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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손학규, 정치서 손떼다…21년 정치여정 마침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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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손학규 미소 (서울=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정계은퇴를 선언한 새정치민주연합 손학규 상임고문이 31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인사하며 미소짓고 있다. 손 고문은 7·30 경기 수원 병(팔달) 보궐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2014.7.31 zjin@yna.co.kr


(서울=연합뉴스) 강건택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손학규 상임고문이 31일 7·30 재·보궐선거 패배를 뒤로하고 21년간의 정치인생에 스스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날 국회 기자회견을 통한 정계 은퇴 선언은 때로는 보수 정당의 소장 개혁파로서, 때로는 진보 정당의 합리적 민주주의자로서 여야를 넘나들며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정치 거목의 퇴장치고는 갑작스럽고 단출하기까지 했다.

숙연함 속에 눈물의 회견이 될 것이라는 예견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시종 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정치인 손학규'의 마지막 장면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정리했다.

한때 언론인들이 주저없이 '대통령감 0순위'로 꼽았던 '여의도 신사' 손학규의 퇴장은 밝았던 만큼 역설적으로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지금은 부드러운 온건파 이미지가 강하지만 손 고문은 청년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으로 두 번 투옥되고, 2년 넘게 수배를 당한 대표적 재야인사 중 한 명이었다.

1947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시절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참가하는 등 일찌감치 뚜렷한 사회참여 의식을 보였다.

당시 법대에 다니던 고(故) 조영래 변호사, 상대에 다니던 고(故) 김근태 전 의원과 함께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불리며 학생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군 제대 이후에는 소설가 황석영씨와 함께 자취를 하며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했고, 청계천 판자촌에서 몸소 생활하면서 빈민운동의 대부인 고(故) 제정구 의원과 인연을 맺었다.

1970년대 반유신 독재투쟁의 선봉에 섰던 손 고문은 1979년 부마항쟁 때 체포돼 심한 고문을 당하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로 겨우 풀려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80년 영국 유학을 떠나면서 정치학자로 변신, 1988년 옥스퍼드대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인하대와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진보정치 이론가로 명성을 날리던 손 고문은 1993년 정치개혁 의지를 천명한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발탁돼 민자당 소속으로 광명을 보궐선거에서 당선, 정계에 발을 들였다.

초선으로는 드물게 당 대변인으로 기용되는 등 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1996년 15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뒤 보건복지부 장관과 한나라당 총재 비서실장을 차례로 역임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1998년 지방선거에서 경기지사에 도전했다가 고배를 들었으나, 16대 총선을 통해 3선을 달성한 데 이어 2002년 경기지사 재도전에서 결국 승리를 거머쥐며 단숨에 대선주자급 거물로 발돋움했다.

지난 2006년 경기지사 임기를 마치자마자 농·어촌과 탄광 등 전국 곳곳을 돌아보는 '100일 민심대장정'을 펼쳐 서민과 함께 호흡한 것은 그의 대권 꿈을 보여준 극명한 사례로 해석됐다.

그러나 손 고문은 2007년 3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방식의 한계를 지적하며 탈당,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로 갈아타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렸다.

한나라당 시절에도 당론과 달리 햇볕정책에 찬성하는 등 당내 비주류 개혁파로서 성향상 당시 범여권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대선을 앞둔 차기 주자의 이적인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시베리아를 넘어가겠다"는 스스로의 표현대로 험로에 나선 손 고문은 '대세론'에도 불구하고 정동영 후보의 탄탄한 조직을 넘지 못해 본선 무대에 오르지는 못했다.

대선 패배 직후인 2008년 초 당 대표로 구원등판해 총선을 진두지휘하며 '정치 1번지'인 서울 종로에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박진 의원에게 무릎을 꿇어 당적 변경 후 연패의 아픔을 맛보기도 했다.

이후 춘천 칩거에 들어갔던 손 고문은 2010년 지방선거 패배 후 다시 당 대표로 선출되며 화려하게 부활, 이듬해 4·27 재보선에서는 민주당의 '사지(死地)'인 경기 분당을에서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를 꺾으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럼에도 대권 재수에 나선 201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친노(친노무현)' 세력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문재인 의원에게 다시 패하며 대선 출마의 꿈을 또다시 접어야 했다.

지난해 8개월 간의 독일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손 고문은 고심 끝에 이번 7·30 재보선에서 다시 한 번 여당의 '텃밭'인 경기 수원병(팔달)에 몸을 던졌다.

"팔달이 제 마지막 지역구"라며 배수진을 친 손 고문의 마지막 승부수도 여름휴가철 낮은 투표율과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벽을 넘지 못함으로써 결국 수포가 되고 말았다.

수차례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몇 번이나 다시 일어선 그의 정치역정도 이번 원내 재입성 실패로 사실상 힘을 잃은 것으로 분석된다. 앞으로 2년 가까이 선거가 거의 없는 정치일정상 다음 대선 때 만 70세가 되는 손 고문이 그 사이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에 손 고문은 주변의 만류에도 31일 기자회견을 열어 "정치인은 선거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오랜 신념이다. 이번 7·30 재보선에서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고자 한다"라며 20여년 여정의 막을 내리고 '시민 손학규'로 돌아갔다.

firstcircl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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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정계은퇴 선언 (서울=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손학규 상임고문이 31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정계은퇴를 전격 선언하고 있다. 손 고문은 7·30 경기 수원 병(팔달) 보궐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2014.7.31 zj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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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은퇴 선언하는 손학규 (서울=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손학규 상임고문이 31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정계은퇴를 전격 선언하고 있다. 손 고문은 7·30 경기 수원 병(팔달) 보궐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2014.7.31 zj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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