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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전통 숨쉬면 흉물은 없다…런던의 온고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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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영국 격언에 “못 쓸 정도만 아니면, 그대로 써라(If it ain‘t broke, don’t fix it)”라는 말이 있다. 큰 변화보다는 옛 것을 존중하고 오랜 전통에서 합리성과 실용성을 찾는 영국인의 의식을 보여주는 말이다.

런던 시내를 다니다 보면 수백 년 된 건물 속에서 최신 브랜드, 최첨단 제품 매장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고 일부러 찾아가지 않아도 길만 나서면 백년이 넘은 유적들과 역사가 태연하게 얼굴을 들이미니 런던에 있다 보면 백년쯤은 여상히 여기게 된다.

그러나 런던의 전통과 역사를 이루는 것은 수백 년 전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들만이 아니다. 19세기~20세기 초 세계무역의 중심지로 불리던 영국이니 만큼 기술과 자본이 결합된 산업시설들이 도시 곳곳에 건설되어 도시 역사의 커다란 한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의 업적들은 기술과 운송수단의 발달로 그 역할을 잃고 방치되어 도시의 외관을 망치는 흉물로 철거의 대상이 되어왔다. 하지만 런던은 이 시설들에 대해 ‘지역 유산’으로서 역사성을 인정하고 새로운 역할을 부여함으로서 시민들의 위락시설이자 관광자원으로 재탄생시켰다.

▶테이트모던의 변신은 무죄 =수백 년 전의 문화재에서 느낄 수 없는 근대유산으로부터의 향수를 활용한 이러한 움직임은 런던의 관광자원을 한층 더 다채롭게 만들면서 매년 관광객을 영국으로 불러들이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사라질 뻔한 지역 유산의 대표적인 성공적 재탄생 사례는 런던 템즈강 남쪽 변에 위치한 테이트모던(Tate Modern)이다. 1940년대 건설된 화력발전소 건물로 1981년 폐쇄되었다가 2000년 현대미술관으로 새롭게 태어난 이 건물 외관은 이전의 발전소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내부만 개조하여 역사와 현대문화를 아우르는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여 연간 780만 명이 방문하는 런던을 대표하는 관광지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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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핑크플로이드의 추억, 배터시 화력발전소 = 새로운 도시공간으로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배터시 화력발전소(Battersea Power Station)도 마찬가지이다. 템즈 강변에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1930년생 발전소는 비틀즈의 영화 ‘Help!‘, 세계적인 밴드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 자켓 및 여러 뮤지션들의 뮤직비디오에도 등장하는 런던의 랜드마크 중의 하나이다. 1983년 발전소 폐쇄 이후 철거가 아닌 보존으로 방향을 잡고 2013년부터 시작된 배터시 화력발전소 재개발 프로젝트는 템즈 강변에 면해있는 유명한 굴뚝과 외벽은 그대로 보존하고 건물 뒤편과 주변부지만 개발된다. 개발 첫 단계 분양에서 4일 만에 75%가 판매되어 이 볼품없는 발전소가 근대 지역유산으로서 경제성도 갖추었음을 증명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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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마켓에서 공원으로, 옥소타워 일대 =템즈강 남쪽 테이트모던에서 템즈강을 따라 서쪽으로 걷다보면 런던의 아이콘 중의 하나인 옥소 타워(OXO Tower)가 나타난다. 이 1920년대 아르데코 양식 건물은 원래 OXO라는 브랜드의 소고기 스톡(stock)을 판매하는 회사의 냉동고로 쓰였으나 1970년 정부의 개발계획에 의해 철거 위험에 처했었다. 그러나 옥소 타워 주변의 주민들이 이에 반발하여 코인스트리트 커뮤니티(Coin Street Community Builders)를 조직하고 이 주변을 산책로와 공원을 조성하여 시민에게 개방하는 한편 지역 공방을 디자인숍으로 전환하여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킴으로서 지역 유산을 지킬 수 있었다. 현재 옥소 타워는 디자인숍, 레스토랑, 바(bar)등이 운영되고 있으며 이 주변은 주말에는 발 디딜 틈이 없는 관광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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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공장 부지는 지구촌 청년의 문화공간으로 바뀌고...= 이번에는 런던 템즈강 주변을 벗어나 런던의 동쪽으로 이동해 보자. 런던 마천루의 중심인 금융중심지 시티(City) 지역의 초현대식 빌딩숲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갑자기 19세기 말로 시간이동을 한 듯 착각이 들게 하는 오래된 공장부지가 나타난다. 그런데 자칫 삭막해 보일 수 있는 공간에 다양한 연령대와 국적의 사람들이 가득하고 활기가 넘친다. 신기한 마음에 한발자국만 들어서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기계소리가 들려야 할 것 같은 거대한 공장 건물 내부는 소상인들의 의류, 공예품 시장에 푸드코트까지 들어서 있고 거리에는 레스토랑과 바(bar)가 즐비하다. 이곳은 17세기 건립된 맥주제조회사인 ‘올드 트루만 브루어리(Old Truman Brewery)’의 공장부지로 한때는 세계 1위의 매출량을 자랑했으나 쇠퇴를 거듭하다 1989년 폐쇄된 곳이었다. 1990년대 중반 이 건물을 매입한 The Zeloof Partnership사(社)는 예전 공장 건물과 부지의 모습을 그대로 두고 여기에 문화공연장, 독립 디자이너 매장들을 채워 넣었으며 요일별로 마켓을 열어 젊은 층을 끌어들였다. 황폐한 공장은 문화예술 공간이자 쇼핑·오락 공간으로 탈바꿈하였으며 현재 올드 트루만 브루어리와 면한 거리인 브릭레인(Brick Lane)까지 포괄한 ‘브릭레인 마켓’은 모든 런던 관광책자에서 빠지지 않고 소개되는 세계적인 명소로서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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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과 인천개항장 그리고 문래동의 변신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근대 지역 유산들이 런던의 매력을 덧칠하며 도시 곳곳에서 시민과 관광객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비록 오래되고 낡고 쓸모없어 보이더라도 보존을 통하여 관광자원으로서 지역 경제 활성화의 기반을 마련한 이러한 사례들은 못 쓸 정도만 아니면 옛것을 보존하면서 그속에서 실용성을 찾는 영국인들의 전통 존중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서울 북촌과 전주의 한옥마을, 인천 개항장 문화지구 등 지역 유산을 성공적으로 보존하고 활용한 사례가 있다. 서울 문래동 철공소단지와 공생하고 있는 문래동 예술촌 역시 지역 유산과 문화예술이 결합한 훌륭한 모델이다. 하지만 현대화와 재개발의 물결 속에서 피맛골 등 많은 지역 유산들이 사라졌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은 부정할 수 없다.

▶“방치된 전통유산 자나깨나 다시보자.”= 위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역 유산은 역사적 유물일 뿐만 아니라 활용에 따라서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또한 과거와 현재, 미래가 만나는 지역 유산의 재창조를 통해 그 지역의 정체성을 더욱 부각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리고 그 정체성이야말로 지역 유산을 관광자원화 하는 핵심요소이다.

옛 시설에 대한 보존을 전제로 장소의 역사성을 살리며 현대 도시민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기능을 넣어 개발한다면 근대 지역 유산은 도시의 역사성도 살리고 재개발 사업비도 적게 들면서 지역주민과 도시가 상생하는 한국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차창호 한국관광공사 런던지사장/changho@knto.or.kr

정리=함영훈 헤럴드경제 기자/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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