 나쁜 남자 - 바그너

바이에른주의 작은 도시 바이로이트. 바그너 축제 극장이 이곳에 세워진 것은 바이로이트 시민들에겐 행운이겠지만, 뭔가 숨은 사연이 있을 듯하여 ‘귀’에 침이 고인다. 바그너는 애절한 사랑 노래를 만들기 위해서 이루어질 수 없는 간절하고 애타는 사랑을 즐긴 사람같기도 하고, 마음 속에 사랑의 감정이 일면 현실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력이 작동을 멈춰버렸던 사람 같기도 하다. 덕분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같은 애절한 사랑 노래를 오늘날에도 들을 수 있기에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게 느껴질 때쯤, 예술가들의 부도덕한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해해버리는 건 아닌지… 그의 본처 ‘민나’에게 잠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 중 <지크프리트>는 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 1856년에 바그너가 작곡을 시작했으나 15년 후에 완성되어서 1876년에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서 초연이 이루어졌다. <지크프리트>를 작곡하는 동안 사랑에 빠진 바그너가 작곡을 멈추고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하는 데 정성을 쏟았기 때문이다. 바그너가 취리히로 망명했을 당시, 베젠동크라는 그곳의 부유한 상인을 만나 큰 도움을 받는다. 베젠동크는 바그너 인생의 최대 은인이었다. 은인의 아내 마틸데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지적인 여인으로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 바그너는 마틸데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녀를 마주한 순간, 바그너는 사랑에 빠져버리고 만다. 은인의 아내가 아닌가! 하지만 냉철한 이성이 바그너의 뜨거운 가슴을 제어한 적은 그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마틸데’와 사랑에 빠져버린 건 그의 운명일까, 타고난 바람둥이 기질 때문일까. 망명생활에 지쳐 있었던 바그너는 삶의 의욕을 잃은 상태였고, 아내 ‘민나’와는 불화를 겪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타난 경제적 은인 베젠동크와 정신적 은인 마틸데와의 만남은 우울에 빠진 바그너의 삶에 파문을 일으킨다.

마틸데에게 바치는 사랑의 가곡집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지독하게 슬픈 사랑 이야기인데, 폭풍처럼 몰아치는 사랑의 감정에서 비롯되는 아픔과 안타까움을 담고 있다. 그들의 사랑은 죽음으로 완성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마틸데를 향한 억누를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에 대한 원망과 한탄이, 은인 베젠동크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애절한 참회록이다. 거역해야 했으나 피하지 못한 자의 회한과 죄책감, 그러나 그 감정을 이해받고 싶은 마음과 용서를 빌고 싶은 역설적인 마음이 모두 녹아 있는, 나도 모르게 그 감정에 이입되고야 마는 작품이랄까. 마틸데는 매우 서정적이고 글을 잘 쓰는 여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그너와 주고받은 사랑 편지가 ‘민나’에게 발각되면서 그들의 관계는 드디어 끝이 난다. 사랑을 잃은 바그너는 깊은 슬픔을 모조리 쏟아내어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완성한다.

바그너의 인생이 절망에 다다른 그 순간, 기적처럼 또 한 명의 은인을 만나는데 그가 바로 바그너 예술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였던 루트비히 2세다. 그를 만난 건 바그너의 운명을 바꾸는 대사건이었다. 바그너의 <탄호이저>와 <로엔그린>을 보고 바그너에게 심취한 루트비히 2세는 전폭적인 재정 지원을 하며 그를 뮌헨으로 초대한다. 그의 부탁을 받고 바그너는 13년 전에 미완성으로 남겨둔 <지크프리트> 3막을 완성한다. 1, 2막에 비해 3막의 음악적 깊이가 더 깊고 애절하다.

은인의 아내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졌던 그 시기가 바그너의 음악이 한층 더 깊어지는 귀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1865),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1868), <라인골드>(1869), <발퀴레>(1870)를 뮌헨에서 무대에 올렸다. 한스 폰 뷜로도 연출에 참여했는데 그로 인해서 바그너의 작품은 더욱 빛났다. 바그너 오페라 축제 극장도 원래는 뮌헨의 이지아 강변에 세워질 계획이었는데, 사고 빈발 바그너가 잠잠히 음악에만 심취할 사람인가. 그는 또 한 번 사고를 일으키고 만다. 이번에는 제자의 아내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의 딸이자 자신의 작품을 지휘한 한스 폰 뷜로의 부인 코지마가 그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바그너는 그 스캔들 때문에 뮌헨을 떠나야만 했기에 계획은 무산되고, 한적하고 작은 도시 바이로이트에 바그너 축제 극장이 세워진 것이다.

경향신문

코지마가 꾸민 바그너 축제 극장의 정원. 정원 가운데 바그너 흉상이 서 있다.


2 늘 사랑에 빠졌지만 가장 외로웠던 남자 - 리스트

당대에 명성을 떨치던 체르니, 살리에리와 같은 선생들에게 ‘하늘이 내린 피아니스트’라는 평을 받은 소년이 있었다. 12살에 처음 베토벤을 만났고, ‘천재소년’이라는 칭찬을 들었다는 소문도 있다.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매니저였던 아버지를 열여섯 살에 잃고 방황했던 소년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셨던 말씀을 가끔 떠올렸다.

“여자를 조심해라. 아무래도 나는 네가 걱정되는구나.”

어린아이를 두고 왜 그런 고민을 했을지 무척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아들의 사주팔자를 뽑아보기라도 한 것이었을까. 훗날 소년은 아버지의 걱정대로 숱한 백작 부인 ‘누나’들과 스캔들을 만들며 음악활동 또한 왕성하게 해낸다. 훗날에는 <예술가의 지위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출판해서 고급 하인 정도로 취급받던 예술가의 지위를 향상시키고자 노력했던 똑똑한 남자. 프란츠 리스트의 이야기다.

리스트의 가장 아름다운 소곡으로 알려져 있는 <사랑의 꿈 제3번>은 프라일리히라트의 <오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할 수 있다면>이라는 시에 곡을 붙인 것인데, 독일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 중에 하나다. 누구나 아름다운 사랑에 풍덩 빠지고야 말 것만 같은 감정에 젖도록 만드는 노래.

오 사랑하라, 그대가 사랑할 수 있는 한/ 시간이 오리라, 시간이 오리라,

그대가 무덤가에 서서 슬퍼할 시간이/ 그리고 애써라, 그대의 마음이 타오르도록

그리고 사랑을 품도록 그리고 사랑을 간직하도록 / 오, 그를 위해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

특히 옆모습에 자신이 있었던 리스트는, 관중들이 자신의 오른편 얼굴을 보며 연주를 감상할 수 있도록 피아노를 측면으로 돌려놓고 연주한 최초의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팬을 관리하는 능력 또한 타고난 사람이었다. 실제로 리스트의 공연이 끝나고 나면 요즘 아이돌 그룹에 열광하는 여성 팬들처럼 울면서 쓰러지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피아노를 가르치던 제자와 사랑에 빠졌으나 그녀 아버지의 반대로 만나지 못하게 되자 상사병에 걸린 리스트는 시체처럼 누워서만 지냈고, 당시의 신문에는 그의 사망 부고(訃告)가 실리는 난리가 벌어지기도 했다고 하니, 그의 인기는 요즘 연예인을 능가한 모양이다.

그 후로 오랜 시간 동안 리스트는 우울증에 시달렸고, 피아노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때, 또 한 여자가 나타난다. 마리 아구 백작 부인으로 알려진 플라비니! 그녀는 남편과 가족을 버리고 리스트와 동거를 한다. 첫딸 블랑딘, 둘째딸 코지마와 아들 다니엘을 낳았지만, 1844년 둘은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 유럽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활약하는 동안 그는 무용수 롤라 몬테츠, 알렉산드르 뒤마의 소설 <춘희>(La Dame aux camelias)의 모델이 된 마리 뒤플레시 등 수많은 여인과 연애를 했다. ‘사랑할 수 있는 한, 마음이 타오르도록!’

1847년 2월, 리스트는 키예프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카롤리네 비트겐슈타인 후작 부인은 리스트의 음악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다. 작곡에 전념하라는 그녀의 충고대로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접었으며, 독일 바이마르 궁정의 음악감독을 지내며 바이마르에 정착하여 대작들을 완성한다. 하지만 도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이마르의 시민들은 비트겐슈타인 후작 부인과 불륜 관계에 있는 리스트를 비난했고, 비트겐슈타인 후작 부인은 교황에게 러시아에 있는 남편과의 이혼을 허락받기 위해 애썼지만 교황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인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늘 외로웠던 불운한 남자 리스트. 후에 리스트는 주로 로마에서 살면서 종교음악에 심취해 오라토리오 <성녀 엘리사베트 전설>, <그리스도> 등을 작곡했다. 그동안 첫째딸과 막내아들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나 남은 딸인 코지마를 무척 아꼈지만, 코지마는 자신의 복잡했던 과거를 답습하기 시작한다. 아끼는 제자 한스 폰 뷜로와 결혼하고 잘 살던 코지마가, 이혼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친구인 바그너에게로 가서 함께 살면서 아이를 셋이나 낳은 것이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리스트는 하나 남은 딸과 평생 동안 불화했지만, 마지막엔 딸이 있는 바이로이트에 가서 눈을 감는다.

경향신문

바그너 축제 극장 앞의 코지마 흉상. 코지마는 아버지(리스트)의 친구인 바그너를 사랑해 그 사이에서 두 딸과 아들을 낳았다.


3 자부심 강한 남자, 알고 보면 상처투성이 - 뷜로

리스트의 제자인 한스 폰 뷜로는 1850년에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듣고 감격하여 바그너에게 사사를 하였으며 그의 작품을 연출하기도 했다. 뷜로의 성격은 직선적이고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으며,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겐 무섭고 강압적인 장군처럼 구는 사자 같은 지휘자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런 성격은 관중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뷜로가 베를린 필을 지휘하여 베토벤의 제9교향곡 <합창>을 연주했을 때, 청중들이 기립 박수를 치며 열광하자 그는 작품의 전곡을 한 시간에 걸쳐서 앙코르로 연주했다고 한다. 단 한 명의 관객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극장의 문을 잠근 채 말이다. 리스트는 73세 때, 한때 자신의 사위였던 그를 위해서 <뷜로 행진곡>을 작곡해 선물한다. 하지만 뷜로는 단 한 번도 그 곡을 연주하지 않았다. 그리고 리스트에겐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전 좋은 음악이 아니면 연주하지 않습니다.”

코지마에 대한 배신감을 리스트에게 표출한 대답이었으리라. 아내를 뺏긴 뷜로는 바그너에게 등을 돌리고 브람스의 후원자가 된다. 하지만 바그너가 죽었을 때, 코지마에게 위로의 전보를 보냈다는 일화를 보면, 자신이 사랑한 스승에게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긴 한 남자의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혼도 하지 않은 채 바그너에게로 가서 아이를 셋이나 낳아버린 그녀를 보며 그가 겪었을 심리적 공황은 상상하기 힘든 일. 자신에 대해 과한 자부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했던 것도 상처받은 자존심을 지켜내기 위한 눈물겨운 자기 보호 본능이었으리라. 동시대에 살았더라면 술 한 잔 꼭 사주고 싶은 남자. 뷜로의 이야기다.

4 아버지를 닮은 딸 - 코지마

코지마는 바그너의 두 딸과 아들을 낳은 뒤에야 바그너와 정식 결혼식을 올린다. 그토록 원했던 코지마 바그너가 된 것이다. 훗날 바그너의 뒤를 이어 작곡가가 된 지그프리트 바그너가 코지마의 아들이다. 코지마는 바그너와 함께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을 창설하는 데 앞장선다. 코지마 바그너는 1883년에 바그너가 죽자 바이로이트 축제를 맡아서 1908년,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까지 예술감독으로 활약했다. 축제의 레퍼토리와 예술가 선정, 연출방식에도 관여하면서 사회적·상업적으로 축제를 총지휘하는 능력 있는 예술감독이었다. 전 세계 바그너 협회의 후원을 받아서 바그너 오페라 축제를 발전시켜 왔고, 바그너 오페라 축제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오페라 축제로 우뚝 서게 한 코지마. 그녀는 바그너의 아내라는 이름보다 유능한 예술경영자, 감각 있는 오페라 예술감독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커리어 우먼이다. 코지마는 바그너가 죽은 뒤 무려 50년 가까이 혼자 살면서 바그너를 위해 일했고, 1930년에 바그너의 곁으로 떠났다. 향년 93세. 아버지를 미워했으나 지독하게도 아버지를 닮았던, 자신의 삶과 사랑을 위해서 모든 걸 바쳤던 여자의 이야기.

세상의 비난 속에서도 끝까지 사랑을 지켜낸 바그너와 코지마는 그들이 살았던 저택 정원(바그너 박물관)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박상미 문화평론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