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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김세환 “남자가 나이 들면 직업보다 취미가 인생의 질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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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경이 만난 사람-영원한 청년 가수 김세환

·“제가 매직넘버를 하나 만들었어요. ‘6080888’ 60세부터 80세까지 팔팔하게 자전거를 타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바람을 담았죠.”



변사체로 발견된 교주, 청문회에 서보지도 못하고 돌아선 총리와 장관 후보들, 병상에 누워 있거나 감옥에 있는 재벌 회장들…. 이들을 보면서 문득 ‘잘 산다는 것이 뭘까’란 의문이 든다. 주위를 둘러봐도 다들 우울하고 불안한 얼굴들이 많다.

뭔가 새로운 기운이 필요한 시점. 그래, 그가 있었다. 항상 청년 같은 분위기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얼굴, 가수 김세환씨다. 67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쎄시봉’의 막내다. 그에게 변하지 않은 게 또 하나 있다. 지금도 바쁘게 산다는 점이다. 식지 않는 쎄시봉의 인기와 더불어 여전히 전국 투어, 콘서트 등으로 정신이 없고, 자전거·사진·등산·골프·와인·스키 등의 취미생활까지 즐기느라 나이를 잊고 산다. 8월에는 자전거를 타고 유라시아 대장정에도 나설 참이다. 그는 도대체 무슨 비결이 있길래 나이 들어서도 이처럼 재미있게, 양명하게 사는 걸까.

경향신문

얼마 전 한 건강 관련 잡지의 표지 모델로 등장했더군요. 산악자전거를 타고 항상 청춘처럼 지낸다고요.

“제가 매직넘버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6080888’이에요. 60세부터 80세까지 팔팔(88)하게 자전거를 타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맨 마지막 8은 자전거의 바퀴 두 개를 의미하죠. 자전거 덕분에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어서 주위사람들에게도 자전거 예찬론을 펼칩니다.”

산악자전거를 타게 된 계기가 있나요.

“1986년 한국에 산악자전거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부터 산악자전거를 탔으니 거의 원조인 셈이죠. 각종 자전거 모델로 활동했고, 산악자전거 관련 책도 펴냈죠. 어느 땐 가수로서의 공연보다 산악자전거 스쿨에서 강사로 강의를 하는 스케줄이 더 많았어요. 86년 미국에서 우연히 산악자전거를 봤는데 첫눈에 반해 거금 800달러를 주고 샀습니다. 막상 사고 보니 호텔에 갖고 들어갈 일이며 한국에 갖고 올 일이 막막하더군요. 고민하다 공구를 사서 자전거를 통째로 분해했죠. 부품마다 그림을 그려 번호를 매긴 뒤 어떤 식으로 조립돼 있었는지를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무사히 한국에 돌아온 뒤 재조립했고 잘 안 되는 부분은 자전거가게에 가서 문의하며 겨우겨우 완성시켰어요. 그 산악자전거를 타고 집 근처 낮은 산으로 향했습니다. 힘들게 정상에 올라가 시원한 바람에 온몸을 맡기고 누워 있으려니 재벌, 대통령이 부럽지 않은 거예요. 그 맛을 못 잊어 또 타고 또 타고 하게 됐지요.”

자전거의 매력은 뭔가요.

“다른 운동과 달리 장비들을 꾸려서 옮길 필요가 없고 달랑 들고 나가면 어디나 갈 수 있다는 것이 환상적입니다. 또 헤드, 안경을 꼭 써야 하니 저같이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들에게는 신분을 감출 수 있어 좋죠. 자전거는 스스로 움직여 바람을 만들어내니까 항상 쾌적한 느낌을 줍니다. 굳이 운동할 시간을 따로 내지 않아도 되는 만큼 일상생활에서 가장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라는 게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죠. 특별히 의상을 갖춰 입을 필요가 없는 라디오방송이 있는 날이면 양재동 집에서 여의도 방송국까지 산악자전거를 타고 갑니다. 친구들과의 약속장소에도 웬만하면 산악자전거를 타고 참석합니다. 차 막힐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죠. 거리가 좀 멀다 싶으면 내려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탑니다. 무엇보다 이젠 자전거가 제 건강 주치의 역할을 합니다. 페달을 밟아보면 제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확인할 수 있거든요. 전날 술을 마셨다거나 속상한 일이 있으면 페달을 밟을 때의 상태가 확실히 다릅니다.”

산악자전거 가격이 제법 비싸던데요. 보통사람들은 구입하기가 힘들지 않나요.

“그건 각자 취향과 형편에 따라 결정할 일이죠. 시계도 단돈 만원짜리가 있는가 하면, 수억원짜리도 있지 않습니까. 자동차도 가격대가 천차만별이죠. 자전거도 처음에 탈 때부터 고가의 제품을 구입할 필요는 없어요. 다만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더 강렬한 자극을 느끼고 싶다면 투자를 해야죠.”

자전거 외에도 취미활동이 매우 다양합니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제가 많이 알아야 세상이 그만큼 확장되는 것이죠. 저는 지금도 매일 새벽에 일어나 신문, 뉴스도 보고 관심 가는 분야의 인터넷 사이트를 뒤적이며 상식을 쌓고 있습니다. 또 자전거·스키 등을 하다 보면 동호회 활동을 해서 많은 이들을 알게 돼 취미생활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지인들에게 ‘건강에 좋으니 너도 해보라’고 권유해서 고맙다는 인사도 받습니다. 남자들의 경우 나이 들어서는 직업보다는 취미가 인생의 질을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경향신문

취미활동에 가장 영향을 준 분은 누구인가요.

“부모님입니다. 아버지(연극배우 김동원 선생)는 우리 형제들에게 자유와 행복의 중요함을 일깨워주셨어요. ‘남녀칠세부동석’ 시절에도 크리스마스 때 여자친구들을 데려와 레코드를 틀어놓고 댄스파티를 하라고 권하실 만큼 개방적이셨고 카메라·음향기기 등을 사서 다양한 문화체험을 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서울대에 들어간 큰형은 아버지의 연극무대 사진을 촬영하려고 카메라를 배웠고, 저는 음악에 심취했죠.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다들 대학에 들어갔고 어린 시절의 풍성한 취미가 지금까지 즐거운 삶을 사는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항상 모범을 보이셨어요. 요즘 같은 장마철에 흙이 쓸려 내려오면 직접 우비를 입고 삽을 들고 나가서 집 입구와 동네 길의 흙을 치우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보고만 있겠어요. 마당의 잡초를 깎는 일도 우리에게 시키신 적이 없지만 아버지가 먼저 하시면 우리가 따라서 했죠. 어머니는 돈이 얼마 필요하다고 하면 ‘지갑에 있으니 가져가렴’이라고 말씀하셨어요. 항상 우리 형제를 믿어주셨습니다. 덕분에 그 흔한 ‘삥땅’을 할 이유가 없었어요. 저도 결혼 후 번 돈은 무조건 아내에게 줘서 맡깁니다. 서로 믿어주는 것, 그게 가정 평화의 기본 같아요.”

연예인인데 단 한 번도 여자문제나 음주운전 등의 스캔들이 없습니다.

“그것도 아버지 덕분입니다. 아버지는 항상 ‘연극배우는 등장도 중요하지만 퇴장도 중요하다’면서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형제는 ‘우리가 잘못하면 아버지에게 누가 된다’는 생각을 해서 항상 언행에 조심하며 살았습니다. 또 전 직업에서의 큰 야망도 없지만 여자문제나 다른 일에도 야심(?)이 없어요.”

다른 사람들도 ‘김세환씨가 화내거나 찡그린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칠순을 앞둔 지금까지 소년처럼 해맑은 모습을 간직하는 비결이 뭔지요.

“항상 감사하는 마음 덕분일 겁니다. 일상에 스트레스가 없어요. 연예인이 된 후에도 굴곡 없는 삶을 살았고…. 남들은 타고난 복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모든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같은 환경에서도 각각 받아들이는 감정은 다르거든요.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러시아워라 길이 막히면 막 짜증을 내고 상소리를 하며 남들에게도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 지금 시간이 가장 막힐 때지. 음악이나 들으며 천천히 가자’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막힐 시간을 감안해 항상 일찍 출발합니다. 대부분의 모임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저예요. 그렇게 항상 제 마음과 상황을 편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니 뭐 화낼 일도 없죠.”

하지만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잖습니까. 김 선생 아들 돌잔치에 4시간 늦게 도착하거나, 다른 친구들을 잔뜩 데려오는 쎄시봉 멤버들과는 어떻게 40여년이나 우정을 유지합니까.

“상대가 저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 되죠. 우리 멤버들은 정말 좋게 말하면 개성이 너무 강하고, 나쁘게 말하면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에요.(웃음) 다들 알다시피 조영남형은 엉뚱한 말을 잘하고, 윤형주형은 아주 논리적이고, 송창식형은 매일 오후 4시에 일어나 항상 같은 시간에 빙글빙들 도는 수련을 하느라 해외공연은 절대 못 가니, 어떤 일에 의견 통일을 하거나 스케줄 맞추기도 힘들어요. 어떤 형은 자기 종교가 불교라고 교회에 마련된 다른 멤버 상가에도 안 간다고 하고…. 막내인 제가 항상 조정, 협상, 설득하는 일을 맡아요. 아닌 것은 아니라고 진정성 있게 설명하면 다들 알아듣습니다. 그래도 신기한 것은 일단 노래를 부르면 연습을 안 해도 화음은 기가 막히게 맞습니다. 그만큼 서로를 잘 안다는 뜻이죠. 우리 우정이 한두 해가 아니라 50년이 가까워 오는데 이젠 서로 눈빛만 봐도 알죠.”

조영남씨가 칠순이고 다들 60대 후반인데 나이가 들면 좀 변하지 않나요. 그리고 67세에도 막둥이 취급을 받는 것이 억울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잘 변하지 않아요. 그리고 전 막내인 게 편합니다. 우리 집에서도 3형제 중 막내고요. 그런데 나이가 드니 좀 기들이 죽긴 하더군요. 지난번에 쎄시봉 붐이 일면서 방송에도 자주 출연했는데 수시로 사고를 치는 영남형이 형주형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을 했어요. 덕분에 방송이나 공연도 무산될 뻔했죠. 제가 아침에 영남형 집을 찾아가 사과하라고 설득했는데 전 같으면 ‘그게 뭐가 화낼 일이냐?’고 할 영남형이 형주형한테 사과했어요. ‘형주야, 넌 장로고 난 신도니까 네가 이해해’라고요. 이제 철이 드는 것인지, 늙어가는 것인지….”

그래도 무한경쟁의 연예계에서 스트레스를 어떻게 안 받습니까. 정상의 톱스타들이나 항상 웃음을 주는 개그맨들도 공황장애 같은 거를 겪기도 합니다.

“인기는 올라가면 내려오게 되어 있어요. 저도 10대 가수, 가수왕 상도 받았지만 그게 어떻게 영원하겠습니까. 나이가 들고 인기가 떨어지면 부르는 곳도 줄고, 출연료도 적게 받는 게 당연하죠. 그 대신 저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다양한 취미활동으로 항상 스스로를 즐겁게 만들어줬습니다. 뒤늦게 쎄시봉 바람이 불어서 지금까지 바쁘게 활동하는 것이 무척 감사하고 행복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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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계 외에도 쌍용의 김석원, 동아의 최원석 회장을 비롯해 정·재계 인사들과 친분이 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김석원 회장은 제 형과 고교 동창이어서 수시로 우리 집에 놀러와서 알게 됐고, 최 회장은 다른 일로 알게 되었는데 아직까지 한 번도 제게 말을 놓은 적이 없을 만큼 서로 존중하는 사이입니다. 제가 가수여서 기업체나 단체, 정부 행사에 자주 참여하니 많은 분들을 자연스럽게 만납니다. 건설사들이 한창 중동시장에 진출할 때는 직원이나 교민들 위문행사도 많이 갔고 군부대 위문공연도 참 많이 갔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께 단 한 번도 인사나 사업청탁을 한 적이 없어서 그 인연이 길게 이어지는 것 같아요. 항상 뭔가 검은 마음을 감추고 손 비비는 사람들 사이에서 순수하게 웃고 있는 제가 귀해 보였나 봅니다.”

그들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때 친분을 맺었는데 이젠 추락한 모습을 보면 어떤지요.

“누구나 다 부침이 있죠. 승승장구만 하고 정상에만 머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산악자전거에서 인생철학을 배웁니다. 산악자전거를 배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멋진 기술로 장애물을 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속도와 자세를 찾는 것입니다. 이걸 찾으려면 중심을 잘 잡아야 합니다. 그게 곧 인생이에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넘어서고 싶은 장벽을 수도 없이 만나죠. 그럴싸한 기술로 장애물을 넘고 싶어 위험한 시도를 해보곤 하지요. 보통은 그러다 균형을 잃고 쓰러집니다. 무리하지 않게 나에게 맞는 속도와 자세를 찾기 위해 수도 없이 멈춰봐야 합니다. 산악자전거에서 인생을 배운 후 가수생활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또 자전거나 카메라, 와인 등 계속 새로운 상품들이 나오니 그걸 공부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행복은 자기가 느끼고 만드는 겁니다.”

링컨의 말처럼 마흔이 넘으면 얼굴이 이력서다. 김세환씨의 해맑고 평화로운 얼굴을 보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얼굴성형이 아니라 마음성형이란 생각이 든다. 남들에게 나눠줄 행복 바이러스를 많이 갖고 있는 것, 그것이 노후에 가장 필요한 무기인 것 같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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