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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쇼핑 뿐인 명동 … 모던보이 낭만시대 추억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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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명동의 재발견

1930년대 청춘들 유행 본거지

신세계백화점 앞서 '고히' 한 잔

중앙일보

우정사업본부 포스트타워(옛 우정총국 자리)에서 본 한국은행 사거리. 명동의 역사가 응축된 이 곳은 미래유산 답사길의 시작점이다. [강정현 기자]


20일 오후 서울 명동. 을지로 입구에서 중앙로로 이어지는 쇼핑의 거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인파로 넘쳐났다. 길을 따라 건물 1층마다 늘어서 있는 화장품 상점 앞에는 직원들이 나와 중국어·일본어로 목청을 높여 호객행위를 하고 있고 인근 도로엔 단체관광객이 타고 온 버스들이 줄지어 정차해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인 관광객 중 82.8%가 명동을 찾았다. 목적은 단연 쇼핑(82.5%)이다. 하지만 그나마 외국인들이 명동에서 접할 수 있는 이국적 경험이라고 할 만한 건 ‘토네이도 감자’와 ‘30㎝ 소프트콘’ 같은 길거리음식뿐이었다. 이곳이 100년 역사를 지닌 대한민국 수도의 중심임을 알릴 수 있는 문화 콘텐트의 부재는 금세 티가 난다. 명동은 외국인이 가장 실망한 관광지 3위(2013년)에 올랐다. 중앙로에서 만난 관광객 마크 쿄이(27·프랑스)는 “명동은 어느 나라에 가도 볼 수 있는 게 한데 모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며 “요즘은 중국 관광객의 쇼핑지로만 기능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명동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길이 있다. 본지가 ‘서울시가 선정한 미래유산’과 ‘정부가 지정한 문화재’를 꿰어 ‘명동의 또 다른 동선’을 제안하는 이유다. 이 길에는 조선 후기부터 100년 넘게 축적된 콘텐트가 넘친다. 조선은행(한국은행) 본관과 제2별관, 미쓰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 본관), 조선저축은행(스탠다드차타드 제일지점)이 모여 있는 한국은행 사거리. 유네스코 회관과 YWCA 회관, 명동성당과 주교관, 명동예술극장과 삼일로 창고극장에 이르기까지. 1.3㎞의 짧은 동선에 이런 유산들이 모두 담겨 있다. 경기대 엄서호 교수는 “각각의 문화재를 엮어 하나의 브랜드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박원순 서울시장이 늘 강조하는 창조경제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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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 외의 다른 콘텐트가 부족한 명동에 가치를 더하기 위해 본지는 새로운 동선을 제안한다. 한국 은행 사거리(⑤번)에서 시작해 명동역으로 이어지는 1.3㎞의 이 길에는 서울시 미래유산 9개와 정부 지정 문화재 등이 줄지어 있다. 명동성당(10번) 앞 줄지어 앉아 민주화를 부르짖던 역사를 되새기고, 옛 국립극장(7번)과 삼일로 창고극장(12번)에서 문화공연을 향유하다 보면 새로운 명동을 발견하게 된다. 신세계 본점 : 이상의 날개에 등장하는 미스코시 경성점 스탠다드차타드 제일지점 : 1935년의 내부 보존(※서울시 유형문화재 71호) 한국은행 제2별관 : 1933년 지어진 석조건축물 화폐박물관(구 한국은행) : 1912년 지어진 일제의 대표 건물(※사직 제280호) 한국은행 사거리 : 3·1운동, 6월 항쟁이 벌어진 곳 유네스코 빌딩 : 1966년 지어진 명동의 랜드마크 명동예술극장 : 과거 국립극장 자리 YMCA 건물 : 1967년 준공 후 여성운동 중심 역할 가톨릭회관 : 1967년 건축가 김정수의 합리주의 건물 명동성당 : 80년대 민주화 운동 중심(※사직 258호) 영락교회 : 1955년 지어진 예수교 장로회 대표 건축물 상일로 창고 극장 : 70년대부터 연극인들의 사랑방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동선의 시작점인 한국은행 사거리는 20세기 초반 석조 건축물이 잘 보존된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진고개(本町·혼마치)라 불린 이곳은 ‘모던뽀이(modern boy)’와 ‘모던껄(modern girl)’의 태동지다. ‘백화점서 난찌(런치) 먹고 다방서 고히(커피) 먹고 양장을 맞춰입는 것’은 모던라이프의 상징이었다. 배봉균 신세계상업사박물관장은 “상품의 품질이나 가격이 아니라 브랜드 같은 상품의 기호적 가치를 처음으로 소개한 곳이 이 일대였다”고 말했다. 당시 신문은 이렇게 표현했다. “1930년의 녀름에는 더욱 노골화하야 진고개 찻집·빙수집·우동집·카페의 파루수룸한 전등 아래에 백의(白衣)껄(girl)이 사나희(사나이)와 사나희의 날개에 가리워 전긔류성기(축음기) 소리에 마추어 눈썹을 치올렷다.”

30년대 경성 생활사가 담긴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박태원)은 이곳이 배경이다. “조선은행 앞에서 구보는 전차를 내려 (중략) 이제 마땅히 한 잔의 홍차를 즐겨야 할 것이다.” 이상은 소설 『날개』에서 미쓰코시(신세계) 위에서 내려다본 거리를 묘사한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작가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 등장하는 미군 초상화 그리는 무명화가는 바로 박수근 화백이다. 미쓰코시가 전후에 미군 PX로 쓰였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연구소 한진수 독서지도사는 “자녀와 작품을 함께 읽고 명동에 와서 하나 하나 살펴보면 즐거움은 배가 될 것”이라며 “부모는 자녀의 스토리텔러가 되고 명동의 가치는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은행 사거리는 독립운동의 시발점이다. 1919년 3월 1일 대한문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고 조선총독부를 향해 행진하던 만세행렬이 3000여 명으로 늘어난 것도 이곳이다. 학생과 시민들이 추가로 합류하자 이들은 본정통(本町通·충무로) 진입을 막는 일제 헌병경찰과 충돌해 1200여 명이 다쳤다. 한국은행 오른쪽 인도 표지석엔 당시 사건이 기록돼 있다.

명동 중앙로 쪽으로 걸어오면 민주화의 역사와 만나게 된다. 신형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홍보실장은 “명동에 위치한 증권사·은행 등에 다니던 직장인들이 시국강연대회를 여는 학생들을 향해 하얀 손수건을 흔들거나 박수를 치곤 했다”고 회상했다. 80년대 대학생의 소도(蘇塗)였던 명동성당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과 명동성당의 주임 함세웅 신부는 경찰이 성당에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YWCA 회관은 함석헌 등 재야 인사들이 체육관선거에 반발해 결혼식으로 위장한 집회를 열었던 곳이다. 이들은 ‘민주정부’의 앞 글자를 따 ‘윤정민 양’이라는 가공의 여성을 만들어 청첩장을 찍었다. 신 실장은 “민주화의 역사도 관광코스가 될 수 있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명동예술극장’과 ‘삼일로 창고극장’은 시민과 기업이 자발적으로 미래유산을 지켜낸 모범사례다. 93년 명동예술극장(옛 명동국립극장) 소유주 대한종합금융이 건물을 허물고 10층 규모의 신사옥을 건설하는 재개발계획을 발표했다. 극장을 무대로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시민과 주변 상인들이 반발했다. 극장 지키기 운동에 나섰던 김장환 명동상가번영회 명예회장은 “명동은 청년과 문인이 모여들던 낭만의 중심지였지만 80년대를 거치며 껍데기만 남은 상황이었다”며 “뒤늦게 명동의 낭만적 가치를 살려야겠다는 목소리가 쏟아졌다”고 말했다. 당시 ‘명동국립극장 되살리기 100만 서명운동’이 벌어졌는데, 김수환 추기경이 1호 서명자였고 송월주 스님이 2호 서명자였다. 결국 2005년 국립극장 재개발계획은 백지화됐고, 리모델링을 통해 ‘명동예술극장’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삼일로 창고극장도 극적으로 보존됐다. 2011년 극장은 경영상 어려움으로 폐관 위기에 처했다. 이때 태광그룹이 5억원을 지원해 카페 등을 갖춘 소극장으로 재개관했다. 시민들은 온·오프라인에서 재정위기 극복을 위한 ‘연간 회원권 구매운동’을 펼쳤다. 한국모금가협회 황신애 이사는 “한국에서 기부는 돈을 내는 것으로만 한정돼 있는데 실은 예술과 가치를 지키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기부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구혜진 기자

◆서울시 미래유산=서울을 대표하는 특색 있는 건물과 기념물, 주요 인물·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장소와 생활사 등 유·무형의 것들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하고 있다.

구혜진 기자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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