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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일본 경찰, 조선인 여학생들 알몸 만들어 능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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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중국신문 실린 3·1운동 참상 책 펴내

“‘만세 소녀’ 양팔 잘리고…

십자가에 묶여 채찍·몽둥이질 당해”


독립기념관(관장 김능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중국신문한국독립운동기사집(Ⅱ)-3·1운동 편>을 발간했다고 29일 밝혔다.

이 자료집은 1919년 당시 중국에서 간행된 <민국일보>(民國日報), <신문보>(新聞新), <중화신보>(中華新新), <시사신보>(時事新報) 등 총 6종의 신문에 실린 3·1운동 관련 기사를 수집하고 내용을 번역해 영인한 원문과 함께 담은 것이다. 3·1 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사진자료도 실었다.

자료집을 보면, 중국 신문들은 입장과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일제의 잔악한 탄압상과 이에 대한 한인(한국인·조선인)의 저항을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예컨대 3·1운동에 나선 여학생들을 능욕하거나 한인을 처리하는 잔인한 방법을 다룬 기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서울 한국 독립운동에서 발생한 일이다. 여러 여학생들이 독립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들은 강박적으로 여학생들의 옷을 벗겨 알몸[赤身]으로 거리에 내세워 능욕하였다. 지금 같은 문명 세계 어떻게 이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을까! 하늘이 노할 노릇이다. 이뿐만 아니다. 1학년에 다니는 어린 학생이 오른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높이 외치자 일본 헌병은 검으로 그의 오른손을 잘랐다. 오른손이 잘린 학생은 다시 왼손에 한국 국기를 들고 더욱 높은 소리로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자 일본 헌병은 다시 그의 왼손마저 잘랐다. 두 손이 잘려 나간 학생은 더욱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부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검으로 학생의 가슴을 찔렀다. 이렇게 학생은 검에 찔려 죽어갔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이 끔직한 광경을 목격한 한 서양인이 사진을 찍어 남기려고 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끌려갔다. 서울 각지에서 일본군이 자행한 잔인무도한 폭행을 폭로하자면 부수기지이다. 하늘이 똑바로 내려 보고 있다. 정의가 반드시 승리할 날이 올 것이다.” (<국민공보>1919년 4월 12일 제2면, ‘일본인이 부녀를 능욕하는 방법’)

“사병(일본군)이 총검을 세운 총을 들고 시위대를 향해 돌진하면서 마구 찔러댔다. 시위대는 쫓겨서 산위로 올라갔다. 한인들은 산 정상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환호하였다. 멀리서 바라보니 온통 흰색이다. (중략) 일본 사병 두명이 한인을 끼고 내려왔다. 한인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또 다른 사병 한명이 뒤에서 총으로 한인을 가격했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아 지극히 야만스럽게 발길질 해댔다. 또 총으로 힘껏 가격했다. 보는 사람도 그 광경이 처참하여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우리와 함께 동행하였던 선교사가 큰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보건대 이 사람은 아무런 죄도 없는데 이런 잔인한 학대를 당해야 합니까?” (<민국일보> 1919년 3월27일 제2장 제6판, ‘일본이 한인을 처리하는 잔인한 방법’)

1919년 3·1운동 발발 당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한국의 모든 언론 기관을 통제했으며, 친일적인 시각을 가진 기사만이 검열을 통과해 무사히 인쇄될 수 있었다. 일제는 3·1운동이 일어나자 국제여론의 악화를 우려해 그 진상을 축소·은폐하려 했지만 목숨을 건 저항 소식은 외국 기자들과 선교사들의 입을 타고 나라 밖으로 번져나갔다. 중국 신문들의 기사 출처가 <로이터> 통신 기사나 일본 신문 또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목격담이나 증언이 주를 이룬 것도 일제의 언론 통제 탓이 컸다. 이 때문에 3·1운동을 다룬 중국신문 기사들을 보면 풍문으로 전해지거나 정확성이 떨어지는 기사들도 더러 보인다. 하지만 직접 취재한 내용을 적거나 출처를 정확히 밝히기도 했다.

“로이터 통신 3월 31일 북경 전보. 일본인들이 한국 학생을 가혹하게 학대한 확실한소식을 입수하였다. 한국인 학생 몇 명이 체포되어 나무로 된 십자가에 묶인 채로 채찍과 몽둥이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한국 어느 감옥에서 풀려났다. 일본인들은 이들을 고문하면서 ‘너희들은 입에 예수를 달고 살지 않느냐. 내가 듣기로는 예수도 십자가에 묶여 고통을 당했다 하더라. 오늘 너희들도 그 맛을 보아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런 혹형을 당하고 석방된 사람을 보면 하나같이 온몸이 성한 데가없고 상처가 심하여 도저히 움직일 수 없다고 한다.” (<민국일보> 1919년 4월 4일 제2장 제2판, ‘일본 군경의 조선인 학대’)

김태국 중국 연변대학교 인문사회과학학원 교수는 이 책의 해제에서 “각 신문사의 정치적 성향, 발행인·편집인·기자의 사상이나 역사관에 따라 3·1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고 밝힌다. 같은 신문이라도 국호를 고려·조선·한국이라고 다르게 사용하거나 사람들을 가리킬 때도 한국인·한인·한교·조선인·선인 등으로 다양하게 쓴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3·1운동에 대한 호칭도 소란·변란·동란·폭란·독립운동·복국운동·혁명 등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김 교수는 “신문의 특성상 보도의 신속성을 중시하는 관계로, 중국에서 한국의 3·1운동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의 정확성에서 다소 미흡한 점이 발견될 수도 있다”면서도 “하지만 조선총독부가 3·1운동에 대하여 축소·은폐하기에 사력을 다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신문에 실린 3·1운동 관련 기사는 3·1운동의 현장성을 풍성하게 하여주고 사실성을 크게 뒷받침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책은 2019년에 100주년을 맡게될 3·1운동을 기념하는 일련의 사업 가운데 하나로 발간된 것이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지난 2008년 <중국신문한국독립운동기사집(Ⅰ)-조선의용군편>, 2009년과 2012년에는 <일본신문한국독립운동기사집-3·1운동편>(Ⅰ)·(Ⅱ)·(Ⅲ)을 펴낸 바 있다. 오는 2019년까지 구미 지역을 포함한 외국 신문에 보도된 3·1운동 기사들을 발췌하여 자료집을 계속 간행할 계획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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