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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구둣방 견습공, 연매출 500억원 자산가 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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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부자]<1-1>김원길 안토니제화 대표 "10년 후 매년 100억원 기부가 꿈"]

머니투데이

김원길 안토니 대표/사진=이기범 기자


지난달 1일 프로골퍼 김우현(23·바이네르) 선수가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에서 첫 우승에 성공했다. 이날 김 선수보다 더 기뻐하던 남성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김원길(53) 안토니 대표. 아들 나이였던 1984년 23세의 나이로 전국기능경기대회 제화부문 동상을 차지했던 김 대표는 자신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아들을 보며 뿌듯해했다.

김 선수는 프로 첫 승에 그치지 않고 이어지는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2연승을 거뒀다. 김 대표는 아들의 2연승 시점에 맞춰 한국 남자 프로골프 발전을 위해 총상금 5억원 규모의 대회를 신설하기로 마음먹었다. 바이네르 파인리즈 오픈 대회는 당장 올해 8월 21일 개최된다.

이 같은 통 큰 결정은 김 대표가 지금껏 살아온 나눔의 인생과 맞닿아있다. 김 대표는 지난해 6억 여원을 나눔을 위해 사용하고 2012년 아너소사이어티에도 가입했다. "내가 어려웠던 시절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을 어떻게 잊느냐"고 말하는 그는 이 시대의 '당당한 부자'다.

◇맨 발로 이룬 구두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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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길 안토니 대표/사진=이기범 기자


충남 당진 출신의 김 대표는 중학교 졸업 후 고향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막노동도 해보고 페인트칠, 농장에서도 일했던 그는 작은 아버지의 구둣방에서 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김 대표가 17세가 되던 해 "그래도 너는 젊은데 서울에서 기술을 배워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듣고는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서울에는 마땅한 거처도 없었다. 영등포에 도착해 구둣방을 헤맸고 그래도 하루 만에 먹여주고 재워줄 수 있다는 구둣방에서 견습공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이른 봄 일을 시작해 장마가 되자 일감이 급격히 줄었다. 주인은 김 대표에게 "가을에 다시 오라"며 다른 일을 찾을 것을 권유했다.

그 때 들어간 곳이 당시 유명 브랜드였던 '케리부룩'에 납품하는 협력 업체였다. 케리부룩 본사에서 일하고 싶었던 김 대표는 본사에서 직원이 올 때 마다 열심히 인사를 하며 친분을 쌓았고 몇 년 뒤 케리부룩 본사로 자리를 옮겼다.

케리부룩은 김 대표 젊은 날과 뗄 수 없는 회사다. 1984년 전국기능경기대회를 약 70일 앞두고 당초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던 친구가 회사를 떠났다. 김 대표는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졸랐다. 군침이 도는 것은 금상 타이틀보다도 상금이었다. 당시 금상 상금은 무려 500만원에 달했다.

김 대표는 "당시 돈으로는 20평 아파트 전세금이었다"며 "남성화는 내가 하던 분야가 아니었지만 2개월 동안 훈련을 하고 대회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경기도 대표로 참여한 김 대표는 당당히 동상을 받았고 상금으로도 100만원을 받았다. 물론 스승의 양복 한 벌과 주위 감사 표시로 100만원은 빠르게 증발됐다.

◇바이네르 판매사 안토니에서 안토니 바이네르로…

기능공이었던 그는 약 100만원의 월급을 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여기에 만족하고 구두장인으로 구두를 만드는 데 한평생을 바칠 수도 있었지만 직접 한 족, 한 족을 만드는 것보다 관리직이 되면 더 많은 구두를 생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월급이 4분의 1로 줄어드는 고통을 감내하고서 관리자로 변신했다. 관리자로 일하며 출고, 포장, 검수, 생산기획 등을 두루 배운 김 대표는 케리부룩을 떠나 마침내 1991년 자신의 회사를 창업했다.

시작은 물론 미약했다. 3명이 창업해 한 일은 케리부룩 구두를 파는 일이었다.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고 3년 뒤인 1994년에는 법인 회사로 전환했다. 직접 구두를 생산해 케리부룩 로열티를 지불하고 판매를 막 늘려나가던 때였다.

그 해에는 유난히 부침이 심했다. 케리부룩 대표가 불법 상품권 5만 여장을 팔다가 그해 2월 회사를 부도내고 잠적하고 만 것. 잘나가던 김 대표에게는 직격탄이었다. 어떻게든 재고를 줄이면서 살길을 모색한 곳이 이탈리아 바이네르사였다.

김 대표는 "이탈리아 구두전시회를 다니며 수천 개 업체를 봤지만 바이네르만한 곳이 없었다"며 "우리가 한국에 당신들의 구두를 팔겠다고 말했지만 규모가 작다보니 쳐다보지도 않더라"라고 회상했다.

현재 안토니의 연매출은 500억원 가량이지만 당시 안토니는 연매출 10억여 원을 올리던 회사였다. 세계 속 한국의 이미지도 지금과는 다를 때였다. 질 수 없다는 생각에 김 대표는 한 컨테이너 물량의 선주문했다. 그제야 바이네르 측에서도 거래를 허락했다. 무리한 주문이었지만 김 대표는 주문 물량을 모두 판매했다.

안토니의 위상도 점점 올라갔다. 어느새 바이네르 거래국 중에서 시장 장악력은 안토니가 최고라는 평가를 듣게 됐다. 때마침 바이네르가 무리하게 홍콩과 이탈리아에서 동시 상장을 추진하다가 경영악화가 된 시점이었다. 김 대표는 승부수를 띄웠다. 안토니는 2011년 바이네르를 인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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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길 안토니 대표/사진=이기범 기자


◇"10년 뒤에는 100억원 환원하고 싶다"

김 대표의 사회 환원 방법은 단순히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금을 내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가 가장 신경을 쓰는 분야는 육군 훈련병을 위한 강연이다. 9사단에는 3년 전부터, 1사단에는 지난해 후반기부터 기수마다 빼먹지 않고 강연을 나갔다.

'나도 멋진 인생의 주인공이다'라는 주제의 강연은 '선임을 공경하고 후임을 아껴라'라는 내용이 골자다. 강연 요약본과 함께 자신이 직접 작사작곡한 '힘들어도 괜찮아'라는 노래가 프린트 된 유인물도 준비해놨을 정도다.

강연에 그치지 않는다. 매년 병사 8명을 뽑아 호주에 1주일간 연수를 보내주고 4명에게는 7박8일 유럽 연수를 지원한다. 멋진 조언과 함께 연수의 기회도 제공하니 장병들에게는 인기가 최고다. 제대한 장병이 자신의 동료들에게도 꼭 들려주고 싶다고 간청해 몇 차례 대학교 강단에 선 경험도 있다.

알음알음 알게 된 대학생 10여명의 멘토 역할도 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창업을 꿈꾸는 학생으로 김 대표가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다. 돈을 버는 사업가보다는 경쟁력을 보유한 사업가가 되라고 가르친단다. 김 대표는 "멋진 사업가 10명을 기르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본인 강연 내용과 마찬가지로 후배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배 공경에도 신경 쓰고 있다. 지난해 서울, 부산, 광주, 당진 등에서 효도잔치를 열어 어른들을 모셨다. 여의도에서 열린 효도잔치에는 1400여명의 어르신이 참여했다. 고향인 당진에서는 집집마다 구두를 선물하기도 했다. 올해는 효도잔치 횟수를 늘리려 했으나 사회분위기가 뒤숭숭해 지금까지 2차례만 진행했다.

이밖에도 2012년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했고, 지난해에는 국세청에서 아름다운 납세자상을 받았다. 김 대표의 명함 우측 상단에는 국립암센터 홍보대사라는 글씨가 새겨져있다.

3년 전 이탈리아 바이네르를 인수한 김 대표는 아시아와 미국 시장 진출이 새로운 목표다. 10년 내 세계인이 가장 신고 싶어 하는 구두 회사로 발전시키는 것이 꿈이다. 그리고 그만큼 봉사하고 나누며 즐겁게 살고 싶단다. 직원들을 위해 회사에 준비해 둔 벤츠 승용차, 경기도 청평호에 마련해 둔 수상 놀이터도 혼자가 아닌 함께 즐기며 재미있게 살기 위한 증거다. 직원과 지인들에게 수상스키, 웨이크보드, 스키 등을 가르쳐 주는 것이 그에겐 즐거움이다.

김 대표는 "지금껏 파란만장했지만 소중하고 후회남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며 "10년 뒤 매년 100억원을 기부하는 것이 꿈"이라고 전했다.

홍재의기자 hj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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