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9 (금)

도난 미술품은 마피아의 현찰 … 연 5조원 시장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미술관, 은행보다 경비 허술해

'절규' 절도범 "형편없는 보안 고마워"

엄청난 가격 비해 운반·은폐 쉬워

마약 등 불법 거래 때 돈 대신 쓰여

미국 보스턴의 이사벨라 스튜어드 가드너 박물관 곳곳에는 빈 액자가 걸려 있다. 1990년 3월 18일 도난당한 작품의 자리다. 경찰 제복을 입은 범인은 경비원을 포박한 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콘서트’(1664)와 렘브란트·마네 등의 작품 13점을 훔쳐갔다. 작품의 가치는 총 5억 달러(약 5113억원) 정도로 추정된다. 작품과 범인의 행방은 지금까지 오리무중이다. 2011년 미국 휴스턴의 한 개인집에서는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작품 ‘머리에 꽃을 꽂고 팔에 기댄 마들렌’(1918)이 털렸다. 가치는 100만 달러 정도로 추정된다. 다른 도난 미술품에 비해 가격이 비싸지 않기 때문에 미술품 헌터의 사냥감이 된 것으로 보인다. 유명한 작품보다는 좀 저렴한 작품이 오히려 돈벌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미술품을 훔치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하지만 훔쳐서 팔아먹는 건 전통적인 수법이다. 요즘 도난 미술품은 다른 용도로도 많이 쓰인다. 바로 돈세탁이나 마약, 무기 등의 불법 거래에 담보물로 활용된다. 장물 미술품을 ‘지하 세계의 화폐’로 부르는 이유다. 86년 베르메르의 작품을 훔친 도둑 마틴 카힐은 그림을 담보로 선금을 받은 뒤 마약 밀수 자금을 세탁하는 은행을 차렸다. 2000년 범죄조직의 근거지를 급습한 캐나다 경찰은 150만 달러 상당의 도난 그림 63점을 발견했다. 마약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미술품을 훔쳐 담보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장인 샌디 네언이 쓴 『미술품 잔혹사(Art Theft)』에 따르면 전 세계 도난 미술품과 골동품 시장의 규모는 연간 50억 달러로 알려져 있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도둑들이 미술품을 노리는 건 상대적으로 훔치기 쉬워서다. 은행이나 보석 전문점 등을 터는 것보다 쉽다. 94년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미술관에 도둑이 들었다. 범인들은 사다리를 타고 미술관 외벽에 올라 창을 깬 뒤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1893)를 훔쳐갔다. 도둑들은 ‘형편없는 보안 상태에 감사할 따름’이란 메모를 남겼다. 아일랜드 러스버로 저택에 있던 베르메르의 ‘편지를 쓰는 여인과 하녀’(1670~1671)는 같은 장소에서 세 차례 도난당한 오명을 안고 있다. 영화 ‘토머스 크라운 어페어’의 인상적인 장면처럼, 훔친 물건을 옮기거나 은폐하는 것도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주인공은 클로드 모네의 ‘황혼 녘의 산 조르조 마조레’ 위에 수채화를 덧칠해 위장에 성공한다(안타깝게도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쏟아지며 본래의 모습을 되찾지만).

미술품의 가격도 계속 뛰어 매력적이다.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오른 미술품 값은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반 일본의 수요가 가세하며 고공행진했다. 세계 금융위기로 주춤했지만 미술품 시장은 최근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지난해 11월 미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개의 습작’이 경매 사상 최고가인 1억4240만 달러에 낙찰됐다. 아트프라이스(artprice)에 따르면 올 상반기 세계 미술 경매 시장 규모는 지난해에 비해 17% 성장한 70억 달러에 이른다. 올 상반기 크리스티(45억 달러)와 소더비(31억 달러)의 매출은 지난해보다 각각 22%와 47% 늘었다. 각국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 시장에 유동성이 넘치는 것도 미술품 시장이 뜨거워진 한 요인이다. 티에르 에르망 아트프라이스 대표는 “미술품 시장은 배고프다”고 말했다.

하지만 배고픔을 채워줄 만한 제대로 된 음식은 부족하다. 미술품은 대표적인 비탄력재다. 수요가 늘어난다고 공급이 따라 늘지 않는다. 수집가가 선호하는 작품은 제한돼 있다. 대량 생산도 어렵다. 그 때문에 그림 소장자가 파산(Default)하거나 사망(Death) 혹은 이혼(Divorce)할 때 좋은 미술품이 나온다는 ‘3D 법칙’이 적용된다.

물건이 부족하다 보니 장물도 꺼리지 않는다. 미술품 시장의 은밀하고 불투명한 거래 관행은 장물 거래를 부추긴다. 문서 없이 물건을 사고파는 것도, 익명 거래도 자연스럽다. 국경을 넘나들기 쉬워 거래 과정을 추적하기도 힘들다. 암시장을 통해 몇 사람의 손을 거치면 ‘족보 세탁’도 할 수 있다. 도난 미술품은 합법적인 거래 가격의 3~10% 선에서 팔린다는 게 미술계의 정설이다.

그 덕에 횡재도 한다. 미국 버지니아에 사는 한 여성은 2010년 벼룩시장에서 7달러를 주고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작품을 샀다. 2년 뒤 경매회사에 감정을 의뢰한 결과 51년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도난당한 진품으로 확인됐다. 경매 호가만 7만5000달러에 달했다.

하지만 지하 세계의 화폐가 앞으로도 널리 유통될지는 알 수 없다. 미술품 도둑이 활개칠 여지가 줄고 있어서다. 미 연방수사국(FBI)와 각국의 전담 경찰 등 현대판 ‘모뉴먼트맨’을 자처하는 이들이 도둑의 뒤를 쫓고 있다. 여기에다 장물 목록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면서 대놓고 거래하기도 힘들어졌다. 도난 미술품 데이터베이스(DB)를 관리하는 회사인 영국의 아트 로스 레지스터(ALR) 목록을 비롯해 FBI와 로스앤젤레스 경찰국 등이 ‘미술품 실종 신고 목록’을 공개하면서 훔친 물건을 처분하기가 어려워졌다. 실제 ALR 목록이 만들어진 뒤 2억 달러가량의 도난 미술품이 주인의 품으로 돌아왔다. 40년에 사라진 뒤 2005년 회수된 파블로 피카소의 ‘흰 옷을 입고 책을 읽는 여인’이 대표적인 예다.

하현옥 기자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하현옥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com/hyunock77/

[☞ 중앙일보 구독신청] [☞ 중앙일보 기사 구매]

[ⓒ 중앙일보 : DramaHouse & J Content Hub Co.,Lt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