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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5만원 위자료" "데이트비 반환" … 감정소송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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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씸해서, 억울해서 … 법정까지

하루 180건, 2분에 1건꼴 다뤄

수 억 분쟁 이기고 화난다며 소송

몸싸움 벌인 자매, 치료비 청구도

중앙일보

박동복 서울중앙지법 판사가 이달에 공시송달로 처리해야 할 소송 서류를 살펴보고 있다. 서류에 붙은 노란 포스트잇에 선고 일자와 시간이 적혀 있다. [오종택 기자]


서울중앙지법 제2별관 202호 민사소액 법정. 피고석에 앉은 모녀는 흥분 상태였다. 해야 할 말을 공책에 적어온 어머니가 말을 더듬자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딸이 나섰다. “계약 당시 복비는 분명 0.5% 드리기로 했다고요. 사장님이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이 말에 50대 부동산 중개인은 발끈했다. “무슨 말이세요. 0.9%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약속한 중개수수료가 “150만원”이라는 모녀와 “270만원”이라는 중개인 간에 한 치의 양보 없는 말다툼이 이어졌다. 2006년 임용돼 지난 1년6개월간 민사소액 재판을 해 온 박동복(37·사법연수원 35기) 판사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중재에 나섰다. “일단 조정을 해보겠습니다. 따님이라고 하셨죠. 당사자가 아니신데 같이 말씀을 하시려면 위임장을 내셔야 해요.”

민사소액 재판은 2000만원 이하의 사건을 간소한 절차로 처리하는 절차다. 서울중앙지법을 비롯해 전국 법원에 들어오는 민사 사건의 70% 이상이 소액사건이다. 통신사 요금 분쟁, 교통사고 보험금 청구처럼 서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사건들이 주종을 이룬다. 서울중앙지법의 경우 20개 단독 재판부에서 민사소액 사건을 처리하고 있다.

지난 22일 박 판사가 오전 10시부터 진행한 사건은 모두 180건. 평소보다 30건가량이 많다. 2분에 한 건을 해야 스케줄에 맞출 수 있다. 박 판사는 “재판이 지연되면 방청석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이들의 표정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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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액 재판은 99.9%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액수도 적고 유명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액 재판의 흐름을 살피면 세태가 보인다. 요즘엔 유난히 “괘씸해서” “분이 안 풀려서” 법정을 찾는 이가 많다고 한다. 5만원짜리 위자료 소송, 수억원대 토지 분쟁에서 이기고도 “그동안 마음고생 한 게 화난다”며 100만원을 청구한 사건도 있다. 일종의 ‘감정(感情)소송’이다.

이날 오후 202호 법정에 선 김씨 자매 사건도 그런 종류였다. 언니(44)와 여동생(35)은 술을 마시다 말싸움을 시작해 몸싸움까지 벌였다. 다리를 다친 동생은 치료비 210만원과 정신적 위자료 등 1000만원을 달라고 소송을 냈다. 자매는 소녀 시절의 일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박 판사가 조정을 권고해 조정위원실로 자리를 옮겼지만 자매는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결별 후 데이트 비용을 청구한 남성도 있었다. 과거의 연인은 소액사건으론 드물게 변호인까지 선임했다. 남성 측 입장은 확고했다. “사귀면서 쓴 데이트 비용과 수차례 걸쳐 빌려준 돈을 포함해 총 1900만원을 돌려 달라.” 여성 쪽은 “데이트 비용은 함께 쓴 것 아니냐”며 “돈을 빌린 게 아니라 그냥 줘서 받은 것”이라고 맞섰다. 심창섭 민사 7단독(소액전담) 판사는 “옛날 같으면 서로 미안하다고 하면 될 일들로 법정까지 오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소액재판 법정은 서민 경제의 온도를 실시간으로 체감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요즘은 서민경제 악화를 알리는 ‘빨간불’이 켜지고 있다. ○○통신, ○○보험, ○○신용, ○○머니…. 소액 법정의 ‘단골 원고’들이다. 요금을 내지 못하거나 대출금을 갚지 못해 고소당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피고의 주소지가 확인되지 않아 법원 게시판에 알리는 공시송달로 처리되는 사건의 증가는 우려스러울 정도다. 판사들은 한 달 중 하루를 아예 공시송달 사건들을 몰아서 선고하고 있다. 판사당 한 달에 약 1000건씩에 달한다. 박 판사는 “집 없이 떠도는 사람이 그만큼 늘고 있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공시송달로 승소한 업체들은 채권 액면가의 10% 정도에 추심업체에 넘기고, 추심업체들은 채무자 추적에 들어간다.

이날 13건에 달하는 휴대전화 요금 청구 사건 피고 중엔 유난히 60~70대 노인이 많았다. 전모씨는 “누군가 내 개인정보를 도용해 휴대전화를 만들어 쓰는 바람에 150만원짜리 독촉장이 날아왔다”고 울상을 지었다. 원고인 통신사 직원은 “정보 도용이 맞는 것 같다”고 인정했다. “이기셨어요. 요금은 안 내셔도 됩니다.” 박 판사의 설명에도 전씨는 계속 불안해했다. 박 판사의 법정 문은 오후 6시에 닫혔다. 박 판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정리할 서류를 분류하고 판결문을 쓰면 됩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다 못 하겠네요.”

글=전영선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전영선.오종택 기자 Jongtack@joongang.co.kr

▶오종택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com/ojt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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