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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취재파일] 피격 여객기는 왜 우크라이나 동부를 날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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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말레이시아 여객기 격추 사건을 취재하면서 가장 먼저 드는 의문점은 “왜 그곳을 비행했는가?”였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갈등 상황이 하루, 이틀 나온 이야기가 아닌데, 굳이 왜 위험한 그곳을 통과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목적지가 우크라이나 상공을 지나야만 갈 수 있는 곳이라면, ‘다른 항공사 여객기들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국내 항공사와 항공학과 교수들을 상대로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그들과 통화하면서 가장 먼저 듣게 된 생소한 단어가 ‘노탐’이었습니다. 노탐(NOTAM), ‘Notice To Airman’의 약자입니다. 항공사, 조종사 등 운항 관계자들에게 각 국가에서 전달하는 항공고시로, 비행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정보입니다. 예를 들어, “0월 0일 0시에 00지역에서 공군 훈련이 계획돼 있다”는 정보를 다른 항공사들에게 미리 알려줘야 해당 지역의 상공을 피해갈 수 있겠죠. 노탐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면, 업데이트가 안 된 네비게이션을 보고 승용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됩니다. 이런 노탐은 세계 각국에서 하루에도 수천 건씩 들어온다고 합니다. 노탐을 완벽히 숙지해 비행에 나서는 것이 조종사의 중요한 책무이고요.

지난 2월 28일 저녁 7시 36분. 우리 국토부와 각 항공사들에게 중요한 노탐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일부지역 상공을 비행 제한 구역으로 설정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항공기가 이곳을 지나기 위해선 미리 관제 기관에 허가를 받으라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보낸 노탐입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도 같은 노탐을 받았고, 3월 3일부터 우크라이나 상공을 우회해 비행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노탐에서 언급한 지역은 크림반도, 즉 우크라이나 남부에 한정된 곳이었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아예 우크라이나 전체 상공을 우회하도록 한 것이죠. 따라서 피격 사건 발생 전까지,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상공 비행을 제한하라는 노탐이 들어오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각 나라에서 보내는 노탐뿐만 아니라, 미국 연방항공청 ‘FAA'로부터 들어오는 노탐도 받는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우리나라에 미군기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군기지에서 이뤄지는 군사훈련에 대한 정보(즉, 우리나라 상공에서 이뤄지는)를 파악하기 위해서죠. 그렇다면 피격 사건 발생 전, 우크라이나 정부 말고, FAA도 이와 관련한 노탐을 보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FAA는 지난 4월 우크라이나 상공, 특히 크림반도와 흑해, 아조브해 상공이 잠재적으로 위험한 상황이 예상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공지에서 지목된 곳은 크림반도와 크림반도 서쪽부터 남쪽에 걸친 바다 위 상공이었습니다. 역시 동부지역에 관한 비행 제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지난 17일 피격사건 발생한 뒤에야 FAA는 미국 항공사들에게 말레이시아 여객기가 격추된 지점을 포함해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을 지나는 운항을 중단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렇다면 ‘엄밀히’ 말해서, 말레이시아 여객기가 우크라이나 동부지역 상공을 비행한 것은 노탐을 무시하고 벌어진 일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동부지역’을 콕 집어 비행하지 말라고 한 적은 없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을 포함해 독일 루프트한자, 네덜란드 KLM, 홍콩 케세이퍼시픽 항공 등 안전에 보수적인 항공사들은 피격 사건 발생 전부터 이미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을 우회해 비행해왔습니다. 말레이시아 항공사가 잘못된 항로를 비행한 것은 아니지만, ‘안전 불감증’이 있었던 건 사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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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항공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이런 ‘위험한 비행’의 이유가 짐작이 갑니다. 국영항공사인 말레이시아 항공은 최근 3년 동안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그 규모는 우리 돈으로 1조 3천6백억 원에 달합니다. 이런 경영난 속에서 지난 3월 승객과 승무원 2백39명을 태운 MH370편이 실종돼 항공사 이미지마저 추락했습니다.

결국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말레이시아 항공은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을 우회해 비행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을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을 돌아가려면 그만큼 연료가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비행기가 우회한다고 해서 승객들에게 돈을 더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연료비 증가는 고스란히 항공사 부담 증가로 이어지게 됩니다. ‘돈 문제’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도 우크라이나 동부지역 상공을 비행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결국 감수했던 위험은 현실이 됐고, 여객기 실종 넉 달 만에 ‘여객기 피격’이라는 대형 악재를 다시 한 번 떠안게 됐습니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말레이시아 항공 주가는 지난 18일 하루에만 11%나 폭락했습니다. 또 연이은 두 대형 참사로 5백37명의 희생자를 낸 말레이시아 항공사는 (희생자)1인당 최소 1억 5천여만 원을 지급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이는 국제법상 최소 피해 보상 규모이며, 소송까지 이어지면 그 액수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입니다.

말레이시아 항공은 결국 도산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업계의 분석입니다. 만약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개입해서 이번 고비를 넘긴다고 해도, 장기적인 전망은 어둡습니다. 항공사는 이미지가 생명인데, 말레이시아 항공은 실종과 격추라는 잇단 악재로 이미지가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돈 때문에 승객들의 목숨을 담보로 위험한 비행을 고집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말레이시아 항공은 사람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됩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소중한 인명 보호의 중요성을 가볍게 여겼다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이번 여객기 피격 사건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서현 기자 ash@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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