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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세계 각국의 화폐 이야기]일본서 그린 5만원권 독도, 여자가 된 남자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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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엔 홀로그램 제작기술 없어 지도 그림 의뢰

곱상한 외모 때문에 대통령 성별 착각해… 단추 위치 바꿔 재발행

본격적인 여름휴가철이 시작됐다. 휴가를 맞아 국내 여행을 하는 이들도 많지만, 해외로 떠나는 이들도 크게 늘고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준비해야 할 필수품 중 ‘현지 화폐’가 빠질 수 없다. 지난 15일 45개국 지폐가 한곳에 모여 있는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지하 1층 ‘화폐전시관’을 찾아 각국 화폐에 담긴 이야기를 들어봤다.

경향신문

■ 지폐 한 장 액면가가 무려 830만원

세계에는 260여가지의 다양한 화폐가 있다. 이 가운데 액면가가 가장 높은 지폐는 1만싱가포르달러와 1만브루나이달러다. 둘 다 환율이 같은데, 최근 환율로 계산하면 1장에 약 830만원에 달한다. 외환은행 화폐 전문가인 박억선 외환사업부 차장은 “한국은 5만원권이 지하경제에 활용돼 시중에 잘 유통되지 않는다는 얘기가 많은데, 만약 이 같은 고액권이 국내에 나오면 더 유통되지 않을 것”이라며 “싱가포르에 이런 고액권이 유지되는 이유는 정치권이나 경제권에서 나쁜 의도로 유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경제권에서 배워야 할 점”이라고 말했다.

역대 가장 액면가가 높은 지폐는 미국에서 발행한 10만달러(약 1억원)짜리 지폐다. 이 지폐는 1969년 이후로는 발행되지 않는다. 박 차장은 “이제는 유통되지 않는 1만달러 등 고액권을 진짜라 속이는 사기범들도 많다”며 “고액권일수록 위조지폐가 많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 화폐를 취급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아프리카 국가 짐바브웨에는 숫자 ‘0’이 14개나 붙은 100조달러짜리 지폐도 있다. 이 지폐는 액면가는 엄청나지만 발행 당시 가치는 1달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돈의 가치가 너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2009년 화폐개혁으로 발행이 중단된 이 지폐는 화폐 수집가들 사이에서 인기여서 최근에는 1장당 20달러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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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로화 일련번호 X, U, S, V는 제조국

세계에는 다양한 종류의 화폐가 있는 만큼 화폐에 담긴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많다. 아프리카 국가 탄자니아가 2003년 발행한 1000실링짜리 지폐에는 탄자니아 대통령의 초상화가 담겨 있다. 경제규모가 크지 않은 국가들은 화폐 생산을 타국에 의뢰해서 수입하는데, 탄자니아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외국에 초상화를 보내 만든 지폐에 문제가 생겼다. 대통령이 입고 있는 옷이 여성용이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성복의 경우 단추가 오른쪽에 달려 있고, 여성복은 단추가 왼쪽에 달려 있다. ‘곱상한’ 외모를 가진 탄자니아 대통령의 사진을 본 외국 화폐 디자이너가 그를 여성으로 착각해 발생한 일이었다. 2006년 탄자니아는 단추 위치를 바꿔 남성복을 입은 대통령의 초상화로 다시 발행했다.

유럽 18개국에서 통용되는 유로화. 모두 똑같이 생긴 유로화로 보이지만, 지폐의 뒷면에 적힌 일련번호를 보면 어느 나라에서 만든 지폐인지 알 수 있다. 일련번호가 X로 시작되는 지폐는 독일, U는 프랑스, S는 이탈리아, V는 스페인에서 생산한 것이다. 또 자세히 비교해보면 지폐의 액면가를 적은 숫자의 색깔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중앙은행이 없는 홍콩은 HSBC·스탠더드차타드·중국은행 등 3곳의 은행에서 홍콩달러를 발행한다. 500홍콩달러 지폐 뒷면을 보면 홍콩국제공항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같은 공항이지만, 발행한 은행에 따라 차이가 있다. HSBC은행에서 발행한 500홍콩달러 지폐에는 항공기 착륙 장소가 인쇄돼 있고, 중국은행에서 발행한 500홍콩달러 지폐에는 이륙하는 장소가 인쇄돼 있다. 신한은행 화폐 전문가 배원준 외환사업부 차장은 “이미지가 완전히 다르면 사람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어 차이를 두되 이 같은 미묘한 차이를 뒀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5만원권에 있는 홀로그램에는 한반도 지도가 그려져 있다. 독도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박 차장은 “홀로그램 기술은 우리에게 없어 외국에 입찰을 부쳤는데 일본이 싼 가격을 제시했다”며 “독도를 강조한 이 홀로그램은 사실 일본에서 수입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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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지난 15일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에 있는 화폐 전시관에서 다양한 나라의 화폐를 관람하고 있다.


■ 위조 가장 힘든 화폐 1등은 스위스

화폐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세계 최고의 화폐로 스위스 화폐를 꼽았다. 눈에 띄는 스위스 화폐의 가장 큰 특징은 인쇄가 세로로 돼 있다는 점이다. 한국을 포함한 대다수 나라들의 지폐는 가로(긴 부분을 수평으로)로 인쇄돼 있다. 이에 반해 스위스 지폐는 세로(짧은 부분을 수평으로)로 숫자, 이미지가 인쇄돼 있다. 이는 일반 사람들이 돈을 주고받을 때 세로로 주고 받는 데서 착안했다고 한다. 스위스 화폐의 혁신성과 실용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화폐의 우수성을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는 위조방지 요소가 얼마나 많이 들어 있냐는 것이다. 스위스 지폐는 세계에서 위조방지 요소가 가장 많이 들어 있는 지폐이기도 하다. 20개 이상의 위조방지 요소가 들어 있다. 특히 스위스 지폐에는 미세한 구멍을 뚫어 숫자 또는 글자를 나타내는 첨단기술 ‘천공’도 반영돼 있다.

일반적으로 지폐는 두 개의 판을 겹쳐 찍어내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이에 비해 스위스 화폐는 컴퓨터그래픽으로 모든 작업을 진행한다. 한국조폐공사 김재민 화폐 디자이너는 “판이 아닌 컴퓨터를 이용한 인쇄작업으로 지폐에 복잡한 패턴을 구현했고, 다른 나라 지폐에 비해 인물의 얼굴도 매우 디테일해 위조하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세계에서 위조하기 가장 힘들다는 스위스 화폐. 이들은 왜 이렇게 지폐에 많은 노력을 들였을까. 혹시 위조지폐가 극성을 부려서일까. 배 차장은 “스위스 은행이라고 하면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같은 맥락에서 스위스는 ‘우리의 화폐는 이만큼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 미국 100달러의 원가는 단돈 500원

물건을 사거나 팔 때 교환증서로 쓰기 위해 발명된 화폐는 단순한 교환증서를 넘어서 한 국가의 역사·문화·과학 등이 모두 집약된 ‘국가의 상징’이 되고 있다. 김 디자이너는 “화폐는 보이는 면(초상)과 보이지 않는 면(위조방지 요소)이 중첩된 인쇄물”이라며 “한 나라의 역사·문화·과학이 총체적으로 담겨 있다”고 말했다.

화폐를 통해 그 나라의 자연환경도 엿볼 수 있다. 호주·뉴질랜드 등 오세아니아 국가나 베트남 등에서는 면으로 만든 지폐가 아닌 플라스틱 소재 ‘폴리머’로 만든 지폐를 사용한다. 배 차장은 “폴리머는 오래 쓰고 만들기가 어려워 위조방지에 강하다는 장점도 있지만 습기에도 강해 습기가 많은 더운 나라에서 많이 사용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폴리머로 지폐를 만들어 쓰는 국가들이 많아지는 추세다. 이들 폴리머 지폐를 쓰는 나라들은 폴리머 지폐를 처음으로 개발해 특허권을 가지고 있는 호주에 로열티를 줘야 하지만, 내구성이 뛰어나 면 지폐보다 폴리머 지폐를 선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폴리머 지폐에도 단점은 있다. 면 지폐에 비해 접었다 폈을 때 깨끗이 펴지지 않고, 플라스틱 재질로 인한 환경호르몬 문제 등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도 있다.

신용카드·모바일 결제 등 새로운 지급결제 수단들이 나오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지폐가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배 차장은 “전자결제로는 다 소화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며 “개인의 소유 욕구도 있고, 국가 간 자금 결제·자국 관리 차원에서도 지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예를 들며 “미국 100달러짜리의 제작원가는 500원도 안된다. 그것을 10만원에 파는 것이니 아이폰을 만들어 파는 것보다 훨씬 남는 장사인 셈”이라고 말했다.

김 디자이너는 스마트폰·3D프린터 등 장비가 발달함에 따라 위조지폐 제작이 더 쉬울 수 있어 앞으로 화폐 디자이너의 역할이 변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이제 화폐 디자이너는 어떤 초상을 넣고 레이아웃을 정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위조방지 기술을 개발하는 특허 개발자 역할도 해야 할 것”이라며 “미래의 화폐는 지금보다 훨씬 첨단기술이 집약돼 더 다양화되지 않을까 싶다”고 내다봤다.

<김경학 기자 gomgo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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