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아이폰에만 있던 그 기능, 내가 해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57세 여성, 안드로이드폰 시각장애인용 앱 개발 스토리

[동아일보]
동아일보

“서두르지 말되 멈추지 말자” 박영숙 에이티랩 대표(오른쪽)가 김정 기술이사와 함께 서울 중구 명동1가 SK텔레콤 창업지원센터에서 포즈를 잡았다. ‘서두르지 말되 멈추지 말라’는 벽면의 스페인어 글귀가 장애인 사업에 대한 그의 각오를 대변하는 듯하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2011년 9월 11일. 서울 용산 미군기지에서는 29년 9개월 동안 주한미군에서 정보기술(IT) 전문가로 일하던 박영숙 씨(57·에이티랩 대표)의 퇴임식이 열렸다.

사무실 상사는 환송사에서 아쉬운 표정으로 “‘안녕’이라는 말 대신 ‘다시 만나자’고 말하는 게 좋겠다(Don’t say good bye, say see you later)”며 “자리를 비워둘 테니 언제든 돌아오라”고 당부했다.

박 씨는 눈물을 쏟았지만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거야’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남은 생은 장애인 복지를 위해 바치겠다”고 선언했던 일주일 전 가족회의를 떠올렸다.

○ 주한미군 최고의 IT 전문가

사촌오빠의 주선으로 박 씨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인 1982년 주한미군에 들어갔다. 자료를 입력하는 오퍼레이터였다. 간단한 일부터 경력을 쌓던 가운데 성실함과 열정을 인정받으며 점차 중요한 일을 맡게 됐다.

1990년대 중반에는 미국 록히드마틴 본사에서 한 달 동안 국방메시지시스템(DMS) 강사 교육을 받았다. 비밀 정보를 전달하는 시스템에 관한 것이라 원래는 미국 시민권자만 들을 수 있었지만 예외적으로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화장실에 갈 때도 인솔자가 동행해 감시할 정도로 보안이 철저했다. 특히 시민권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박 씨만 숙소로 교재를 갖고 갈 수 없었다. 내용이 어려운데 복습까지 못하니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다. 결국 한국에 있는 상사에게 팩스를 보내 ‘과정을 마치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교재 반출 허가를 받아냈다. 수료시험도 통과했다.

박 씨는 아시아 지역에서 몇 명 안 되는 DMS 전문가가 됐다. 아시아 전역의 시스템 관리자들이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수강생들이 영어 발음이 안 좋다며 무시하면 ‘시스템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알아서 배우라’며 배짱을 부렸다. 3급으로 들어왔던 그는 퇴임 직전 11급까지 승진했다. 한국인 군무원으로서는 거의 최고의 직급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시각장애인이 옆 부서에 입사했을 때 미군 측이 사무실 전체를 뜯어 고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화면 낭독 프로그램인 ‘스크린리더’와 지금은 일상화된 ‘터치스크린’을 처음 봤다. IT가 장애인 복지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2000년대 중반 쉰 살이 다 될 무렵 결심의 순간이 닥쳤다. 남편 사업은 순탄했고 아이들도 잘 컸지만 ‘이게 인생의 전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 꿈꾸던 사회복지 사업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 잠을 설쳤다.

늦바람은 무서웠다. 그는 ‘IT를 활용한 장애인 교육’을 주제로 잡고 방송통신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3년 동안 두 개의 석사 학위(단국대 사회복지학, 방통대 이러닝학)를 더 땄다. 할수록 절실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50대 아줌마, 장애인을 위한 창업에 나서다

박 씨는 시각장애인 교육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지금 꼭 필요한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개선 방안에 대한 연구는 10년 전에도 있었지만 실제로 제품을 개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플의 아이폰에 들어 있는 시각장애인용 스크린리더 애플리케이션(앱)을 보고 이거다 싶었다. 안드로이드폰에서는 같은 제품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해야겠다.’

고도약시이면서 20년 넘게 저시력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온 김정 씨(현 에이티랩 기술이사)가 힘을 보탰다. 1년이 넘는 연구개발(R&D) 과정을 거쳐 스크린리더 앱인 ‘샤인 리더’와 화면 확대 앱인 ‘샤인 뷰’를 개발했다. 되겠다는 확신이 섰고 30년 가까이 일하던 직장을 그만뒀다. 주변에선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두느냐며 만류했지만 결심은 확고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순탄하지는 않았다. 안드로이드용 앱들은 제조사에 따라 버전도 다르고 디자인도 달랐다. 이 때문에 샤인 리더와 뷰를 사용하려면 스마트폰 사용환경을 바꾸는 작업(루팅)이 필요했다. 일반인이 하기는 쉽지 않았다. 제조업체에 ‘출시 단계에서 앱을 넣어 달라’고 매달렸지만 보안 등의 문제로 퇴짜를 맞았다.

애써 만든 제품을 유통할 길이 막히자 회사에 위기가 닥쳤다. 수억 원을 쓴 박 씨는 빚더미에 앉았다. 그는 “직원들이 서너 시간 자면서 매달려 개발한 제품이 사장된다고 생각하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고 회상했다.

힘이 돼 준 건 시각장애인들이었다. 앱을 써본 시각장애인들로부터 ‘포기하지 말라’는 응원이 쏟아졌다. 한 시각장애인은 “처음 스마트폰을 사용한 날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회사가 어려우면 나부터 뭐라도 하겠다”는 e메일을 보냈다. 1만∼2만 원씩 돈을 모아와 돌려보낸 적도 있었다. 박 씨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다시 일어났다.

▼ 시각장애인 “스마트폰 처음 써본 날 감격” ▼

○ 시각장애인들의 스마트한 삶을 위해


에이티랩은 1년이 넘는 추가 R&D를 거쳐 작년 말 ‘샤인 플러스’를 내놨다. 박 씨와 직원들이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만든 앱이었다. 스크린리더와 화면 확대 기능을 통합했고, 루팅 작업 없이 다운로드만 하면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아직 정식으로 유통은 안 되지만 홈페이지(www.atlab.biz)에서 시연 동영상을 볼 수 있다.

에이티랩은 기술력을 인정받아 최근 SK텔레콤의 베이비붐 세대 창업 지원 프로그램 ‘브라보, 리스타트!’ 대상으로 선정됐다. 상금과 사무실, 멘토가 지원됐다. 하지만 아직 그의 앞에는 유통채널 확보, 수익모델 개발 등 만만치 않은 과제가 놓여 있다.

국내에는 25만 명의 시각장애인이 있다. 세계에는 총 4000만 명의 시각장애인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일반인이 당연하게 누리는 스마트한 생활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11일 에이티랩 사무실에서 만난 김정 이사는 기자에게 “지하철에서 신문을 읽는 모습이 제일 부러웠다. 그래서 앱 개발에 참여했고 대표님 덕분에 저 같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던 박 씨의 눈이 촉촉이 젖었다. 그가 시각장애인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다시 벼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오늘의 동아일보][☞동아닷컴 Top기사][☞채널A 종합뉴스]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