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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녹색별’ 지구를 살리자] 시속 379㎞ '괴물'…재앙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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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태풍이 할퀴고 간 필리핀(상)

모든 것을 앗아간 슈퍼태풍 하이옌

세계일보

시속 370㎞. 세계 최고의 슈퍼카가 낼 수 있는 속도의 한계다. 이런 속도의 바람이 불어닥친다면 어떻게 될까. 지난해 11월 필리핀에서 이런 일이 실제 벌어졌다. 순간 최대 풍속 379㎞/h의 수퍼 태풍 하이옌이 중부지역을 할퀴고 지나간 것이다.

하이옌은 중부 동쪽에 위치한 레이테 섬과 사마르 섬을 초토화시켰다. 지난 8일 레이테 섬 타클로반에서 만난 바스콸리티오 일라간(53)은 고향에 불어닥친 태풍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타클로반 남쪽의 해안 마을 둘라그에 위치한 일라간의 집에선 마당에 세워둔 자동차가 바람에 날려 지붕에 부딪혔다. 외벽이 무너져 내린 집에서 일라간은 가족들과 붙들고 거센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바람이 잦아든 것은 그렇게 5시간이 흐른 오전 10시. 일라간은 그때를 떠올리며 “친척과 이웃 주민 등 98명이 모두 주검으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펑펑 울었다”고 말했다.

세계일보

지난 7일 필리핀 중부 사마르 섬 기완시에 위치한 대피소 건물이 앙상한 철골을 드러낸 채 방치돼 있다. 이 건물은 슈퍼태풍 하이옌의 영향으로 대피소 구실을 하지 못한 채 무너져 내렸다.


◆모든 것을 앗아간 슈퍼태풍 하이옌

세계일보는 지난 3∼9일 지난해 슈퍼태풍 하이옌이 강타한 필리핀의 사마르 섬과 레이테 섬을 9개월 만에 찾았다. 하이옌이 불어닥친 당시 두 섬에서만 43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피해가 가장 컸던 레이테 섬에서는 건물 80%가 무너졌고, 주도인 인구 20만의 타클로반에서는 1만명이 사망했다. 사마르 섬에서도 사망·실종자가 2300명이나 발생했다.

두 섬에서는 피해 복구 작업이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타클로반에는 지난달부터 외곽지역에 전기가 들어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난민 텐트와 임시 가옥을 전전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외벽이 무너진 공항에서는 짐을 실어나르는 컨베이어 벨트가 앙상한 철골구조를 드러낸 채 멈춰서 있었다. 타클로반 북부 아니봉 지역에는 육지로 밀려 올라온 배가 가옥에 처박힌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소도시는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하이옌이 맨 처음 할퀴고 지나간 사마르 섬 동남부 끝자락의 도시 기완은 학교와 대피소 건물을 제외하고는 멀쩡한 건물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섬의 주요 도로가 곳곳에서 끊겨 물자 수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타클로반에서 만난 대부분 주민들은 “태어나서 수많은 태풍을 봤지만 이렇게 강력한 바람은 처음 봤다”고 입을 모았다. 사마르 섬과 레이테 섬을 강타한 하이옌은 순간 최대풍속 379㎞/h(미국 합동태풍경보센터 집계)로 태풍 관측 사상 가장 강력한 것으로 기록됐다.

기완의 크리스토퍼 신 곤살레스 시장은 “국제 NGO의 도움으로 복구 작업을 진행 중이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면서 “기후 변화로 인해 이런 태풍이 많아질 것이라고 전망돼 제대로 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계일보

슈퍼태풍 하이옌의 영향으로 육지로 밀려온 배가 지난 8일 필리핀 레이테섬의 주도 타클로반 북부의 아니봉 지역에 9개월째 방치돼 있다. 지난해 11월 타클로반에서는 하이옌의 영향으로 1만여명이 사망하고 수십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초강력 태풍의 원인 ‘기후 변화’


전문가들은 슈퍼 태풍이 언제든 다시 필리핀에 불어 닥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필리핀 기상청에 따르면 필리핀에는 연간 평균 20∼22개의 태풍이 발생한다. 올해는 30여개의 태풍이 강타했다. 태풍의 강도도 세졌다.

지난달 16일에도 태풍 ‘람마순’이 필리핀에 상륙해 11명이 사망하고 35만명이 대피했다. 순간 최대 풍속이 200㎞/h에 달했던 람마순으로 수도 마닐라의 대표적 상업지구 마카티를 비롯해 다수 지역이 정전됐으며 이를 복구하는 데 3일이 걸렸다.

전문가들은 하이옌과 같은 슈퍼태풍의 원인을 세계적인 기후 변화에 따른 온도 상승에서 찾고 있다. 초강력 태풍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높은 해수 온도, 많은 수증기량 등 다양한 조건이 필요하다. 하이옌은 필리핀 주변 해수면 온도가 29도에 달한 것이 주요 발생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지난 4∼9일 필리핀 민다나오섬 다바오의 아테네오 데 다바오 대학에서 열린 ‘재생 에너지와 석탄에 대한 국민 회의’ 기간 세계일보와 만난 필리핀 기후 정의 운동(PMCJ)의 활동가 사무엘 곰바우는 “최근 필리핀에 태풍이 자주 발생하는 원인을 해수면 온도 상승에 따른 기후 변화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곰바우는 “필리핀은 세계적으로 바누아투, 몰디브 다음으로 기후 변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곳”이라며 “섬으로 구성된 나라여서 해수면 상승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적인 협동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의에 참석한 기후 변화 전문가 조지 아란세스는 “세계적으로 바닷물의 온도가 다른 지역과 함께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 최근 이 균형이 무너졌다”며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지역 해수 온도가 상승해 태풍이 발생하기 좋은 환경으로 변했다”고 설명했다.

타클로반·기완=글, 사진 정선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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